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년 북주(北周)를 이어받은 수나라는
10년도 채 되지 않은 589년 남방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가 망한 뒤 약 4백 년 가까이 계속되던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수나라를 창건한 문제(文帝)는 귀족문벌세력을 억제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정한 국가고시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그 이전까지는 학식과 인품과 덕망을 기준으로 사람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구품중정제는 등급을 나누는 실제적인 기준에서
개인적인 학식과 능력보다는 가문과 배경을 더욱 중시했기 때문에 사실 공정하지 못한 제도였다.
과거제도는 가문과 배경보다는 개인의 학식과 능력을 중시하는 제도로, 근대 이전의 서구의 지식인들이 찬탄해마지 않던 제도다.
수나라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 사업과 무리한 고구려 정벌 등으로
국력을 과도하게 소비했고 또한 황음무도한 정치를 펼치다가 결국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간다.
천하의 대세는 618년에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오랜 분열의 시기를 마치고 새로운 에너지가 넘치는 통일제국을 건립했으나
무리한 정책으로 그 에너지를 갈무리하지 못하고 진나라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진나라를 뒤이어 등장한 한나라가 진나라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번영을 구가했듯이 수나라를 이어 등장한 당나라 역시 수나라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훌륭한 정치를 펼쳐 분열을 통해 축적된 새로운 활력을 잘 활용하고 한족 왕조로서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당나라의 건국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태종은 셋째 아들로서 권력을 잡기 위해 형제들을 살육하는 잔혹함을 보였지만, 중국역사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정치를 펼쳐 당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의 정치는 그의 연호를 따서 정관(貞觀)의 정치라고 하는데 후대 황제들에게 정치의 모범답안 역할을 했다. 정관의 정치가 있었기에 당나라는 후대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안록산의 난과 황소의 난 등 여러 차례 굵직한 난을 겪으면서도 약 3백 년 가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원래 태종의 후궁이었는데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눈에 들어 애첩이 되었다가 대단한 정치적 야심과 수완을 발휘하여 마침내 황제에 올랐다.
중국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인 그는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왕조인 주나라를 국호로 택했으며 그리 이상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통치를 했다.
후대의 사가들은 그를 무황제로 부르지 않고
측천무후라고 부르는데, 남존여비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자를 황제로 부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약 15년을 끌던 주나라는 측천무후 말기에 쿠데타에 의해 다시 당 왕조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그 뒤로도 몇 년 동안의 궁중암투가 계속되었는데 현종에 이르러서야 왕실은 안정을 되찾았다.현종은 몇 십 년 동안 훌륭한 정치를 펼쳐 당나라의 위세를 만방에 과시했다.
그의 통치기인 개원(開元)시기는 정관시기를 능가하는 태평성대로 당나라 최고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당 제국은 군사력과 생산력, 문화의 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다.
수나라 때 무너뜨리지 못한 고구려를 신라와 연합으로 함락시켰고, 서쪽으로는 당시 최고의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여러 군소 제국들을 합병하여 한족이 세운 왕조로서는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세계 최고의 국제도시였다.
당나라는 외래문물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수많은 외교사절과 상인들뿐만 아니라 각 종교의 선교사들이 장안에서 포교활동을 벌였다.
중국 전통종교인 도교와 이미 안방자리를 차지한 불교 외에 신생종교인 이슬람교, 머나먼 유럽에서 전래된 기독교, 심지어 페르시아의 배화교까지 전파되어 실로 종교의 백화점과 같았다.물론 이 가운데서 가장 빛을 발한 종교는 불교였다.
남북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 불교는 이 시기에 이르러 거의 최고조에 이르렀다.위진남북조시기 불경의 수입에 주력하던 중국인들은 당대에 이르러서는 의지하는 경전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파를 성립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창출했다.
정토종(淨土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등의 온갖 종파가 성립하여 중국사상사를 풍성하게 했고, 불립문자를 내세우며 중국적 특징을 듬뿍 지닌 선종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서서히 세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형국이었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당시 문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채로움과 화려함을 마음껏 구가한 시기였다.위진시대 이래로 내려오던 교의 추구가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화려한 외형적 기교만 추구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형식과 내용이 어우러지는 실로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서 일정 부분 대교약졸의 미학을 성취했지만 풍격상으로는 화사함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음악, 미술, 건축 등 문화와 예술 전반에 걸쳐 찬란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했다
자료출처 ; 중국문화대교약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