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옥성호 집사(고 옥한흠 목사의 아들)의 글을 통해서였다. 일면식도 없고, 생전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도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었는데 한국교회에 큰 역할을 해 주신 대단하신 목사님 정도였다.
그러나 옥성호 집사와 대형 교회의 진실 공방에 진실의 본질은 간데없이 누군가는 희생되고 있는 모순과 차츰 대형 교회의 비리, 고질적 병폐, 말하기도 민망한 성폭행 등에 평신도인 나도 눈을 떠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연 교회인가?
세상과 다른 건 도대체 무엇인가? 출석 교인 300명이 조금 넘는 교회, 35년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개인적인 사유로 근 삼 년 만에 심청이가 눈을 뜨듯 진짜 복음의 맛을 알게 된 집사의 눈에는 도저히, 내가 믿는 한국교회에서의 일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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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쿼바디스'를 보았다. 진정한 교회란 무엇인가 나는 고민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평신도가 말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첫째 느낌은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 둘째는 너무 무지하고 안일했다는 것. 셋째는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공포이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맡겨 놓을 수 있을지 공포감이 밀려왔다.
너무 냄새나고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일에 나는 아닌 척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넌 하나님의 자녀니까. 세상의 손가락을 고난으로 여겨야 한다는 착각 아닌 착각 속에 지내 온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그냥 마냥 급한 마음이 이 글을 쓰게 하고 있다.
그 허둥됨과 모자람에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미 상식의 도를 넘은 교회, 정치보다 더 정치적인 교회, 영화 내내 충격적인 것은 만신창이가 된 교회, 회복이 불가능한 교회라는 것이다. 이제는 개혁도 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될 동안 난 무엇을 했을까. 그런 자책과 자문을 통해 이 영화를 본 소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마치, 내가 모욕을 당한 것처럼 마음이 바들바들 떨린다. 예수님을 이렇게 능멸한 한국교회에,침몰하는 것은 이 사회뿐이 아니었다. 대부분 한국교회들의 병폐는 익히 알고 이 영화를 봤는데 실상은 더 끔찍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충분히 예상했다. 많이 아플 거라고.. 서서히 침몰해 가는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다'가 이 영화의 메시지일까.
가짜가 진짜 역할을 해대고, 진실은 어디 개에게나 줘 버린 듯 불의에 눈감고 본인 편의주의적 성경 해석과 그걸 옹호하는 대다수 교인들을 보니 역시 가짜의 힘은 대단히 세다. 포장된 현란한 말들에 넘어가고 '왜?'라는 질문 없이 순한 양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순종이라는 그럴듯한 말에 많은 교인들이 침묵하고 생각하기를 거부해 온 결과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말에 침묵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저 돈을 사랑하고 성장. 오직 성장만 추구하는 허영과 탐욕 속에 우리는 예수를 팔고 장사해 온 장본인들이란 사실은 뼈저리게 성찰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교회는 세습과 관련 없어, 우리 교회는 괜찮아, 라고 생각하는 단순 편의적, 이기적인 생각은 버렸으면 한다.
우리 교회 일에 왠 참견이냐 말하겠지만, 내가 믿는 예수가 그렇게 사기꾼들에게 유린되고 오히려 한국의 기독교를 개독으로 전락시킨 것에 일말의 양심과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기뻐하라'. '비판하지 말라'. 수없이 이 두 성경 구절에 우리를 가두어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런 시대에 기뻐하라니. 천지가 불한당에 도둑들이 판을 치는데 비판을 하지 말라니…. 마치 세월호 사건에서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처럼 무척 불편하게 느껴진다.
또한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은 '먹사'들을 통해 나온다. 특히,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기독교'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한 심정밖에 없다. 값싼 용서가 낳은 결과는 기독교에 매우 치명적이었다. 판단할 자가 오직 하나님. 심판도 하나님이라는 명목 아래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또 다시 죄를 짓는 어이없는 행태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늘 뼈저린 성찰 대신, 무언가의 합리화가 그 자리를 메꿔 오질 않았나. 우리는 그저 목사가 얘기하는 대로 아멘만 외쳐대는 평신도인가? 사회 불법적인 일에도 교회는 남다른 성역을 강요하는가? 너무 부끄러운 일임에도 자각하지 못하고 두둔하는 많은 교인들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당신들의 영적 분별력과 판단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아래 연대하여 하나님 품 아래 은밀하게 손잡고 있어야 할 늘 흔히 말하고 있는 형제자매들 아닌가? 공의의 하나님은 당신들에게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마땅히 지켜 내야 할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불법에 눈감고 당신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것이 과연 이단과 무엇이 다른가 곰곰히 생각해 보고 싶은 날이다.
