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천년고찰 해남 미황사 역사기행
일시:2023년6월25일(일)오전11시~1시
장소:해남군 달마산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내용:한반도 최남단위치 사찰탐방
해설:윤호상 의장
후원:행정안전부
미황사[ 美黃寺 ]
해남 미황사 대웅전(해남 미황사 대웅전, 1754년, 보물 제947호)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달마산(達磨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조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이 절에 내왕하였다고 하므로 당시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598년 만선(晩善)이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이 3창하였으며,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가 중건하여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하였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이 있으며, 기타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이 중 미황사 응진당이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598년 만선(萬善)이 신축하였으며,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16나한 등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98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되었으며, 1982년의 수리 때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건물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고, 후불탱화(後佛幀畫)가 걸려 있으며, 법당 뒤편의 목궤에 넣어둔 괘불(掛佛)은 오래된 것으로 몹시 상하였다.
이 절의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곳은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전부 도굴되어 흩어져 있다.
또한, 미황사 사적비는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 1634∼1692)이 세운 것으로서 초서로 된 높이 3m의 비인데, 옥개석 위에 용을 얹어 조각하였다. 이 밖에 절 뒷산 사자봉에는 ‘토말(土末)’이라 쓰인 비석이 있어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나타내고 있다.
미황사 대웅전은 보수중
비안개에 젖어있는 달마산
미황사 108계단 입구
『해남군 민간인학살지와 역사탐방을1박 2일동안 무사히 마치고 귀경하였습니다. 1950년 7월경에 발생한 나주경찰부대가 저질렀던 민간인학살지에서 목각원혼비를 거치하고 고유문낭송과 해원무공연으로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원혼들의 넋을 달래고 해원무공연을 마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제수용품으로 해남피학살유족들과 함께 제례를 마쳤습니다.
장마전선이 형성되어 마지막 날 세찬 비바람이 불어 년로한 유족들과 동행하였던 단체회원들의 건강때문에 낙오가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하게 한사람도 낙오되지않고 탐방을 무사히 잘 마무리하였습니다.
김남주시인생가에서는 자유 인권평화를 주장하였던 남주시인의 일생을 돌아보았으며 조선의 명시인 윤선도의 삶의 세계를 시를 통하여 느낄수있었습니다.
천년의고찰 대흥사웅장함과 신비스러움에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알게되었습니다. 한반도 육지 최남단에 위치한 달마산 미황사는 비바람폭풍우에 천년을 견디며 왜구의침입을 불심으로 막으려했던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수있었습니다. 이번 행사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말씀드립니다.』
첫댓글
년로하신 유족님께서
천리의 먼길에 70여년
전 경찰부대의 악랄한
만행에 풀잎처럼
쓰러져가신 피학살자
원한을 풀고자 위무의
행사를 치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