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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허무 예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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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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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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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일 목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09157
김레오나르도 2022.09.22 04:28
- 허무 예찬
허무 예찬(虛無 禮讚), 영원을 만나게 하는 이 세상 허무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제 할아버지 돼 가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는 더 좋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더러운 피랄까, 탁한 피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로원에 잠깐 살았을 때 저의 피는 뜨거웠지만
이 뜨거운 피가 저를 자주 욕심을 부리게 했고 세상을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양로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열정과 뜨거운 피를 정화해줬습니다.
욕심과 집착의 정화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것인데 그것처럼
오늘 독서 코헬렛서도 같은 정화제였는데 그것은 오늘 코헬렛서가 말하는
‘허무로다. 허무’가 이 세상 집착을 버리고 영원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허무란 있던 것이 사라져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애쓴 보람이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내가 애를 써서 강이 흐르지 않거나 흐르지 않던 것이 흐르게 된다면,
내각 애를 써서 태풍이 순풍이 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내가 애를 써서 해가 뜨지 않거나 서에서 동으로 뜬다면,
그 애쓴 보람이 있으련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애써 말해도 말한 것이 다 헛것이고,
보고 또 봤어도 본 것이 다 못 볼 것들이며
듣고 또 들었어도 성에 차지 않고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그런데 애쓴 보람이 없어 애쓰며 살아온 것이 다 허무로 돌아가지만
그 허무가 영원을 만나게 합니다.
이 세상의 허무가 저 세상의 영원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쓴 이 땅이 허무하지 않다면 언제 하늘을 보겠습니까?
허무한 하늘을 왜 봅니까?
이 땅이 내게 허무하지 않다면 허무한 하늘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허무가 영원을 잉태하고 있고,
허무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입니다.
허무가 곧 태허太虛이고 영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무할 때마다 영원을 잉태한 허무한 하늘을 보게 하는데
그런데 오늘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즈음
허무가 영원만 만나게 하지 않고
영원한 분까지 만나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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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에서 과거보다 훨씬 오래 사는 데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조사했습니다. 응답자들은 암을 완치하고 인공 팔다리를 자유롭게 장치할 시대가 오리라는 데 대해 낙관했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의 발전들은 전체적으로 좋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이 노화 과정을 늦추는 것은 이 사회에 오히려 나쁘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령화로 경제적 부담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고, 세대 간의 협력이 줄어들어 가족 구조의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제로 이 사회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치료가 나온다면 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대부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 정도의 사람들은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남과 다를까요?
아무튼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남과 다른 나는 특별하니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죽음보다 먼저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라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나옵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의 간계로 귀찮은 방해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것입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예수님의 기적 활동을 보고 유다인들이 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로데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했던 일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과거의 자기 잘못으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곧바로 뉘우침의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받을 벌,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벌을 떠올리며 두려워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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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갖는게 아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희망을 갖는다. 절망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절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희망을 뺏을 수 없다(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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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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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에 기뻐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며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꿈을 통해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죗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더디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릴 뿐입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기뻐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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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우외환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시련과 아픔의 순간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없었던 일들이 본당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오랜 동안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힘든 중에도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병원에 있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남편은 재활운동하면 된다고 하고, 아들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시련과 고통이 스나미처럼 밀려왔듯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잘 되는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지만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했습니다. 노상강도에게 가방을 빼앗겼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저는 이 시(詩)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제 삶에도 굴곡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만큼의 용기와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푸쉬킨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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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 만나고 싶으십니까? 정말로 만나보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만나면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실지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데리고 가신다고 하면 어떨까요? 못 간다고 할까요?
또한 주님 만나면 내 모든 허물이 보일지 모릅니다. 주님이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허물도 기억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 뵙고 싶으십니까?
