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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중종 25)∼1559(명종 14) 이초(李岹)]은 중종대왕의 7남으로 경인(庚寅) 1530년(중종 25) 음력 3월 5일 창빈안씨(昌嬪安氏)에게서 탄생, 휘는 초(岹)요 자는 경앙(景仰)이다.
덕흥대원군은 3남 2녀을 두었으니 장남은 하원군(河原君) 정(鋥)이고 차남은 하릉군(河陵君) 인(鏻)이다. 하릉군은 숙부 금원군(錦原君)에 출계하였고, 3남은 하성군(河城君) 균(鈞)으로 명종대왕에 이어 입승대통(入承大統)하니 곧 14대왕 선조대왕이시다. 1女 男便 안황(安滉), 2女 男便 남충원(南忠元)이시다.
일찍이 9세에 덕흥군(德興君)으로 책봉되고 1570년(선조 3)에 덕흥대원군으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영명다재하여 학문과 덕을 쌓아 남다른 예지와 경륜을 펼쳐 명종 때에 이룩한 공이 컸으며 세째 아들인 선조대왕이 명종대왕의 대를 이어 왕통을 계승한 사실(史實)로 미루어 보더라도 덕행과 기지가 뛰어났음이 가히 짐작이 된다.
대원군의 배위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는 1522년(중종 17) 음력 9월 4일 태어났으며, 영의정 문성부원군(文成府院君) 정인지(鄭麟趾)의 증손녀이며 영의정 효간공(孝簡公) 정세호(鄭世虎)의 딸로 기품이 고고영명하고 현모양처로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다. 하성군을 선조대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도 모친의 역량이 컸다.
대원군은 기미(己未) 1559년(명종 14) 음력 5월 9일 향년 30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예장하였다. 그로부터 별칭 덕릉(德陵)이라 일컬어 왔으며 경기도 지방문화재 55호(1980.6.3)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묘의 수호를 위하여 묘막이 형성되고 지금도 묘하(墓下)의 촌락은 그대로 남아 있고 서울특별시 상계동으로부터 대원군묘로 진입하는 수락산령은 덕릉고개라 불리고 있다.
대원군의 배위 하동부대부인 정씨는 1567년(명종 22) 음력 5월 18일 46세로 별세하니 그 해 음력 8월 9일 대원군 곁 이실(異室)에 예장하였다.
후일 선조대왕의 특명으로 한성(漢城)에 도정궁(都正宮 :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을 세워 생친(生親) 대원군 양위와 조모 창빈안씨(中宗嬪), 백형 하원군(顯祿大夫)과 배위를 모시게 하여 각각 기신일(忌辰日)에 제향을 받들어 오던중 대원군 종손의 형편의 변동에 따라 1950년 불천지위(不遷之位) 6위를 지금의 덕릉재실(德陵齋室)로 이전, 영년봉묘(永年奉廟)케 하니, 매년 기신일이면 후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대원군의 묘역 하단에 계장으로 위치한 쌍분묘는 장남 하원군 양위분의 묘이며, 이 부락에 있는 덕흥사(德興祠)는 대원군 양위분과 어머니 창빈안씨 그리고 장남 하원군(宣祖朝의 扈從功臣) 내외분의 위패를 모신 묘각(廟閣)이며 국내(局內) 흥국사(興國寺)는 이분들의 명복을 빌던 사찰이다.
