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있었던 일
서 천 이 해 범.
16.고아원
누비치마 같이 생긴 두렁이만 입고 아무나 지나가는 남자 어른만 보면 아버지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바람에 어머니를 민망함으로 어쩔 줄 모르게 하는 돌 지난 넷째 동생과 두 여동생을 셋째 할머니 댁에 맡기고, 나와 내 밑의 아우는 읍내에 있는 친척 할머니 댁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그것은 다 키워놓은 자식 둘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그리고 처절한 결단이었다는 것을 철없는 아이들인 우리들이 어찌 알았으리. 우리 형제는 어머니와 잠시 동안이라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슬퍼하였지만, 다만 며칠 밤만 지내면 만나게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달램에 겨우 진정되어, 새로 겪어야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을 갖고 읍내에 볼일 보려 간다는 이웃 아저씨를 따라, 타박타박 이 십리 길을 걸어서 친척 할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고아원으로 갔다.
그러나 고아원 생활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살아온 우리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꽉 짜여 진 틀 속에 묶어있었다. 그 고아원의 아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이불개고, 청소하고, 채소밭에 나가 똥거름 주고, 뽑아온 열무를 다듬고, 왕자인체 거드름 피우는 원장 집 자식들의 얄궂은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애매한 매를 일상처럼 얻어맞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과 그 가족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모든 고아들을 불러 세우고 새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새 옷이 그렇게 많은지 동네 아이들까지 불러서 입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새 옷을 갈아입고 기뻐해야 할 아이들이 별 표정 없이 덤덤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이 흘렀을까? 서쪽 언덕길로부터 쓰리쿼터 한대가 붕붕거리며 이 고아원으로 들어섰고, 차에서 키가 까마득히 크고 새까만 흑인 아저씨가 성큼 내려섰는데 그의 손에는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원장은 그 미군과 아무런 주저 없이 한국말로 떠들었고, 미군은 쏼라 쏼라 영어로 알아듣는 것처럼 대꾸하면서 열심히 손짓하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고아들이 고아원을 배경으로 쭉 늘어서자 미군은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자동차에서 몇 덩이의 박스를 내려놓고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띤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
미군이 돌아가자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누가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고아들은 이제껏 제가 입고 있던 새 옷을 너도 나도 벗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는 까닭을 알 수 없어 멍하고 있었다. 그때 원장 할아버지의 눈에 흰자가 번뜩이자, 친척할머니가 눈짓으로 말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원장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이 옷을 벗으면, 큰 아들에게 추잉 껌을 하나씩 나누어 주라고 말 하였다. 물론 고아들에게는 그런 국물도 없었다.
10시가 넘으면 무조건 불을 꺼야 하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지만, 자는 척 잠을 청하고 있을 때, 원장과 할머니가 다투는 소리가 구제품 창고로 쓰고 있는 옆방에서 들려왔다.
“임자는 내 규칙을 몰라서 그러 남.”
“왜 모른대 유 그것들 불쌍한 게 그러치 유.”
“불쌍 불상은 절마다 있는 디. 버릇된 단 말 여...나미 눈도 있는 디...”
“됬 슈 알었 슈.. 내일 벗길 테 유...”
다음날 우리는 입었던 옷을 도로 벗었다. 그리고 그 한 달 뒤, 정말 기적처럼 병이 나은 어머니가 우리를 고아원에서 이끌어 내시고, 모처럼 장에서 사서 입힌 구제품이 바로 내가 잠시 사진 찍히기 위해서 입었었던 그 옷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옷의 주인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당치않은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누워서 침 뱉는다는 말’이 있고, ‘내밥먹은 개가 뒤축을 문다는 말’도 있지만, 이 일을 겪은 뒤, 나는 친척 할아버지에 대해 은혜는커녕 미움의 감정을 품게 되었고, 모든 고아원이 못쓸 짓을 하는 데라고 싸잡아 욕하게 되었다. - 계 속 -
첫댓글 시대의 아픔속에 개인의 고난까지~ 마음이 져며 오네요.
영혜씨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