오늘 헤로데가 말합니다. ‘내가 그를 만나봐야겠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와 같은 마음이지요. 헤로데는 우리처럼 순수한 마음에 주님을 뵙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만약 그가 살아났다면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헤로데가 왜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까? 헤로디아의 딸, 전승에 의하면 ‘살로메’라고 하는 그 여인의 춤 값으로 요한을 죽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허영심 때문에 요한은 죽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죽었고, 하느님의 뜻이 죽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허영은 무섭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허영심이 있을까요? 몸을 치장하는 것,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것, 이것도 허영이지만 이런 허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필요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그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 내 필요에 따라서 눈을 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놓고 말로만 ‘하느님이 언제나 계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누구나 허영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이유는 허영심을 조금씩 버리고 주님 만나는 길을 조금씩 걸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헤로데처럼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무서움에 만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 때문에 당당하게, 우리 사랑의 삶 때문에 웃으면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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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해충제
돈벌레는 제가 사는 이곳에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어느날은 점심을 먹는 중에 직원분들 사이에 나타났습니다.
작았으면 다행이었겠는데 사이즈가 조금 컸습니다.
그래서 언뜻 본 사람들은 지네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습니다.
돈벌레는 왜 길고 다리 많게 생기었을까요?
정말 돈처럼, 혹은 동전처럼 동그랗고 황금색으로 생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 그렇게 생겼다면 돈벌레는 모으는 사람들도 생겨났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실까요? 돈벌레는 익충입니다. 모기와 바퀴벌레와 파리 등을 먹이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름에 돈벌레가 많이 나왔었는데…. 그래서 모기가 많이 없었나 보네요.
하느님께서는 돈벌레를 통해서도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계시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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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무의 병, 무지의 병
“약(藥)은 사랑의 하느님뿐이다!”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듯 시(詩)도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참 맘에 드는 시가 찾아왔을 때 기쁨은 참으로 오래갑니다. 얼마전 “꽃”이라는 시가 찾아 왔고 그때도 나눴지만 곱게 피어난 맨드라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인에게 재차 시화(詩畫)를 부탁하여 어제 저녁 무렵, 세상사에 지쳐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의 나눔도 중요하기에 저녁 묵상시간, 휴식시간에 나눴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하루하루 꽃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꽃같이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8월 중순에 찾아온 시인데 지금도 기쁨과 향기로 남아있는 시입니다. 더불어 꽃과 관련된 잊지 못하는, 몇 번이나 인용한 시도 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가난한 자매가 꽃같은 미소로 꽃 한송이를 들고 왔기에 즉시 써드린 답시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정말 꽃같은 예쁜 영혼을 만나면 “꽃보다 예쁘다!” 감탄하곤 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영혼, 꽃같은 영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성무일도 첫째 시편 후렴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영혼의 병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 영혼의 병, 무지의 병, 허무의 병에 약(藥)은 단하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임을 고백하는 위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꽃다운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려 25년전 저를 찾아와 큰 위로를 줬던 “민들레꽃” 시도 생각납니다. 순간 창밖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이 하늘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지금까지 내용들이 오늘 제1독서 코헬렛과 짧은 루카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코헬렛을 성경에 넣느냐 역사상 큰 논난이 있었으나 성경에 속함으로 얼마나 영적사고가 풍부해졌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일부 생략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마음 썰렁하게 하는 체험적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작자의 허무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중세기의 대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 공감합니다.
