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종택 배치도
수암종택 전경
수암종택修巖宗宅
(시도민속자료 제70호 경북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
수암은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류진柳袗의 호이다. 수암은 37세가 되던 1617년에 화회를 떠나 이곳 상주에 정착했다. 처음 정착한 곳은 현 위치가 아닌 가사리佳士里였고, 수암의 고손자인 류성노柳聖魯 때 현 위치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아직 현재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그런 수암종택이 현재 모습을 갖춘 것은 수암의 7대 손인 류후조柳厚祚에 의해서라고 한다.
류후조(1798-1875)는 호가 낙파洛波로서 고종때 벼슬이 좌의정까지 오른 사람이다. 류씨 집안은 남인에 속하였다. 당시 서인에게 밀린 남인은 18세기 이후로는 재상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 남인에서 좌의정이 나왔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런 배경으로 현재의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집은 19세기 중반 경에 지어진 집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채전경
안채대청
수암종택 터를 잡을 때 풍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듯하다. 수암종택의 터는 三山二水가 만나는 매화락지梅花落地의 명당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산은 태백산, 속리산, 팔공산으로서 이곳은 세 산의 끝자락과 낙동강과 위수가 만나는 지점이라 한다. 그런 집터에 지기가 솟아 나온 곳(안채 뒤쪽에 있는 바위)를 택해 자리를 잡았다. 바위 형상이 거북을 연상시키고 있어 이런 점들을 풍수적으로 고려하여 집터로 잡을 것이 아닌가 한다.
종택은 언덕에서 만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언덕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안정된 집터로 보였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고택 아래로 강까지 훤하게 뚫려있다는 점이다. 이런 모습은 지기가 그대로 흘러나갈 수 있는 풍수상 허점이다. 종손의 말씀으로는 예전에는 아래쪽에 나무를 심어 허한 부분을 보충하였는데 지금은 그 나무들이 없어져 허전해 보인다고 하였다.
대청 뒤쪽 바위
수암종택은 서남향하여 정침正寢과 사당 그리고 녹사청錄事廳으로 이루어져있다. 정침은 경상도 집의 전형인 ㅁ자 형태의 집이다. 원래 이 집에는 외부에 담과 솟을대문이 없었다고 한다. 대문과 담을 쌓으면 지기에 손상을 주어 불길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풍수적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대문과 담은 1996년 개보수를 하면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완벽한 ㅁ자 집이다. 몸채 전면에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는 홑집이고 후면 안방과 대청은 겹집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맨 왼쪽 2칸으로 꾸몄다. 이런 형식은 일반 사가에서 일반적으로 꾸미는 중문형식이다. 중문 옆에는 한 칸을 부엌으로 꾸며 사랑채를 위한 아궁이를 들였다.
안채는 여러 면에서 기능을 살펴 계획된 건물이다. 안채 칸의 폭을 살펴보면 측면 6칸은 폭이 일정하게 되어 있는데 정면 6칸은 중앙 4칸과 양 측면 2칸 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칸 폭을 달리한 것은 날개채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대개 날개 부분은 몸통 칸과 같은 폭으로 한다.
이럴 경우 날개채 방 크기가 작아져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게 된다. 이런 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날개채가 위치한 양 측면 칸의 크기를 중앙칸 보다 넓게 조절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건넌방도 넓게 되었고 사랑채 윗방도 넓어 마치 안방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마찬가지로 부엌도 넓어져 시원하게 되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날개채(단차이가 있음)
안방을 보면 안방크기와 안방 앞에 있는 툇마루 크기를 적절히 배분하려한 노력을 느낄 수 있다. 안방을 보면 안방을 키우기 위해 가운데 기둥보다 반의 반칸 정도 앞으로 내밀었다. 보통의 경우 사이 기둥을 중도리 위치에 맞추기 위해 반 칸 정도 앞으로 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럴 경우 퇴칸이 반 칸 규모로 작아진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구성을 하지 않고 반의 반칸 만 내밀은 것은 퇴칸을 넓게 확보해서 살림을 위한 작업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안방을 구성하고 보니 기둥 위치와 대들보 관계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오량집에서는 퇴칸를 반 칸 정도로 만들어서 1고주 5량집으로 한다. 그러나 반의 반 칸만 내놓고 보니 고주를 세울 수 없게 되어 평주를 세우고 보를 평주 사이에 맞보로 걸고 보위에 다시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세웠다.
안채의 또 다른 특징은 안채가 대지 경사에 따라 방바닥의 높이를 달리했다는 것이다. 건넌방 쪽은 고방, 건넌방 및 마루, 아랫방 순서로 방바닥 높이를 달리했는데 이것은 사랑채 마루와 연결된 방을 작은 사랑채로 계획하면서도 안채와의 연결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랑방으로 쓰이는 방들과 안채를 툇마루로 연결해 놓아 다른 집들과는 달리 내외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고 안채에서 사랑채로 편하게 드나들도록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 맨 왼쪽 끝이 중문임
사랑채는 전면 우측에 3칸, 날개채 쪽에 2칸을 포함하여 모두 5칸 규모이다. 전면은 2칸이 온돌이고 우측 모퉁이 한 칸이 마루로 구성되었다. 사랑마루도 규모가 한 칸으로 작고 전면에서 보는 규모도 작아 전체적으로 안채에 비해 사랑채의 구성은 매우 단출한 모습을 보인다. 좌의정까지 지낸 집안의 사랑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사랑채를 통해 이 집을 지은 낙파 선생의 인품을 읽혀지는 것 같다.
이 건물 재미있는 부분은 앞에서 보이는 지붕모양이다. ㅁ자 집이라 해도 앞에 보이는 지붕을 대부분 맞배지붕 또는 팔작지붕형태로 만들어 완성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 곳의 지붕은 전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처럼 보이지만 전면 지붕은 거적지붕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모서리 부분 처리가 쉽지 않아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어쨌든 정면에 이런 지붕을 설치한 예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녹사청 전경
사랑채 앞에는 ㄴ자 모양의 7칸 건물인 녹사청이 배치되어 있다. 뒤쪽 중간에 마루방 한 칸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방으로 구성된 건물로서 이 건물을 지은 류후조가 봉조하(종 2품 이상 전직 고위관리에게 품계에 따라 녹봉祿俸을 주도록 만든 명예직 벼슬)가 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녹사가 머물면서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녹봉을 받아들이고 운반해온 사람들이 쉬어가게 만든 건물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목적으로 지은 집을 본 적이 없어 이런 목적의 건물은 이곳에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녹사청은 배치상 현재 집과 조금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어 아마도 류후조가 낙향한 후 봉조하를 제수 받으며 지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 당
안채 동쪽 언덕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에 퇴칸을 둔 한칸 반으로 구성된 집으로 직절익공집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사당에는 현재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수암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 집을 돌아보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솟을대문이다.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주 수려했다. 솟을대문이 원래대로 없었더라면 시원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로 솟을대문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맥을 놓친 것은 아닌가 한다.
현재 이 집은 그런 대로 잘 관리되고 있는 편이다. 종손께서 주말마다 내려와 지내시면서 여기 저기 손을 보고 있기 때문에 집이 아직은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이 집도 종손이 관리할 수 없게 되면 곧 쇠락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문화재 관리를 개인에게 부담지울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앞으로 하루빨리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문화재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중문칸 내부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