창빈안씨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내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지방문화재 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 국립묘지는 창반안씨 묘역이었는 바 국가에서 국립묘지로 지정,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묘(墓)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묘(일명 덕릉(德陵)>
덕흥대원군 묘소는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시도기념물 55호)
묘역은 별내면 덕송리 산5번지에 하동부대부인 정씨와 쌍봉으로 동남향하고 있다. 사성(莎城)으로 둘러져 있는 봉분은 높이 190㎝, 둘레 157㎝로서 팔각형의 호석(37)을 둘렀다. 봉분의 앞에는 묘표가 있는데, 구름무늬와 복련을 조각한 대석(93×58×29), 월두형의 비신(54×17.5×140)으로 되어 있다. 묘표의 전면에는 ?德興大院君墓河東府大夫人鄭氏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묘표 앞에는 혼유석(92×57), 상석(171×100×26), 장대석, 정사각 향로석(31×41)이 있다. 향로석 좌우에는 팔각형의 받침대에 육각형의 석주형 망주석(189)이 있으나, 좌측의 다람쥐 조각은 파손되었다. 그 앞 좌우에 있는 무인석(212)은 전체적으로 통통한 형상으로 크기가 장대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며 머리에 투구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형상으로 그 모양이 특이하다. 무인석 중간에 서 있는 팔각형의 장명등(224)은 하대석에 팔각형의 각 면마다 안상문과 방광, 복련을 조각하고, 중대석에도 안상문을 상대석에는 안상문과 앙화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4각의 화창이 있다.
◎ 덕흥대원군리초신도비(德興大院君李岹神道碑)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묘소 전방 약 20m 지점에 북향하고 있다. 규모는 귀부(254×180),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79×28×196),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142×83×70)으로 되어 있다. 비문(碑文)은 전면에만 있다. 상단에 전서로 ?大院君之碑?라 새겨져 있고, 비제는 ?有明朝鮮國德興大院君神道碑幷銘?이다. 비는 1573년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홍섬(洪暹)이 찬하였으며, 송인(宋寅)이 썼다. 덕흥대원군의 묘는 1980년 6월 2일 경기도(京畿道)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碑文
大院君之碑
有明朝鮮國德興大院君神道碑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監春秋館事江寧君 洪暹 撰
奉憲大夫礪城君 宋寅 書
公諱 字景仰中宗恭僖大王之庶子母安氏在後宮中最被寵眷貴至淑容以嘉靖庚寅三月初五日生公公生九歲封德興君壬寅娶河東府院君鄭麟趾之孫判中樞府事世虎之女誕三男一女長曰 次曰 次則今上殿下公於己未五月初九日病卒壽僅三十是年九月十七日葬于楊州南面水落山戌坐辰向之原夫人端莊靜順治家謹肅三子一女敎以義方 封河原君娶左議政洪暹之女生三男一女男曰引齡享齡錫齡皆幼洪氏早沒後娶忠義衛李義老之女 爲叔父錦原君 之後封河陵君娶同知中樞府事申汝悰女生一女幼女適儒士安滉生一男二女男曰應元夫人旣寡常恨未亡憂煎成疾丁卯五月十八日病至不救痛哉夫人在殯 明廟賓天今 上入承大統天道倚伏未易量也靈柩將引遣承旨及內侍護其喪又令各司一員送至郊外卜得是年八月初九日 于德興之兆次同塋異室葬用王妃父母之例喪期將終命攸司就本第營立家廟庚午春大臣啓請依宋英宗尊 王故事追崇德興君爲德興大院君夫人稱府大夫人國有祭告稱皇伯父母遣官告廟又用大君例陞奉祀子爵從一品錫以土田臧獲以優祀祭之具喪旣畢河原索神道銘于暹曰否則無以詔後世銘曰父我靖陵娶彼德門德門惟何生此碩媛兩美作配天不與年禍爲福倚龍躍于淵迎于代邸大統靈承載崇位號無競殊稱有蘆之原淑氣攸鍾山擁水護若堂有封
萬曆元年癸酉八月 日
譯文
대원군의 비(大院君之碑)유명조선국 덕흥대원군 신도비명(有明朝鮮國德興大院君神道碑銘)과 서(序)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이 찬술하고, 봉헌대부(奉憲大夫)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다.