생명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치유될 허무의 병, 무지의 병이요,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시달려 고생하기 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친교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두터이 하자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못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지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이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가 됩니다.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닐에 힘을 실어 주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무지와 허무의 블랙홀, 심연에서, 늪에서 끄집어 내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찬미의 사람들은 무지와 허무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충만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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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남>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주님의 사람만이
오롯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착한 사람만이
착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올곧은 사람만이
올곧으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부드러운 사람만이
부드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너그러운 사람만이
너그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깨끗한 사람만이
깨끗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주님의 사람만이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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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리스도인과 함께 고난을 겪으시는 그리스도
저는 진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듯,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서 고난을 겪으십니다. 머리의 영광이 지체에 미치듯, 지체의 고통은 머리의 고통이며 상처입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로구나!”(마르 6,16). 이 똑똑한 임금, 이 유명한 판관, 풍기 단속관이며 규율의 수호자, 무죄도 응징하고 죄도 벌하는 자가 요한의 목을 베었노라 실토합니다. 그러나 그 파렴치한 행위가 왕권에 누가 될세라 살해 동기에 관해서는 침묵합니다. 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드러내 살해된 분께는 영광을 드리고 살인자에게는 불명예를 돌립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엑카르트는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이라고 말한다. “그 오솔길은 아름답고 즐겁고 기쁨이 넘치고 눈에 익은 길이다.” 첫째 오솔길에서 복과 함께한 우리의 경험으로 보건대, 창조의 에너지가 창조주 밖으로 흐르되 창조주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든 피조물이 순수한 신앙의 행위로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엑카르트가 피조물을 인식하고 피조물과 상호 작용하는 방법이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모든 천사가 자신의 완전한 기쁨 및 다시없는 기쁨과 더불어 내 속에 있고, 하느님이 몸소 자신의 온갖 기쁨과 더불어 내 속에 있건만, 나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구나.”
둘째 오솔길에서 엑카르트는 우리의 단절된 방법, 곧 세계를 보고 사랑하는 방법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를 다룬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함에 맞게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엑카르트는 선언한다. 우리 자신의 선함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치유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오솔길, 곧 창조계의 오솔길에서 우리는 단언신학의 하느님, 빛의 하느님, 존재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 창조의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긍정의 길을 여행했다. 둘째 오솔길에서는 부정신학의 하느님,이름 붙일 수 없고. 숨어 있으며, 캄캄한 무의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부정의 길을 여행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정의 길 역시 “아름답고 즐겁고 기쁨이 넘치고 눈에 익은 길”이기 때문이다.(247)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격외 은총
때마침 그 부인은 집의 작은 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그 부인은 루치아의 어머니께 히야친타의 이 기도에 무척 감화되어 발현을 믿는 데 다른 아무 증거도 필요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이 부인은 아이들에게 욕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기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청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때 어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히야친타의 발 아래 끓어 무서운 병에서 구해 주기를 성모님께 부탁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모양을 본 소녀는 동정심을 금할 길 없어서, 떨고 있는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 했으나 자신도 힘겨워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함께 성모송을 세 번 드린 다음 부인을 위로하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성모 마리아께서는 틀림없이 아주머니를 불쌍히 여기실 거예요.”
그런 다음 히야친타는 날마다 그 부인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자 며칠 후 그 부인이 다시 찾아와서 완쾌된 기쁨을 성모님께 감사했다.
어느 날 고바 다 이리아에서 아이처럼 울고 있는 군인이 있었다. 그는 소집 영장을 받았는데 병석에 있는 아내와 어린 세 아이를 두고 출정해야만 했다. 그는 성모님께 아내를 완쾌시켜 주시든가 혹은 자신의 소집 영장을 취소해 주십사고 청했다. 히야친타는 그에게 자기와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도록 부탁하고 말했다.
“군인 아저씨, 울지 마세요. 성모님은 꼭 당신 청을 들어 주시고 은혜를 주실 거예요.”