우리의 진짜 이웃은 누구인가?
울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 곁에는 있는가?
성전 건축을 위해 몇 천억씩 쌓는 동안, 급식 낼 돈이 없어 급식 카드를 받아 편의점을 전전하는 어린이들,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는 어린 미혼모들, 고공에 매달려 삶과 일터를 절규해야 하는 나라, 자살률 1위, 부정부패 1위, 삶의 터전에 무시무시한 암을 발생하는 송전탑을 세우겠다는 한전과 싸우고 천막 치고 밧줄로 몸을 묶으며 죽을 각오로 싸우는 밀양·청도 노인들, 창조 세계를 거스르는 자연 훼손에 앞장서는 강원도 골프장이나 올림픽 때문에 수백 년 지켜 온 가리왕산의 훼손.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건축 헌금을 내고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누구를 위해 십일조를 바치는가? 생각해 볼 문제다. 이웃이 아프다. 아파서 피눈물을 흘린다. 세월호로 이유도 모르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아이들이 죽어 갔다. 그 심정을 모른 척하며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도 다 이런 법을 제정해야 하느냐, 라고 묻는 기독교인. 당신이 예수님과 함께 울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가?
극장 안 인원은 20명도 채 안 되었다. 씁쓸했다. 이 영화는 특히 남편과 12살, 6살 아이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족 예매를 한 것이었다. 옆에 앉은 6살 꼬마 아이의 눈에 비친 교회는 "나쁘다"이다. 나.쁘.다. 6살 꼬마는 매우 놀라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면서 "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거냐"는 내게 질문했다. 진실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것이 거짓말인지 잘 모른다고….
진실은 불편해! 교회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영화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있다.
나는 평신도로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아이가 평신도의 아이로서 한국의 아이로서 정말 분별력이 무엇인지, 부당한 일에 진실을 찾고자 소리 내는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도 7만 개나 되는 십자가 속에서 신음하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썩었다'라는 자조의 탄식을 하기보다, 좋은 사람들, 희망의 불씨를 품은 사람들, 낮은 곳에서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있는 밀양·청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비정규직의 눈물과 함께 울고 웃는 우리의 예수님의 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드려야겠다. 세월호의 아픔에 함께하는 교회라면, 이 지구상에 핵이 주는 무서운 경고에 반응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분명 예수님이 함께하는 교회가 아닐까. 좋은 교회 선별법을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 속에서 싸우기만 하는 많은 교인들을 보았다. 사랑 없이 꽹꽈리 같은 소음을 내며 세상사람들 앞에서 계속 싸우고만 하고 있을 텐가. 우리는 선한 사람들과 선한 목적(공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을 위해, 돈만 아는 저질,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더 단단하게 뭉칠 것이니. 더 이상 기독교와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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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렇게 망해 가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내 자녀에게 분열과 탐욕을 유산으로 남겨 줄 것인가? 망해 가는 것 같은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난 평신도로서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 일부 목회자들이여, 당신의 행실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셨노라고…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아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함께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쿼바디스'를 꼭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은 고민을 시작할 때이다
전선경 / 집사. 방사능안전급식실현서울연대 대표. 두 딸을 키우며 살다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방사능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2011년 7월 차일드세이브를 설립했고, 현재는 '방사능 시대, 우리가 그린 내일' 운영위원, 태양의학교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첫댓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도해 내기 위하여 초월적 지식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는 보편적 지식의
세계라는 허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적 지식을 엿볼 기회가 매우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통하여 오는 깨달음은 보통 사회적 강자나, 유명한 사람이나, 부자나, 학식높은자나, 기타등등
그런 자들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광야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슬프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요한자들은 고통스러운 광야의 울림을 우스꽝스럽다거나, 허황되다거나, 현재에 맞지 않는다고
비웃지요. 하나님의 뜻은 매우 초월적 세계에서 작동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빈들에서 풍찬노숙으로 제자들과 거지나 다름없는 구도행을 나섰습니다. 아픈사람, 가난한 사람,
희망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 사람 사람.........
그들 앞에 나타난 부자청년에게는 그 배경없고, 이해안되는 행동보다 자신의 인맥, 재산, 배경이 훨씬 커보였지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일갈은 부자 청년에게 매우 무익해 보입니다.
우리가 보는 종교세계의 담을 넘어야 진짜 넓고 광활한 하나님나라가 보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종교라는 솥이 너무나 따뜻하고 좋기 때문에 불구덩이에 들어가 타죽을 때 까지 모릅니다.
@iDeaRush 옳습니다. 구구절절
맞아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멀어요....ㅎㅎㅎㅎㅎ
오직 돈과 교회당 건물 세력 확장이 목적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