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의 「유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소설로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조선일
보에 연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되어 편지와 일기 등을 적절하게 삽
입한 소설은 춘원의 순수한 플라토닉 러브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장편소설 「유정」은 우리나
라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바이칼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중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남백파의 딸
정임을 맡아 기른다. 정임이 자라면서 처자 티를 풍기기 시작하자 최석의 가슴에 이성애가 움트기 시
작한다. 최석은 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뒤 정임을 왜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정임이 아프다는 연락
이 오자 한달음에 달려가 수혈을 해주어 정임을 살려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석의 여편네는 질투
끝에 두 사람을 치정관계로 비하하여 언론에 폭로한다.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혀 교장직을 사퇴한 최
석은 왜국으로 건너가 정임을 뜨겁게 포옹해준 뒤 시베리아로 속죄의 여정을 떠난다. 최석은 결국 바
이칼호로 가서 죽음을 맞이한다.
바이칼호는 동서 79㎞, 남북 636㎞, 최고수심 1642m, 유역면적 56만㎢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고
너른 호수다. 유역면적은 한반도의 2.5배에 이른다. 북아메리카의 오대호를 다 합쳐도 바이칼호보다
쪼매 작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물의 20%가 바이칼호에 부존하는데, 336개의 강이 바이칼호로 유입
되기 때문에 이러한 수량 유지가 가능하다. 바이칼호에는 1085종의 조류(藻類)와 52종의 어류를 포함
한 1550여 종의 동물이 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60%가량이 고유종이다. 바이칼은 타타르어로 ‘풍요로
운 호수’라는 뜻이다.
바이칼호에서 가장 큰 알혼섬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추정되고 있다. 춘원이 그 사실을 알고 수차에
걸쳐 바이칼호를 답사한 뒤 「유정」의 배경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유정」은 조선‧중국‧러시
아‧왜국 등 4개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주무대는 바이칼호다. 편지 형식을 빌려 소설 속에 등장하
는 바이칼호는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믿는 벗 N형!
나는 바이칼호의 가을 물결을 바라보면서 이 글을 쓰오. 나의 고국 조선은 상굿도 처서 더위로 땀을
흘리고 있겠지만, 이곳 바이칼호 서편 언덕에는 벌써 가을이 온 지 오래요. 이 지방의 유일한 과일인
야그드의 핏빛조차 벌써 서리를 맞아 검붉은 빛을 띠고 있소. 호숫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
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서 울던 벌레와 웃던 가을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버렸소. 보이고 들리는
것은 오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호의 물과 광막하고 메마른 들판뿐이오.>
1인칭 소설에서 편지는 주인공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좋은 수단 중 하나다. 주인공 최
석은 각각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을 하소연하기도 하고 생
을 마감하려는 심경을 고백하기도 한다. 바이칼호는 이러한 고백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으로서, 러
시아에는 바이칼호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 많다.
소설 속에서 「유정」의 주인공 최석이 도착한 시베리아 지역은 자바이칼州의 주도(州都)인 치타市
였다. 1914년 2월 어느 날 춘원이 미국으로 가던 도중 한동안 머문 곳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
는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을 받아 가던 중이었다. 춘원은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유럽까지 간 뒤 거기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갈 계획이었다. 치타市에는 대
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부가 있었는데, 거기서 여비를 수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춘원은 치타市에 머
무는 동안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부가 발행하는 기관지의 편집 일을 도와주면서 여러 차례 바이칼
호를 다녀왔다. 그러나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대한인국민회에서 여비를 보내줄 수 없게
되자 춘원은 쓰무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춘원이 한동안 머문 치타市는 시베리아의 이름난 유배지였다. 치타市를 한때 오스트록이라고 부르기
도 했는데, 러시아어로 감옥이라는 뜻이다. 18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 출신 청년장교
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혁명에서 영향을 받은 장교들은 프랑스처럼 자유를 달라며, 나폴레옹
을 물리친 공을 앞세워 황제의 폭압정치에 반기를 든 것이다. 반란은 실패로 끝나 청년장교 중 5명은
처형되고 124명은 시베리아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배치되었다. 그 가운데 30년 간 유배형에 처해진
일단의 장교들을 수용하기 위해 계획도시 치타市를 설립했던 것이다.
귀국한 춘원의 발길은 분주했다. 1919년에는 왜국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곧바로 중국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춘원은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귀국해서는 동
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영미권의 여러 작품을 번안하여 소개했다. 이때
신문에 「재생」「마의태자」「단종애사」「흙」 등 주옥같은 소설을 연재했다.
교육에도 적극 나서서 종학원‧경성학교‧경신학교 등에서 철학과 영어 등을 강의했다. 『개벽』誌에
<민족개조론>이라는 장엄한 수필을 발표하여 지도층의 도덕 회복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찾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왜놈들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
으로 풀려났는데, 이후 친일로 돌아서서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후에는 자신의 친일
활동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친한 벗을 만날 때마다 바이칼호에 몸을 던져 죽고싶다는 푸념을 늘어
놓기도 했다. 여비를 좀 넉넉하게 가져가 시베리아에 머물지 말고 곧장 미국으로 건너갔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터이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여즈음 날씨가 참으로 좋아 걷기에 안성맞춤 입니다. 아직 나무잎이 채식되지는 않았지만 시원한 그늘이 땀을 식히고 하늘이 높아 더욱 청명합니다. 이 또한 금방 지나갈듯한 빠른 세월로 우리들 나이도 황혼으로 저물기 전 부지런히 걷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시작하는 한주 더욱 활기차고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