그녀는 그 군인의 사정을 잊지 않고 로사리오 기도 끝에 반드시 성모송을 한 번 더 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그 군인은 자기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성모님께 받게 된 이중의 은총을 감사하러 다시 고바로 찾아왔다. 드디어 내일이면 입대하게 된 그 전날 밤 갑자기 열이 나서 출정을 면제받였고 그 아내도 성모님께서 확실한 기적으로 완전히 낫게 해주셨다는 것이었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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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루카 9,7)
저는 아직도 호기심이 참 많습니다. 『호기심과 기쁨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긍정적인 경험에는 대부분 호기심과 기쁨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 음악, 춤, 요가, 운동, 독서, 영화, 하이킹, 여행, 속 깊은 대화, 어린 시절의 놀이 등이 긍정적인 경험에 포함된다. 호기심의 감정적 패턴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서 나타난다. 우리 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흥겨운 경험으로 인해 마약 성분이 섞인 도파민이 분출되는 현상을 확인할 것이다. 』 (토드 카시단의 「행복은 호기심을 타고 온다.」 중에서)
호기심은 누군가가 나에게 안겨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고 기쁨의 재료들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임이 적어지고, 활동할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의욕이 떨어질 때 그 무엇인가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 역시도 시간적인 여유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니 밀려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었죠. 그래서 저는 새삼스럽게 ‘책 읽기’와 ‘여행과 걷기’ 등에 부쩍 많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 허리와 다리가 아픈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런 호기심은 익숙하고 친숙한 것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고 새롭게 보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삶의 호기심이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기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9,7)하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한 까닭이란 그 자신이 과거 행하였던 일 곧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9,7)라는 소문은 바로 그의 내면에 침잠해 있던 세례자 요한의 일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의 느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은 헤로데에게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9,9)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런 연유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은 사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 잠재된 속 깊은 느낌은 바로 불안이며 두려움에서 기인하였다고 느껴집니다. 사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천박한 호기심과 자신의 불안 요인을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흔히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 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해서 광명 찾자, 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어리석게 목을 벤 이후 끊임없이 자책하고 후회했지만, 그를 주검에 이르게 한 일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그 내면 깊이에는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내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았으면서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이기에 그 삶은 평안하고 평온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헤로데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참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어제와 다른 참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호기심에서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가 너와 함께!” (마르6,50; 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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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귀 막은 헤로데 마냥 불안에 떨지 말고 /
박윤식 [big-llight] 240925 20:02 ㅣNo.176266
‘헤로데는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이는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 하였다.’ 우리도 이런 불안을 느끼는 건 아마도 지은 죄 때문일 게다. 진리와 정의를 저버렸을 때 오는 양심의 소리가 불안이리라. 그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충고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질렀다. 따라서 아무리 권력자라도, 그 불안이 도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공생활 내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이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에 탄복했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혼란을 겪기도 했으리라.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많은 이가 하느님을 더욱 찬양했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기고 죽일 궁리까지 했으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에게 디딤돌이 되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으리라.
그러면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출현은 어떠했을까?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눈엣가시였던, 자신의 불의와 불순을 드러내 치부를 폭로했던 걸림돌 중의 걸림돌인 요한이었으리라. 요한의 정의 앞에서 헤로데가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예수님의 출현으로 다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을 게다. 헤로데는 요한이 바른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죽일 때에도 몹시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목을 베었다. 죽이고 나서도 헤로데는 요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은 죄를 되돌아보며 뉘우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 데 있다. 성찰과 정화의 시간이 없이 거듭되는 죄는 양심을 무디게 한다. 문제는 우리 모두도 마지막 보루인 자신의 우러나오는 그 양심마저 내몰라하면 마침내 바다 한가운데에서 좌표 잃은 배처럼 스스로 제 모습을 잃고 표류할 게다.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리라.
헤로데는 탐욕과 피비린내의 권력에 젖었기에 인생무상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그는 예수님의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 ‘죽었던 세례자 요한의 출현’이라는 소문에 집착했을 게다. 한때 그를 의인이라고 여겼지만, 그를 참수시킨 헤로데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온 마음속에 감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는 영혼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두고 종말에 다시 오리라고 믿는 엘리야라 여겼고, 또는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지만, 헤로데는 유독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말에 쾌나 신경을 곤두 세웠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려 한다. 어쩌면 헤로데가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는지도. 하지만 그에게는 실로 예수님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었으리라.