공의 휘는 초(岹)요, 자는 경앙(景仰)이니 중종공희대왕(中宗恭僖大王)의 서자이다. 어머니 안씨께서 후궁에 계실 때에 가장 총애를 입어 소중하게 여김이 지극히 맑고 존귀하였다. 이에 가정(嘉靖) 경인(庚寅) 3월 초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9살이 되자 덕흥군(德興君)에 봉임받았고, 임인년(壬寅年)에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의 손자 판중추부사 세호(世虎)의 딸을 맞이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니, 첫째아들은 정( )이며, 다음은 인( )이며, 다음이 곧 지금의 임금이신 전하이시다. 공은 기미년(己未年) 5월 초9일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나이 겨우 30세이셨다. 이 해 9월 17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동남향(戌坐辰向)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부인께서는 바르고 가지런하시며 고요하고 순하시면서도 집안을 다스림에 삼가고 엄숙하시어, 세 아들과 딸을 의로써 가르치셨다. 바야흐로 정은 하원군(河原君)에 책봉되고 좌의정 홍섬의 딸을 맞이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령(引齡)ㆍ향령(享齡)ㆍ석령(錫齡)인데 모두 어렸고 홍씨도 일찍이 돌아갔으므로 충의위(忠義衛) 이의로(李義老)의 딸을 다시 맞이하였다. 인은 숙부인 금원군(錦原君) 영( )의 양자가 되어 하릉군(河陵君)에 봉해졌는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신여종(申汝悰)의 딸을 맞이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리다. 딸은 유학의 선비 안황(安滉)에게 시집가서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응원(應元)이다. 부인이 일찍이 홀로 되시어 항상 부군을 따라 죽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다가 근심이 쌓여 병이 되어 정묘년(丁卯年) 5월 18일에 병을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 슬프도다. 부인께서 빈소에 있을 때에 명종께서 승하하시고 지금의 임금께서 대통을 이으시니, 하늘의 도리가 드러나고 숨음을 쉽게 측량할 수 없음이라. 영구(靈柩)가 장차 떠나려 하니, 승지와 내시를 보내어 상여를 호송케 하고, 또한 각 관사에서 1명씩을 보내어 교외에까지 배웅하여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가, 이 해 8월 초9일에 덕흥부원군의 묘소에 합장토록 하였는데, 묘소는 같이하되 묘실만을 달리하도록 하였다. 장례는 왕비 부모의 예로써 하였으며, 상례의 기일이 끝날 즈음에 해당 관사에게 본가에 나아가 가묘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경오년(庚午年) 봄에는 대신들이 계문을 올려 청하기를, 송나라 영종(英宗)이 복왕( 王)을 추존한 고사에 따라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존하고 부인을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칭하며, 나라에 제고(祭告)가 있을 때면 황백부모(皇伯父母)로 칭하게 하며 관원을 보내어 사당에 고할 때도 대군의 예로 올려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종1품의 작위를 내리고 토지, 노비를 내리고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갖추어 내렸다. 상례를 마치고 하원군이 홍섬에게 신도비명을 지어줄 것을 청하면서, 비명을 짓지 않으면 후세에 전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정릉(靖陵:중종)께서 저 덕스러운 가문을 맞이하였으니, 덕스러운 가문이란 오로지 무엇인가. 이처럼 크신 부인을 낳으셨도다. 두 가지 좋은 일을 짝할 수는 없는가. 하늘이 수복(壽福)을 주지 않음이라. 화가 복이 되었는가, 용이 못에서 뛰어오르는구나. 세자가 없으므로 이를 대신하여 궁궐에 맞이하여 대통을 이으셨도다.
위호를 높이시니 겨루어 달리 일컬을 것이 없도다. 갈대의 언덕에 맑은 기운을 뿌린 바이니, 산이 에워싸고 물이 굽이 돌아 호위하는 아름다운 집에 봉분이로다.
