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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공국 멸망후 몽고는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일명 금장한국
대제국 원나라는 억압정치와 폭력으로 점점 세계인들에게
민심을 잃고 결국은...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큰 형님 국가(혈연의로 맺어진 나라였으니)를 돕기위해 원나라로 원군을 파병하기도합니다
이제 러시아는 되살아나게되었습니다.
모스크바 러시아의 토대를 닦은 것은 러시아에서 몽고 지배를 종식시킨 것으로 유명한 이반 3세다. 그는 44년 동안 모스크바의 지배자로 있으면서 동북러시아를 통일하여 오랜 공국시대를 마감하고 러시아를 중앙집권 국가로 만들었다.
▶이반 3세. 노브고로트 공국과 트베리 공국을 평정. 발트 해 연안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동북러시아를 통일했다.
그의 치세에 러시아는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고, 모스크바 대공은 '전 러시아의 군주'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온 러시아에 군림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때까지 러시아 인들에게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 된 '차르'와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도 그고,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의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최악의 제도로 지탄받아오며 혁명의 불씨를 일으킨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도 그다.
22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이 된 이반 3세는 보기 드문 정치수완과 비전을 가진 야심가였다. 그의 통치하에서 러시아의 통합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1470년대 중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전의 블라디미르 대공국이 관할하던 영토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이반 3세의 영토욕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제일의 목표는 당시 그 찬란했던 시기를 보내고 한 귀족문벌의 지배하에 있던 북쪽의 대 노브고로트 공국이었다. 1471년에 이반 3세에게 패한 후 모스크바에 충성을 약속한 바 있는 노브고로트의 지배자들이 다시 이반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모스크바와 함께 러시아 땅을 양분하고 있던 리투아니아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모스크바의 지배에 저항해 온 것이다.
1478년 화가 난 이반 3세는 노브고로트와의 두 번째 교전에 착수했다. 리투아니아의 도움은 실현되지 못했고,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고 있던 노브고로트는 도시를 포위한 모스크바 군대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이반 3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노브고로트 인의 일부를 처형 또는 추방하고 일부는 농촌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상징적인 조처로 민회를 소집할 때 쓰던 종을 모스크바로 가져가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영지인 노브고로트에 민회의 종은 필요 없다. 포사드니크(시장관)도 필요 없다. 내가 온 나라를 지배한다."
1489년 또 한 차례의 대추방이 있은 후 노브고로트는 마침내 모스크바 러시아의 한 부분이 됐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발트 해 연안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러시아 북부의 광할한 대지를 손에 넣었다.
다음 차례는 트베리였다. 200년 동안 모스크바와 대립하며 동북러시아의 패권을 다투어온 트베리 공국도 이제 모스크바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트베리의 공 역시 변변한 저항도 못 해보고 이반 3세에게 무릎을 꿇었다(1485).
몇몇 작은 공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로써 동북러시아 통일의 위업이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킵차크 한국도 물리쳐 200여 년에 걸친 '타타르의 멍에'에서도 풀려났다. 모스크바가 명실상부한 동북러시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반 3세는 이제 키예프 러시아의 정통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서쪽과 남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있었다. 이반 3세가 동북러시아를 통일하자 모스크바와 리투아니아의 접경지대에 있던 여러 공국이 리투아니아로부터 모스크바로 충성의 방향을 돌렸다. 리투아니아가 순순히 바라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윽고 1500년에 싸움이 벌어졌고, 승리한 모스크바는 러시아 중서부의 스몰렌스크와 체르니코프의 대부분을 얻었다.
한편, 북서쪽으로는 당시 리가에 근거지를 두고 호시탐탐 러시아 진출을 엿보던 리보니아 기사단을 무찔러 그들을 제자리에 묶어놓았다. 동쪽으로는 카잔 한국과도 싸워 눈에 띄게 약화시켰다.
이렇게 다져진 모스크바 러시아는 이제 몽고 지배 이전의 키예프 러시아와 달리 분명한 민족국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단일 인종, 단일 종교, 단일 언어, 민족적 일체감 등의 요소 외에도, 모스크바 러시아는 공국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던 키예프 러시아와 달리 단 한 사람의 우두머리 밑에 강력한 끈으로 규합되어 있었다. 또한 국민 모두가 동슬라브 인 중에서도 대러시아 인이었다. 키예프의 공들은 다투어 내부분열을 일으켰으나, 모스크바는 러시아 인의 힘을 결집하여 외국 세력과 대결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러시아의 통합에 더 박차를 가했다.
1472년 그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에 함락될 때 성벽에서 싸우다 전사한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조에(소피아)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주선자는 바티칸의 교황이었다. 교황은 러시아를 자기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에 맞설 광범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교황의 기대는 빗나갔지만, 그 결혼은 모스크바의 지위를 크게 격상시켰다.
