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려장 선물
고재흠
나무도 아닌 것이 나무 노릇을 톡톡히 하며 노인과 동반하는 것이 청려장이다.
명아주는 풀도 나무도 아닌 특이한 중성 식물이라 할 수 있다. 봄에는 잎을 뜯어서 나물 요리로, 가을에는 줄기를 채취하여 지팡이로 만들면 그게 바로 청려장이다.
모든 사람은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강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므로 성장과 성숙, 노화의 단계를 반드시 거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노인은 65세 이상인 사람을 말하지만 생리적, 신체적 기능의 퇴화로 자기 유지 기능과 사회적 역할 기능이 약화되고 있는 사람을 노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로 볼 때 나 또한 노인임에 틀림없다.
지팡이는 원래 허리가 구부러지고 다리에 힘이 없을 때 하나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점잖은 어른이 짚으면 권위와 존경의 상징이요 도사가 짚으면 어떤 신통력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지팡이는 옛날에 60세가 되면 마을에서 만들어 주는 향장(鄕杖), 70세에 나라에서 만들어 주는 국장(國杖), 80세가 되면 임금이 만들어 주는 조장(朝杖)이 있었다. 요즘에도 100세된 노인에게 대통령이 증정하는 사례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지난해에는 장수 노인에게 천오백개의 지팡이를 증정하기도 했다.
청려장은 명아주를 서리가 내리기 전에 베거나 뿌리째 캐서 그늘진 곳에서 말려야만 푸른색을 띠는 본연의 청려장(靑藜杖)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모양을 낸다고 붉은 색을 칠하면 홍려장, 검은 칠을 하면 흑려장이 된다.
지팡이의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색과 모양에 따라 이름 하기도 하고 재료에 따라 나누기도 하여 대나무로 만든 죽장(竹杖), 죄인을 다스리는 곤장, 도둑이 오히려 큰 소리 치는 적반하장, 개화기에 유행한 개화장과 단장, 하장은 시대정신과 사상이 반영된 이름 인 듯하다.
요즘은 의약의 발달로 백세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도 늙으면 대부분 허리가 구부러지기 마련이다. 길을 걷다보면 지팡이에 의지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농촌에 허리굽은 사람이 많은 것은 아마도 농사일의 특성상 그런 것 같다. 어떻든 허리가 아프면 제일 먼저 지팡이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지팡이 보다 천 배 만 배 의지력을 주는 것은 자식들이다. 나는 슬하에 4남 1녀와 손자손녀 10명을 두었으니 슬하에 22명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장남 효석과 며느리 김현영은 부부 은행원 이었다. 함께 퇴직한 뒤 자영업을 시작하여 성실함을 바탕으로 지금은 아주 크게 성업이 되어 생활 기반을 튼실하게 이루었다. 집안 대소사에 역시 장남의 경제력이 발휘되고 있다. 차남 충석은 명문 N고 교사를 거쳐 지금은 교감이며 며느리 최현실은 중견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부모님 허리 예방 차원에서 서양식 고급 지팡이를 선물해 주었으며, 수시로 문안하여 우리 내외를 위로 한다. 셋째 고명딸 윤숙은 공인중개사로 서울에서 공인중개업으로 성업 중이다. 사위 최규술은 I그룹에서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사장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경북 예천의 특산품 청려장을 선물 했다. 그 귀한 동양식 지팡이는 나의 이미지와 닮은 듯 하다. 넷째 인석은 중견 Y기업 부장, 며느리 신현주는 I기업 부장으로 인테리어 전문가이다. 부부 모두 부장급으로 안정된 직장인이다. 앞으로 승진 등 장래가 유망하다. 다섯째 경준은 J제약회사 과장, 며느리 서주희는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 수시로 문안하고 늙은 우리를 돌보고 있다.
손에 든 지팡이와 자식 모두 내가 의지하는 지팡이지만 굳이 비교하면 지팡이는 신체만을 의지하는 ‘작은 지팡이’요 자식은 신체와 마음까지 의지하는 ‘큰 지팡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화되어 은연중 큰 지팡이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나는 직장일로 바빴고, 퇴직 후에는 글쓰기와 칼럼기고, 주례 서기와 오가피 농장일로 바쁘게만 살다보니 가정의 일은 거의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몇 년 전 서울대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은 완치 되었다. 요즘은 어깨가 아파 정형외과 치료를 받고, 한 달 만에 퇴원하여 매일 매일 통원 치료중이다. 내가 이제부터라도 아내의 지팡이가 되어 주어야겠다. 아내의 여생에 보은(報恩)하는 튼튼한 지팡이가 되고 싶다.
아파트 현관에 동양식 • 서양식 지팡이 한 쌍이 단정히 서서, 우리 부부의 동반 외출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눈을 맞추니 지팡이와 정이 들어 애장품으로 관리하고 있다. 멋쟁이 지팡이가 새삼스레 미덥고 고맙다. 우리 부부도 서로에게 지팡이 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