만력 원년(1573) 계유(癸酉) 8월 일
1子 하원군(河原君) 정(鋥)
생몰년 1545(인종 1)∼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종실로 휘는 정(鋥), 자는 백강(伯剛), 시호는 의헌(懿獻).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 이초(李岹)와 판중추부사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원부대부인(河原府大夫人) 정씨 사이에서 장자로 을사(乙巳) 1545(인종 1)년 5월 23일생으로 태어났으며 선조대왕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에 하원정(河原正)에 제수되었다가, 1561년 현록대부(顯祿大夫) 하원군(河原君)에 봉작되고 초창기는 주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한편 안하무인격으로 주변에 횡포를 부렸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맞자 1593년에는 종실자손 중에서도 유능한 자는 문무 양과에 응시하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1596년에는 소를 올려 “왕은 위로는 조종(祖宗)의 위대한 치적을 항상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피나는 정성을 존중하면서 다수의 의견을 좇아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국토를 유린한 왜군과 투쟁하기 위하여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에 가담하여 적극 활약하기도 하였다.
1597년에 내전(內殿)이 수안군(遂安郡)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사옹제조로서 따라갔으며, 이 해 정유(丁酉) 1597(선조 30)년 10월 3일에 그곳에서 졸하여 12월 29일에 양주 남면 수락산 기슭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향년 53세로 별세하였다. 1605년(선조 38) 호종2등공신(扈從二等功臣)올랐다. 그리고 자녀로는 9남 6녀를 두었으니, 1子 당은군(唐恩君) 인령(引齡), 2子 익성군(益城君) 향령(享齡), 3子 영제군(寧堤君) 석령(錫齡), 4子 성해부정(城海副正) 종령(宗齡), 5子 장림도정(長臨都正) 덕령(德齡), 6子 연성수(蓮城守) 복령(福齡), 7子 진산군(珍山君)유령(有齡), 8子 진성군(珍城君) 해령(海齡), 9子 진양군(珍陽君) 담령(聃齡), 1女 男便 기자헌(奇自獻), 2女 男便 강극유(姜克裕), 3女 男便 김극가(金克家), 4女 男便 김정립(金廷立), 5女 男便 유철(兪轍), 6女 男便 남영립(南英立) 이시다.
묘소는 대원군 묘 계하 신좌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영의정(領議政) 남양홍씨(南陽洪氏) 섬(暹)의 딸로 갑진(甲辰) 1544(중종 39)년 12월 21일생으로 태어났으며 기사(己巳) 1569(선조 2)년 10월 19일 향년 25세로 별세했다. 자녀로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당은군(唐恩君), 익성군(益城君), 영제군(寧堤君), 딸은 기자헌(奇自獻)에게 시집. 묘는 동쌍폄했다.
배위 선전관(宣傳官)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신안이씨(新安李氏) 의로(義老)의 딸로 병진(丙辰) 1556(명종 11)년 10월 7일생으로 태어났으며 병진(丙辰) 1616(광해군 8)년 1월 10일 향년 60세로 별세 했다. 묘는 덕릉 국내 불천지위 사당 후록 상단 건좌이다.
배위 장단백씨는 장림도정(長臨都正)을 배위 안산안씨는 연성수(蓮城守)를배위 진산이씨는 진산군(珍山君), 진성군(珍城君), 진양군(珍陽君)를 낳았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璿源譜鑑. 〈金昊鍾〉『인물고』, 『국조인물고』, 『증보문헌비고』,「제계고」.