우리도 문득 이전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가끔 진실을 왜곡하거나 피하려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되레 안타깝다. 믿는 이는 이런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일에는 어쩜 분노해야만 할 게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와 정의에 언제나 함께 하기에 스스로가 항상 바른 길만을 가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도 언제든 함께 해 주실 거니까. 헤로데처럼 진리에 귀 막지를 말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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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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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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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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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 말씀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일 백번 천번 곱씹고 되뇌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미 다 버렸다, 다 내려놓았다고 외치지만,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허무한 대상이 있고, 절대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어떤 대상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대상, 뜬 구름 같은 대상에 절대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 보면 큰일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이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 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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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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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기도가 정말 기도인지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헤로데에게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기도는 어둠에 있던 나를 점점 빛이신 주님께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수록 먼저 나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정한 기도가 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라는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인 가브리엘 신부를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멘도사는 처음에 과라니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용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탐욕,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멘도사의 도덕적 타락은 분노에 차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여 자신의 동생까지 죽입니다.
멘도사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연민과 겸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현하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생과 애인을 증오하기만 했던 그가
사제를 만나니 지금까지의 자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멘도사를 정죄하는 대신 가브리엘 신부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멘도자를 초대하여 자신이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들을 돕는 임무에 자신과 다른 예수회 회원들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갑옷과 무기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어 과라니 종족이 사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끌고 오는 짐의 무게는 그를 더 짓누릅니다.
과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은 그를 예전의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칼로 그의 짐을 끊어 떨어뜨려 버리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용서의 행위는 멘도사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할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회와 함께 싸우면서 사명의 수호자가 됩니다.
햇빛 속의 먼지처럼 멘도사의 죄는 가브리엘 신부와 높은 곳에 사는 과라니 종족에 가까워질수록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성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나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용서를 깨닫고 주님께 충실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하늘과 빛으로 들어 올리는 모든 이가 겪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 갈수록 나의 죄가 크게 보여서 “내 탓이오!”가 저절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되지 않으며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분께 찬미와 영광이 나오고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 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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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헤 로 데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이 이야기는 23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앞의 9장 7절에 있는,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만 보면,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헤로데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23장 8절에 있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라는 말을 보면, 그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느낀 두려움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미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 즉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23장 8절에 있는,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헤로데는 그저 어떤 신기한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어 했을 뿐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의 9장 9절에 있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헤로데의 말은,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음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루카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헤로데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2; 마르 6,16).
그러나 세 복음서를 전부 합해서 생각하면,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헤로데의 말은 ‘세례자 요한이 부활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죽은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로 해석됩니다.
(부활과 환생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환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헤로데가 생각했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고,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친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마태 14,5).
(아마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 문제를 비판한 것 때문에,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뒤의 1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번역문만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헤로데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헤로데가 바리사이들을 보내서, “어서 이곳을 떠나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라고 협박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헤로데가 그 바리사이들을 보냈음을 나타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차지하면 잃을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하게 밀려나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린 다른 권력가의 말로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로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는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신약성경에 세 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세 명 다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서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내다가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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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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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
우리는 살면서 많은 ‘만남’을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내 스스로가 만남을 만든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고
우연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기회가 그 만남을 마련할 때가 많지요.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어.’라고 후회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각자의 삶을 통해서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무수히 많습니다.
지속적으로 만남의 관계가 있는가하면 마치 책갈피에 끼어 있는 한 줄의 글과 함께
기억하지도 못했던 이름의 한 주인공으로의 만남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헤로데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몇 차례 거론되고 있습니다.
베틀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장차 태어날
메시아에 대해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베틀레헴으로 보내면 “가서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마태 2,8)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헤로데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대신
그는 베틀레헴의 일대의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헤로데는 루카 복음이 전해주는 대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그는 일전에
목을 베여 죽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온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드디어 그가 만나고 싶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무리에 의해서 헤로데에게 끌려 온
예수님이 갈릴래아 사람인 줄을 알고 빌라도는 헤로데에게 예수님을 보냅니다.
