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 1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주지적, 허무적, 초월적
◆ 표현
*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 손목에 달아 놓고 → 죽은 모습 그대로,
아무런 꾸밈 없이
* 가죽 가방에 ∼ 통통배에 실어 다오 → 죽어서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구속에 대한 풍자와 비판
* 검색 → 군사독재로 지칭되는 시대상황 상징
* 곰소 → 시대상황의 힘이 미치지 않는, 인간의 자취가 드문 지명
* 무인도 → 화자가 육신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지향점
* 벗기우고 → 주체 : 비바람, 햇빛
* 남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 시간과의 단절, 세상과의 이별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간의 경과를 암시함.
* 살을 말리게 해다오 →육신의 모든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화자의 소망
* 화장도 해탈도 없이
→ 서정적 자아는 자신의 죽음이 세속적인 가식으로도, 신성한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함.
*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 자신의 존재가 비바람 속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 주제 : 자유에로의 귀환 의지
존재의 소멸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
◆ 풍장 → 시체를 한데에 내 버려두어 비바람에 없어지게 하는 장례 풍속의 한 가지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풍장의 준비
◆ 2연 : 풍장의 과정
◆ 3연 : 풍장의 의미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황동규의 1980년대 시세계를 대표하는 연작시 <풍장>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완벽한 자유에로의 귀환의지와 투신에의 갈망이 상징적인 표현 가운데 선명하게 요약되어 있어 주목을 환기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담담함이다. 죽음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바람'과 '죽음'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일상의 고달픔과 질곡을 벗어나 정신의 가벼움과 투명함을 성취하는 동시에 영원한 이상 세계인 '무인도'에 도달하여 무한한 자연에로 귀환하려는 의지가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풍장을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여 자신이 죽을 경우 풍장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시간의 경과에 따른 풍장의 과정을 담담하고 비장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시적 자아가 이러한 풍장을 염원하는 것에서 현실에 대한 시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바람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서 제시된다. 여기에서 바람은 살과 피를 말리우듯 일체의 사물을 소멸시켜 자연의 일부로 되돌리는 생명 순환의 원리를 상징한다. 결국, 이러한 죽음마저 그 어떤 세속적 가식이나 신성한 의미도 거부한 채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함께 논다는 것에서 허무에 바탕을 둔 시인의 현실 인식과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죽음은 단지 자연과 우주의 무한한 순환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슬퍼할 것도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거기에다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신비화하거나 신성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상식을 뛰어 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죽음관과 죽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와 어조는 우리 시의 전통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삶에 대한 세속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삶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소개]
황동규 : 시인, 명예교수
출생 : 1938. 평안남도 숙천
소속 : 서울대학교(명예교수)
가족 : 딸 황시내, 아버지 황순원
학력 : 에든버러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
데뷔 : 1958년 현대문학 '시월' 등단
수상 : 2016년 제26회 호암상 예술상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
작품 : 도서 54건
1938년 4월 9일 평안남도 숙천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동규 [黃東奎]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첫댓글 바람과 놀게 하여 다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은 가을비가 조금 내린다고
합니다. 가을비에 대한 소재로
좋을 글 만드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