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은 간신이라기보다 그 막강한 권력을 나라 발전에 쓰지 않고 청사에 오명을 남긴 멍청이였다.
홍국영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먼 친척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간여했던 정순왕후는 정조를
독살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선을 멸망시킨 조선 후기의 최고 악녀였다. 홍국영은 24세인 영조 48년
(1772)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2월 승정원 가주서로 출사했다. 이어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사관이 되
어 영조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조 50년에는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어 정조를 가르치면서 운명의 물
줄기가 크게 바뀌었다.
재위 52년(1776) 3월 5일, 영조는 경희궁 집경당에서 치매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 재위기간 51
년 7개월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즉위일성이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떠죽이는 동안 목숨을 걸고 구명을 호소
한 사람은 어린 세손(정조)밖에 없었다. 왕족들도 사도세자의 처가에서도 대신들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세자빈 혜경궁 홍씨도 행여 친정에 누가 될까 싶어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비정한 아비 영조는 아무도 사도세자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엄명했다. 그런데
정조가 보위에 오르자마자 모든 신하들을 향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이
다. 내 아비는 죄인이 아니라 너희들이 방관하는 가운데 무고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선전포고였다. 신
하들은 숨을 죽였다.
정조는 즉위 사흘 만에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4개월 뒤에는 도승지에 제수했다. 홍국영의 나
이 28세 때였다. 이어 궐내에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금위대장에 제수했다. 비서실장과 경호실
장을 겸직시킨 것이다. 홍국영은 정조의 의중을 간파하고 홍인한‧정후겸‧윤양후‧홍계능 등 사도세자
를 죽음으로 내몰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던 인물들을 탄핵하여 권력에서 축출했다. 사도세자 무고
에 앞장섰던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도 탄핵하여 유배에 처했다. 여기까지는 정조의 권세를 튼튼
하게 다지기 위한 순수한 충정이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홍국영은 열세 살 어린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어앉혔다. 원빈 홍씨다. 정조
는 자식 복이 없었다. 정비 효의왕후는 소생이 없었고 후궁인 의빈 성씨는 두 아이를 유산한 뒤 세자
를 출산했으나 세자가 4년 만에 요절했다. 그 뒤 공주를 낳았으나 그해에 잃었고, 다섯째 임신 중 태
아와 함께 숨졌다. 결국 간택후궁인 수빈 박씨가 낳은 남매 중 아들이 훗날 보위(순조)를 이었다. 간
택후궁인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도 소생이 없었다. 게다가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는 간택된 지
1년 만에 병사했다.
눈이 뒤집힌 홍국영은 동생의 죽음을 효의왕후의 사주에 의한 독살로 단정하고 나인과 노복들을 문
초했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듣지 못하고 무고(無故)한 궁인들만 죽어나갔다. 이어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담을 죽은 여동생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세자로 책봉하려는 흉계를 꾸미기 시작했
다. 상굿도 이를 눈치채지 못한 정조는 홍국영을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대제학에 잇달아 제수했다.
홍국영의 간이 슬슬 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참에 효의왕후의 수라에서 독이 발견되었다. 기미상궁의 은수저가 시커멓게 변한 것이다. 동생의
죽음을 효의왕후 짓으로 확신하고 있던 홍국영의 복수였다. 이조판서 김종수, 예조판서 김익, 영의정
김상철에 이어 옥당과 삼사에서도 홍국영을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이미 증거와 증인도 확보되어 있
었지만 정조는 계속 홍국영을 두둔했다. 그러나 전국의 유림에서도 상소가 끊이지 않자 결국 정조는
마지못해 홍국영을 강원도 강릉으로 유배했다. 홍국영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정조를 원망하다가
화병으로 죽었다.(펌글)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낮동안 힘찬 걷기에 땀도 나지만 잠깐 그늘에서 쉬면 금방 시원해 지는게 요즈음 날씨 여서 여간 좋은게 아닙니다. 이름 하여 가을이 성큼 왔고 또한 이를 기분좋게 맞이하며 즐기는 생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변을 걸어시며 이 가을의 풍치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