그 때에 마침 헤로데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로데는 소문대로 유명한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합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이내 마음이 바뀝니다. 헤로데는 자가 앞에 끌려 온 예수님이
그저 초라한 죄수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고는 자기 군인들과 함께
그를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왕위에 대한 도전자로 보았고, 기적을 베푸는 기인으로서,
자신의 흥밋거리로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왕위의 도전자도 기적이나 베푸는 흥미의 대상이
사실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메시아이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셨습니다. 헤로데와의 만남은 그렇게 해서 한 순간이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인간적인 가치나, 해우만을 만을 위한 예수님과의 만남은 헤로데와 모양새만 다를 뿐이지
그 결과는 실망으로 또 남아 있다 해도 작은 위안 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언했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이 아이가 장차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루카 2,34)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예언했습니다.
사랑의 관계인 주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을 떠나 부활까지 연결되지요. 사람은 변하고
잊기 쉽지만 우리의 주님과의 만남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죽음을 넘어선 사랑이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소중한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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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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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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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을 살아가는 삶
<2024.9.26>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3:14~25절)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을 살아가는 삶❞
❚ 하나님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돌보시며, 선한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십니까?
➲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승리로 이끄십니다(14~19절).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탄식합니다(14절). 이렇게 탄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국력이 나날이 쇠퇴하고 대적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할 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이 심각한 위기에 당면할 때마다 엘리사가 나서서 기적적으로 나라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찾아온 요아스를 향하여 엘리사는 활과 화살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손을 요아스의 손에 얹은 후, 동쪽 창을 열고 활을 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17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학대를 친히 보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 도우시며 구원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엘리사는 또 화살을 잡으라 하고 이번에는 땅을 치라 말합니다. 이에 왕은 “...세 번 치고...”(18절) 그쳤습니다. 엘리사는 왕의 행동에 대하여 화를 내며 “...왕이 대여섯 번을 쳤으면 아람을 진멸할 때까지 쳐부술 수 있었을 것...”(19절)이라며 책망하며 단지 세 번만 승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살피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으로 달려가지 말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우리는 그 은혜에 합당한 믿음으로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자신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돌보시고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기에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자처럼 행동하지 말고, 믿음으로 당면한 슬픔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날마다 용기를 얻어 당당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힘겨운 인생 중에서도 갖는 그 믿음을 기뻐하시며 미리 예비해 두신 놀라운 역사를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넘치는 은혜로 채우십니다(20~21절).
엘리사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스승 엘리야의 죽음처럼 극적으로는 묘사되지 않고, 그가 죽자 장사되었다고 단순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사는 죽은 후에도 능력을 발휘합니다. 해가 바뀌매 모압의 도적 떼가 해마다 이스라엘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이는 새해가 시작될 때에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이루어졌기에 근방에 사는 이방 민족이 자주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즉 모압의 도적 떼는 추수기에 이스라엘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한 무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도적 떼를 보고 놀라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내던지고 달아났습니다.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그 사람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엘리사는 생전에 이와 같은 이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죽은 물을 온전하게 치유했고(2:19~22),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켰고(4:32~37), 독이 든 음식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습니다(4:38~41). 기근 때문에 배고픈 자를 적은 음식으로 먹였으며(4:42~44), 이방인 문둥병자를 고쳤고(5:14),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6:8~23), 기근을 멈추게 했습니다(7:1). 이런 모든 기적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기적을 보여 주셨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힘써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며 미리 예비해 두신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채우시는 은혜를 힘입어 온 힘을 다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 약속을 이루십니다(22~25절).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 왕이 줄곧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습니다(22절).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진멸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22~23절). 그 후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이 아람의 왕이 되었을 때에 요아스는 엘리사의 예언으로 받은 약속처럼 벤하닷을 세 번 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요아스는 자신의 부친 여호아하스가 아람에게 빼앗긴 성읍들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24~25절).
하나님은 자신의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맺으신 약속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끝까지 믿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아람이 여러 번 침범을 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영적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약속이 더디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고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눈물이 아닌 은혜로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끝까지 우리를 돌보시며, 승리를 약속해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뿐 아니라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앞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힘써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3:14~2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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