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 무렵 어떤 처녀를 만났다. 그녀의 몸짓은 무언가 요구하는 것 같다. 사랑을 갈구하던 나는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보낼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오는 은밀한 힘에 이끌리어 걸음을 재촉했다.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갈림길까지는 갈 거라고 마음 먹었다. 갈림길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사랑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의 집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장난기가 약간 있는 그와 심심찮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꽤 흘렀다.
예전에 볼 적에는 연애 상대자로 적합하고 가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꼈다. 지금 나의 눈이 조금 이상하게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못 가게끔 한다. 그녀는 나를 본 순간 태양처럼 연상되더라고 말했다. 그녀의 대수롭지 않은 표현에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여자를 다룰 때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조심을 하면서 그녀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그녀는 나보고 말을 놓고 지내자고 했다. 나는 단호히 거절을 했다. 그녀의 얄팍한 행동에 말려들어 간것인 줄 모르겠다.
등 너머 자기 집으로 갈 때에는 해가 지고 땅거미가 주위를 감쌌다. 우리들은 주위 온실에 들어가서 몇 분 동안 연인이 되었다. 난 그녀를 업어주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였다. 또 그녀의 눈빛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몸에서 사랑의 전율이 있는 것을 느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추웠다. 저녁 식사도 하지 않았다. 난 그녀를 보내줄 의무가 있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연상하면서 그녀를 업고 논둑을 걸었다. 내려놓고 같이 걷고 큰 길이 나오고부터는 밀착된 상태로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피로함이 온 몸을 엄습해 왔다. 우리는 비탈진 언덕에 앉았다. 그녀의 눈빛은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한 폭의 그림인 양 마주 앉은 우리들! 우리만의 시간!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해서는 안 될 시간이었다.
아릿다운 그 모습에 나의 손길이 어둠이 대지를 감싸주듯 그녀를 살며시 덮었다. 마음을 교환하는 키스! 그것은 나를 매혹의 도가니로 끌여 들였다. 그녀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아찔한 느낌!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래서는 안 되지, 행동을 정지하고 바로 앉았다. 혹시 요염하게 생긴 모습이 나를 당황하게 했는지 모른다. 한참 앉았다가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집에 가기 싫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그의 집에 들어가게 했다.
나는 하나의 억압된 굴레에서 벗어난 듯 했다. 그녀의 집에서 우리집까지 도망치듯 뛰어왔다. 그 순간 그녀는 나의 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성적 욕구를 채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고통과 번민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파고든다. 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여야 했는지? 새로운 이상향을 찾으면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만큼 성장한 마당에서 사랑은 믿음이 동반되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주지 않으며,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또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이며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리워해야 되는지?
만약 그녀가 나와 결혼한다면 내 마음에 아쉬움이 많았을 것이다. 인물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학벌이 나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리고 성격이 안정감을 주지 않고 개척 정신도 결여되어 있었다. 내가 삼천포 여인(강00)을 구애한 것은 강한 생활력과 개성 있는 성격 때문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미래지향적이면서 햄리트처럼 망설이면서 만족감을 덜 느낀다.
어떤 이는 결혼 상대자와 8년간 사귀었다고 한다. 그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과연 현실과 이상이 쉽게 맞을까? 아름다운 장미꽃에도 가시가 있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의 거만한 태도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나의 능력이 그녀를 지배한다는 것은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연애와 결혼은 염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애시절에 외모만 보고 결혼하면 회의가 많이 온다고 한다. 거기에는 많은 인내와 극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판이하게 변하는 성격! 이것을 잘 극복하는 길은 인내뿐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지나간 쓸데없는 군더더기다. 지금 나의 가슴에는 필요없는 연정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고통과 허전함이 있다.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 봐도 시간의 낭비다.
1977. 01. 21. 사브리나(손명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