이반 3세는 결혼 후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는 자기 가문의 성 게오르기 상에다 비잔틴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를 합하여 쌍두 독수리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호칭에 '차르(로마의 황제 이름 '카이사르'가 변형된 말로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가리켰다)'와 '전제군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비잔틴 황제에게 받았다는 왕관 '모노마흐의 모자'도 쓰기 시작했다. 궁정의 의전절차도 장중하게 고쳤다.
그러나 러시아의 여러 공과 토착귀족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귀족 회의(보야레 두마)를 구성하여 대공을 견제하고 고위직책을 독점했다. 이반 3세는 법전을 새로 만들어 토착귀족들에 대한 규제책을 마련하는 한편, 하급 전사들에게 군역을 조건으로 봉토(포메스테)를 주어 군주에게 충성하는 사족(드보랴네) 층을 육성했다. 이들이 후에 궁정귀족이 되어 토착귀족들을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된다.
이반 3세의 법전 〈수데브니크(재판 법규집)〉는 러시아 농노제의 법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지주에게 점점 예속 돼가던 농민들의 이주를 제한하여 농노제의 완성에 기여한 것이다. 법전은 전국적으로 '유리의 날(11월 26일)' 전후 2주간만 농민이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게 하고, 그것도 채무를 완전히 청산한 경우로만 제한했다.
이로써 농노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제군주제의 기반이 닦였다. 이반 3세가 닦은 기반에 그를 계승한 바실리 3세와 이반 4세(뇌제)가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놓아 러시아 특유의 전제권력이 확립된다. 이반 3세는 후에 '이반 대제'로 불렸다.
그리고 그의아들
이반4세!
모스크바 대공(1533~84)이며 러시아의
차르(1547~84 재위)로 공식 선포된 최초의 인물.
그러니까 17살에 황제에오름
러시아 역사학계 자체가 이반을 성군으로 만들엇습니다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러시아어: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1530년 8월 25일 모스크바 ~ 1584년 3월 28일 모스크바)는 1533년부터 1547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으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한 첫 번째 러시아 통치자였다. 3살에 즉위하여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섭정을 하였으나, 모후가 독살된 뒤 17세부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이반 4세는 이반 그로즈니(Ива́н Гро́зный)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잔혹한 이반"(혹은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이라는 뜻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는 '그로즈니'를 '뇌제(雷帝)'로 의역해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부른다. 이반 3세의 손자이자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본래 유능한 황제였으나, 신경질이 심하고 사람을 잘 믿진 못하며 잔인한 사람이었다. 노년에는 반쯤 미쳐 며느리를 유산하게 하고 아들을 패죽이고 말았다.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영국과 통상·외교 관계를 열었다. 1588년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582년, 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에의 길을 열었다.
성 바실리 대성당(러시아어: 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ого 흐람 바실리야 블라줴나바[*])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 한국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며 봉헌한 성당이다.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 완공하였다.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위키 디피아로
(길면 안될꺼같아서)
수많은 영화나 코스튬.피큐어에도 이반4세는 폭군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B%B0%98_4%EC%84%B8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가짜 차르가 3명이 등장한 가운데,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에 자리를 계승한다.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모스크바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표트르
(표도르 아닙니다)
"이제 모스크바공국이아니라 러시아 제국이다!"
1676년 부친이 죽고 이후 1682년 이복형인 표도르가 후사 없이 죽자 이반(이복동생)과 표트르는 공동으로 제위에 오른다. 1689년 8월, 섭정을 맡았던 그의 이복 누이 소피아가 그의 친위대의 도움에 의지해 표트르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여 그는 실권을 잡게 된다.
(오스만이랑 스웨덴땅을 좀 삥뜻어볼까?) 1695년 러시아는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터키와의 전쟁에서 근대적인 해군을 선보인다. 첫 번째 아조프 포위작전은 터키의 함대 활용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표트르는 외국기술자를 초빙하여 함대를 편성하고 해군을 훈련시켜 마침내 1696년 봄에 다시 터키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고 만다. 여기서 그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해군과 함대의 건설을 살인적인 속도로 추진하여 단 1년 만에 터키에 당한 치욕을 씻고 만 것이다.