2子 하릉군(河陵君) 인(鏻)
생몰년 1546(명종 1)∼1592(선조 25). 휘는 인(鏻), 시호는 효정(孝貞). 중종대왕의 7남인 덕흥대원군의 차남으로 금원군에게 입양되어 초수 하릉정(河陵正)에서 승진하여 현록대부 하릉군 정1품으로 승진되었다. 임진왜란때 통천군(通川郡)에서 4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 산119
3子 하성군(河城君) 균(鈞)
생몰년 1552(명종 7)∼1608(선조 41). 본관은 전주(全州), 초휘는 리균(李鈞), 휘는 리연(李鈞)이다. 아버지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리초, 어머니는 증 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조선 제14대 왕으로 비(妃)는 심성부원군(瀋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선조는 명종 7년 11월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자질이 우수하고 용모가 청수(淸秀)하여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나이가 16세로 어려 명종의 비 심씨(沈氏)가 수렴청정하다가 대사간 백인걸(白仁傑)의 주장으로 다음해 친정하게 되었다. 조선조에 방지(旁支)로서 대통을 이은 것이 선조에 와서 처음이므로 그 생부인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여 대원군(大院君)으로 하니 대원군제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위 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인재등용에 힘을 기울였는데 훈구(勳舊)세력을 물리치고 사림(士林)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학술과 덕행으로 이름난 명유 이황(李滉) ㆍ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이때 등용한 이들은 대개 무오사화(戊午士禍) 이래 여러번 탄압을 받아오던 사류(士流)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들로서 이른바 사림정치(士林政治)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ㆍ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招敍)하기도 하였다.
한편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伸老)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였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이기(李틒) ㆍ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또한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중국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선조대까지 200년간이나 전해 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시정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선록(儒先錄)》ㆍ《근사록(近思錄)》ㆍ 《심경(心經)》ㆍ《소학(小學)》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하기 위하여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는 등 유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그러나 선조 8년(1575)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동인(東人) ㆍ 서인(西人)으로 분당되고 동인이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는 등 정계가 당쟁에 휘말려 국력이 쇠약해졌다. 여기에 밖으로는 선조 16년(1583)과 선조 20년 2회에 걸쳐 야인(野人)들이 침입해 오는 등 불안이 가중되어 갔다.
선조 23년(1590)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황윤길(黃允吉) ㆍ 김성일(金誠一) 등을 파견하여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 다음해 돌아온 두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왜군이 침입한 지 보름만에 서울이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城)의 계획을 포기하고 의주(義州)로 피난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케 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는데 열중하도록 하였다. 이후 의병의 봉기, 이순신(李舜臣) 등 우리 수군(水軍)을 비롯한 관군의 승첩, 명나라의 원병 등에 힘입어 왜군이 퇴각하게 되자 1593년 10월 환도하였다.
환도한 이듬해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 온 왜군으로 하여금 조총 사용법과 탄환 제조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는 등 전력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백성의 생활이 극도에 이르게 되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이들에게 진휼하는데 보태도록 하였으며, 곳곳에 산재한 유해를 수집해서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는 등 고통을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선조 30년(1597)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고 왜군이 재차 침입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이 같은 전후 7년에 걸친 왜란 중에 삼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 귀중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며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모아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타버린 역대실록(歷代實錄)을 중인(重印)하여 정본(正本)을 춘추관에, 초본(草本)을 묘향산(妙香山) 등에 분장(分藏)시켜 놓았다.
그리고 궁궐이 타서 왕이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때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얽어 옮기려고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하였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불타 없어진 문묘(文廟)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 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외에 알렸다.
왜란이 끝난 뒤 선조 37년(1604)에 호성(扈聖) ㆍ 선무(宣武) ㆍ 청난(淸難) 등의 공신(功臣)을 녹훈(錄勳)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선조 41년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서부터 실시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이후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 ㆍ 서인의 붕당정치는 더욱 격심해져 커다란 시련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선조는 그의 재위 41년간 전쟁과 붕당정치에 휩싸였지만, 왕 자신은 강하고 굳세고 과단스럽고 공손하며 자애롭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효성이 충절하여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지극하였다. 또한 검소한 성품은 제왕(諸王) 중 뛰어났는데, 본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색(聲色)이나 사냥 등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무명요를 깔고 수라에도 두가지 고기가 없는 등 모범을 보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한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한다.
선조는 서화(書畵)에 뛰어났으며, 왕이 죽기 전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소경(昭敬), 능은 구리시(九里市) 소재 목릉(穆陵 : 동구릉(東九陵) 내 소재),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燃藜室記述, 懲毖錄, 亂中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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