음서로 출사한 전라도 낙안 태생의 김자점(1588~1651)은 특출한 재주나 공적이 없어 한직을 전전하
던 중,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한 공로로 정사공신 일등에 책록되면서 병조좌랑에서 일약 동부승지로
벼락출세를 했다. 병자호란 때는 도원수에 제수되어 서북방면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인조 14년(16
36) 12월 6일, 의주 용골산에서 대규모의 적이 압록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다는 다급한 봉화가 올랐
다. 봉화대를 지키는 군졸로부터 급보를 받은 수하 장수는 곧장 도원수 김자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성화가 도성에 도착하면 전하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백성들이 불안해한다.”
봉화는 결국 다음 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적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화급한 봉화가 올
랐지만, 이때도 김자점은 같은 이유로 봉화를 다음 봉수대로 전하지 않았다.
12월 9일, 김자점은 군관 신용을 불렀다.
“의주로 가서 동태를 살펴 보고하라. 헛되이 봉화를 올린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베어도 좋다.”
판단능력이 없는 김자점은 차마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랴 여기고 있었다. 설사 군대가 쳐들어오더
라도 평양에 이르기 전에 누군가 막아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성을 나선 신용 일행은 의
주까지 갈 것도 없었다. 적은 이미 숙천까지 당도하여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 신용은 화급히 달려
와 김자점에게 보고했다. 김자점은 신용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같은 급보가 잇따르자 그제야 조정에
장계를 띄웠다. 그러나 전령은 앞질러가던 청군의 척후부대에 잡혀 장계를 빼앗기고 살해되었다.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고 있는 백마산성과 김자점이 지키고 있는 자모산성을 거
들떠보지도 않고 한양으로 곧장 내달았다. 청군의 앞을 가로막는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청군이 중
간에 있는 봉수대를 점령했기 때문에 봉수체계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북쪽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 배치된 모든 산성의 군대는 연락이 두절된 채 고립되어 있었다. 모두가 김자점이 초기에 봉화연
락을 임의로 차단했기 때문에 발생한 혼란이었다. 12월 12일 임경업 장군이 보낸 장계가 조정에 도착
했을 때는 청군이 이미 개경을 점령한 채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청국에 항복한 것도 모두 김자점의 잘못
된 봉화 차단조치 때문이었다. 삼전도에서 오랑캐 두목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고
이마와 무릎이 까진 채 창덕궁으로 환궁한 인조는 김자점을 강화도 석모도에 유배했다. 김자점을 사
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반정공신 덕을 본 것이다.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의 베갯머
리송사 덕분에 곧 해배되어 강화유수에 제수되었다가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판서로 초특급 승차를 했
다. 인조의 총애가 온통 소용 조씨에게 기울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 인연으로 김자점은 소용 조씨의
장녀인 효명옹주를 손부로 맞았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가 8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인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소용
조씨의 간언을 믿고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를 보위에 올리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었
다. 소용 조씨가 세자를 모함한 것은 세자빈에게 내명부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명부에는 세자의 모후인 인렬왕후가 승하한 뒤 계비로 간택된 장렬왕후가 서열 1위였는데, 나이도
어리고 물정도 몰라 먼저 입궐한 소용 조씨가 실질적으로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보
다 선배인 세자빈이 돌아오면 문제가 달라질 터였다. 어떻게든 세자 부부를 처치해야 했다. 소용 조
씨는 영의정 벼슬을 미끼로 김자점과 내통하여 세자를 암살하기로 모의가 되어 있었다. 김자점이 약
방제조를 겸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충성을 맹서한 김자점이 순순히 밀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인조 23년(1645) 4월 23일, 세자가 발열로 인한 오한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전갈이 김자점의 귀에 들
어왔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학질이었다. 어의 유후성이 탕약을 올리려 했지만 약방제조 김자점이
부득부득 침을 주장했다. 김자점은 급히 이형익을 불렀다. 소용 조씨의 심복인 돌팔이 침쟁이였다.
떠돌이로 침술을 배웠지만 독을 주입할 사혈(死穴)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결국 가벼운
학질이 발병한 지 사흘 만에 침으로 독살되었다.
궐 안팎에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지만 인조는 사인도 규명하지 않고 어의와 이형익에게 책임도 묻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세자를 입관했다. 조선 최고의 풍수쟁이에게 명하여 흉지를 고른 뒤, 능도 원도 아
닌 묘에 매장했다. 장례절차가 끝나자 인조는 자신의 수라에 독약을 넣었다는 누명을 씌워 며느리인
세자빈까지 사사했으며, 소현세자의 두 아들도 제주로 유배한 뒤 살해했다. 소용 조씨 각본, 김자점
감독, 인조 제작의 슬픈 사극이었다.
소현세자 독살이 마무리된 어느 날, 김자점은 소용 조씨의 부름을 받고 후궁전으로 들었다. 조씨는
꽃단장을 한 채 사향 내음을 은근히 풍기며 김자점을 맞았다. 실인즉 인조를 맞을 채비를 한 채 기다
렸지만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인조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씨는 여기저기 박아놓은 첩자
를 통해 그 시각 인조가 귀인 장씨와 운우지락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그럴수록 음심이
더욱 동해 꿩 대신 닭을 부른 것이었다. 조씨는 능숙한 솜씨로 서둘러 김자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
다. 며칠 뒤 김자점은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소현세자를 독살할 때만 해도 천년만년 보위를 누릴 듯하던 인조도 겨우 4년을 더 살고는 재위 27년
(1649) 5월 8일에 죽었다. 뒤를 이은 효종은 보위에 오른 지 6일 만에 김자점을 전라도 광양에 유배했
다. 아무도 말은 하지 못했지만 다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데 대한 업보라 여기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
으로 이배된 김자점은 효종을 끌어내릴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역관 이홍장을 매수하여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것이다. 발끈한 청나라 황제는 압록강 건너편에 군사를 배치해
놓은 뒤 문책사절을 보냈다. 효종은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리바리 싸주고 전혀 그럴 의사가 없다고 변
명하여 겨우 사태를 수습했다.
효종 2년(1651), 청나라의 힘을 빌리려다 실패한 김자점은 직접 효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들 김익
을 시켜 수어청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반란은 미수에 그쳤고 내사 끝에 사태
의 전말이 밝혀졌다. 친국 끝에 김자점은 효종을 끌어내리고 소용 조씨 소생인 숭선군을 옹립하려 했
다고 실토했다. 김자점과 그의 아들 김익은 능지처참형에 처해졌으며 처첩들은 노비가 되었다. 소용
조씨와 숭선군은 사사되고 가족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김자점의 말로는 뼛속까지 간신다웠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일본 오사카를 휩쓸고 지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까지 불어 시원함이 그지 없는 요즈음 입니다. 하늘까지 맑고 높은 가운데 구름의 운치 또한 더하여 야탑역에서 연장하여 수서역까지 잇는 양재천변을 걸었습니다. 야탑역까지 늘 하던되로 나선 길이라 구두신고 장거리 걷기 였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가을이 가까이 닥아온 낌새가 곳곳에 있어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