(이젠 스웨덴이다) 칼 12세. (그런일은 있을수없어!) 스스로 군인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고,
전제군주로서 스웨덴의 내정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사 시간에까지 등장하는 이야기지만, 추운 북쪽에 위치한 나라 러시아의 오랜 꿈은 부동항. 즉, 얼지 않는 항구를 얻어내는 일이야.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 편지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는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1세는 발트 해를 주목하게 됐고, 발트 해를 주목한다는 건 스웨덴과 한판 벌이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지. 표트르는 러시아 내부의 불안정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1700년 터키와 휴전협정을 맺고 오랜 숙원이던 발트해로 눈을 돌리게 된다. 강력한 스웨덴과의 전쟁준비를 하는 3년 동안 그는 국가를 정비한다. 세금의 조달과 행정기구의 개편, 산업의 발달 등이 이 때 동시에 이루어졌다. 당시 스웨덴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어깨를 같이 하는 강대국이었지만 표트르는 적을 쉽게 생각했다. 결국 스웨덴의 18살에 불과한 카알 12세에게 발트해협의 나르바 전투에서 쓴 고배를 마시게 된다. 16세기 스웨덴제국 표트르는 고뇌한다 (군사만 많다고 이기는게아닌가? 대포의숫자마저도 무용지물이라니..) 그는 (그는 줄곳 의심을 받지만 아무도 그가 황제란것은 알지못했다. 표트르의 노동자 에피소드 "안녕하세요? 저흰지금 외국인 노동자들과함께하고있습니다" "러시아에서 한분을 모셔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표트르씨?" "무슨일을 하시죠?일은 할만 한가요?" 표트르(러시아 슬라브 노동자 28세) "아 전 지금 네덜란 조선소에서 일하고있습니다. 해양국가라 그런지 항구가 얼... 아니 아름답습니다 일하는 곳도 좋구요 대포가 참 많..아니 멋집니다" 표트르는 네덜란드에서 조선술을 프랑스.프로이센에서 육군 교육을 세금을 폭탄으로 귀족에게물렸다 '수염을 잘라라'. 야심에 찬 25세의 러시아 차르(황제) 표트르 1세가 1698년 9월5일자로 귀족들에게 내린 명령이다. (세금을 내기싫으시다구요? 내가직접 수염을 잘라드리지) 귀족층은 물론 교회까지 반발하고 나서자 궁정 이발사를 동원해 반강제로 귀족들의 턱수염을 잘랐다. 수염을 자르기 싫어 관직을 내놓거나 궁정 출입을 삼가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세금'이라는 경제적 압박 수단을 꺼냈다. 스웨덴이 폴란드와 접전을 벌이게 되어 표트르는 새로운 군사훈련과 대포로 다시 전열을 정비한다. 또한 귀족의 복무기간을 일생으로 변경시키고 농민 출신의 군사력을 끊임없이 충당했다.
한 티비 프로그램을 참고하기로한다 서유럽으로가는대 시민으로변장하여 유학을가게된다
차르는 왜 오래된 풍습이며 러시아 정교회가 중하게 여기는 수염을 깎으라고 다그쳤을까. 서구화 정책 때문이다. 낙후된 러시아를 유럽 강대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18개월 동안 각국의 선진문물을 흡수하고 돌아온 표트르 1세는 '유럽 강대국 어디에서도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지 않는다'며 '후진의 상징인 수염부터 자르라'고 닦달했다.
폴란드와의 분규로 정신없는 스웨덴을 상대로 표트르는 변화된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결국 네바강 하구를 획득하게 된다(1702년) 1703년 바로 이곳에 러시아의 새 수도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표트르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라고 명명했다. 이 지역은 좋지 않은 입지조건을 지녔지만 표트르는 새로운 세계로의 전진을 위한 수도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곳에 수도건설을 위해 전제군주로서의 독재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3만명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결국 도시를 완성시키고 귀족들을 이주시킨다. 결국 가혹한 세금징수와 무자비한 징병제도로 국민들의 반란이 일어나지만 1708년 표트르는 부하 장군들의 덕분으로 진압한다. 한편 스웨덴과의 결전은 1709년 7월 키예프 남동쪽에 있는 폴타바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 전투는 세계 역사상 매우 중요한 20개의 전투 중에 하나로 평가되며 이때 스웨덴 군은 거의 괴멸하고 스웨덴 국왕은 터키로 도망간다. 이 전투의 승리로 러시아의 군사적 팽창은 표트르 대제의 과감성에 힘입어 날로 강력해진다. 이를 두려워한 주변 국가들은 상황이 다급해짐을 알고 연합전선을 펼쳐 러시아를 견제한다. 1711년 프랑스의 선동으로 터키는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고 프루드 강변에서 치욕의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아조프와 흑해함대를 터키에 넘겨준다. 이 때 터키에 망명 중인 카알 12세도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대북방전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스웨덴과 러시아간의 전쟁은 총 21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로운 해군으로 1714년 한고해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고, 1721년 니슈타트 조약을 맺고 러시아는 승리한다. 러시아가 명실상부한 발트해 연안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나라와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 또한 러시아는 이 때 모스크바 공국에서 제국으로 선포된다. 러시아 원로원이 표트르의 공로를 인정하여 ‘황제(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내린다. 이것은 러시아가 군사적으로나마 유럽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마침내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러시아를 제외한 어떤 동맹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트르..그는 귀족에겐 악했지만 백성과 나라를 생각했던 절대군주
나라를위해 남의나라 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했다.
마지막에는 물에빠진뱃사공을 구해주기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던지 독감과 고열에걸려 사망한다
그는 강력해진 제국을 자손들에게 물려줄수있었고
더러운 슬라브.하등 노예나라 약한 러시아
라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절대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예카틀나의 제국주의
나폴레옹도 물리치는 패기를 보여주는 나라가된다.
나라가된다
단점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유럽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하였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일명 '대문호')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 제국(러시아어: 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은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도중 러시아 혁명(1917년 3월)에 의해서 타도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歷史의 모순-러시아(3)제국주의시대
프로이센을 살려준 표트르3세
7년 전쟁 때의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선전포고를 했겠지만,
이 전쟁 중에 프리드리히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나폴레옹전쟁
섹스와 정복의 여제
예카테리나2세
농노제 폐지와 크림전쟁
니콜라이2세는 (4)화 에서 다룹니다
歷史의 모순-러시아(4)혁명!그리고전쟁 [7/5]
歷史의 모순-러시아(5)냉전의 그늘아래서[7/6]
歷史의 모순-러시아(6)공산권붕괴와 푸틴의 경제회복[7/7]
첫댓글 으음.. 예카트리나가 아니라 예카테리나가 옳습니다. Ekaterina(예까쪠리나)
수정 감사합니다^^
3화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청야작전에 대해 그리고 프로이센과의관계 폴란드 분할에 대해 다룰예정입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여담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표트르 대제~니콜라이 2세까지의 기간, 즉 러시아 제국 시절의 기간이 마음에 안 들더군요 ㄲㄲ
뭔가 동슬라브적인 매력(독자적인 러시아만의 매력)은 줄어들고 최대한 서유럽 테크를 밟으려고 하는 게...
네르친스크조약도 다루고 코사크도다룰예정입니다 첝 독자님의 만족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오오 까자끼! (코사크는 영어식 표현이므로 카자크, 코자크라 하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 제가 러시아사에서 제일 좋아하는 놈들이죠! 그 간지란.. ㄷㄷㄷ
칼 12세는 분명 뛰어난 인물인데 시대를 잘못 태어났음... 심지어 최후까지 처참함
오스만제국에 망명을...근데 망명이라 할수가 없엉 ㅠㅠ
역시 골든 호구는 호구였습니다....
카이저(독일) 차르(러시아) 원형에 예 (임페라토르(총사령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황제)카이사르면(황태자) 프림켑스(제1시민)마지막 옥타비안 풀네임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옥타아니누스 길다.. 초대 로마 황제 풀네임 이지만 앞에 4개는 훗날 칭호로 변함.(참고로 앞에 세개는 뭐 다 아시겠져;;;)
표트르는 왜 농노제 폐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독감과 고열 ==> 폐결핵으로 알고있습니다. 러시아가 제국을 선포했는데, 유럽국가에게 있어서 제국은 곧 로마 아니였나요? 유럽국가들의 분노나 반발은 없었는지 궁금하네요. 스스로 왕국을 자처하다 왕따당한 춘추시대의 초나라가 생각나네요.
아 초반에는 교황이나 다른 카톨릭 국가들이 싫어했죠 하지만 오스만개박살내고 나폴레옹전쟁때 나폴레옹 관광보낸거 생각해서 열강에 끼우고 같이놀게되죠
더러운 표트르3세 너...너때매 오구리가..!
사실 농노제가 러시아가 크게 확장하기에 좋은 시스템입니다. 세금도 막 내고, 부역도 하고, 노예처럼 시키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기술개혁만 봤지 정치개혁은 보지 못했습니다. 서양 기술을 채특하면, 서양 시스템, 지식, 문화 심지어 철학까지 들어옵니다. 예카테리나도 사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인지하고 농노제 더 강화한 겁니다. 일시적으로는, 지도자가 좋으면 그 엑스칼리버를 쓸 수 잇지만, 그 후에는 그닥 유능한 지도자도 안 나왔고, 국민들 반감도 거세지고, 결국은 제1차세계대전에 의해 박살나버린 겁니다.
물론 제1차세계대전 안일어낫으면 지금까지 황실이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
1차대전 안 일어났으면?은 러빠들의 좋은 떡밥 중 하나지요.
당시 러시아 성장률이 ㅎㄷㄷ했는데, 1차대전과 적백내전으로 똥망 크리 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