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는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이자, 처음으로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1999년, 데뷔작 『남극』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키건을 두고 해외 독자들과 평단은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그가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지 그 귀추를 주목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2007년, 긴 침묵 끝에 세상에 꺼내 보인 이 책은 그를 향한 비평적 찬사가 헛되지 않았음을 당당히 증명해 냈다. 작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 세계를 선명히 내보이면서 전 세계를 매료시켰고 ‘단편 소설의 여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륙적인 명성까지 안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들의 부푼 기대를 그 이상으로 충족시킴으로써 자칫 독이 될 수도 있었던 드높은 기대와 관심을 모두 자신을 향한 박수갈채로 돌려받은 것이다.
“먼 훗날 고전으로 불리게 될 소설”
소설가 최은영, 무라카미 하루키, 리처드 포드 추천!
영국제도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힐 단편 문학상을 수상한 이 책에는 뛰어난 생동감과 숨 막히는 긴장감이 돋보이는 일곱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이미 20년 전부터 키건에 대한 남다른 경의를 표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한 작품 「물가 가까이」도 포함되어 있다. 하루키는 2004년에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어 『생일 이야기(Birthday Stories)』라는 선집을 출간했는데, 그 개정판에 키건의 작품을 실으며 “그가 꾸밈없는 단어와 문장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단순한, 그러나 따뜻하고 심오한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포드 또한 이 소설집을 자신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고 “키건은 아주 드물게, 내가 항상 읽고 싶어 하는 작가다.”라는 추천사를 남기며 특별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한편 비평가들이 가장 주목한 작품은 키건이 아일랜드 소설가 존 맥가헌에게 영감을 받아 쓴 단편 「굴복」이다. 존 맥가헌은 클레어 키건에게 문학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이 작품은 맥가헌의 『회고록(Memoir)』에 나온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화를 모티브로 한다. 맥가헌의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약혼자였던 여성과의 결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오렌지 20여 개를 구입해 공원 벤치에 앉아 그 자리에서 전부 먹어치운다. 「굴복」에서도 오렌지를 먹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는 결혼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굴복하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마지막으로 허락하는 방종을 상징하며,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을 가진 극단적인 남자의 심리를 보여주는, 아주 독특한 문학적 차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 “숨 막힐 듯 정확하다”, “암시(暗示)의 천재” 같은 찬사를 보내며 레이먼드 카버, 안톤 체호프 등 단편소설 거장들의 작품과 견줄 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대 문학계에서 단편소설에 집중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는 극히 드문데, 키건은 그 당시 출간한 단 두 권의 단편집으로 이미 세계 최고의 단편 작가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키건은 한 인터뷰에서 짧은 이야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세상의 장편소설은 대부분 너무 길어요. 저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어떤 강렬함으로 묘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렬함은 장편소설에서는 쉽게 사라집니다.” 본질만이 남을 때까지 주변에 있는 것을 덜어냄으로써 삶의 중요한 순간을 더욱 분명하게 그려내는 것은 키건 작풍의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돋보이는 이 초기작 역시 세밀하게 깎아 드러낸 암시와 은유적 표현을 자랑하며, 소설의 의미를 시로 정제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자 자신의 마술을 누구보다 멋지게 펼쳐 보이며 완성한 걸작이다.
“아주 작은 한 걸음이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더듬어가는 상실과 치유와 이야기
앞서 국내에 소개된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이 고요하고 먹먹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였다면 『푸른 들판을 걷다』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아일랜드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신비한 분위기를 선사하기도 한다. 과묵한 남자들과 거친 여자들이 사는 시골 세계에서 이들은 대부분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낳는다. 아버지와 딸, 농부와 연인, 사제와 신부 등 각자의 외로움의 세계에 갇힌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일상 속 갈등과 감정 묘사를 통해 개인의 연약한 내면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다른 비극과 상실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소녀이기도 하고(「작별 선물」), 성직자라는 역할에 주어지는 고독함과 세속적인 삶의 뜨거움 사이에서 갈등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낸 사제이기도 하고(「푸른 들판을 걷다」), 감정적 무지함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그 비참한 마음을 술과 꿈으로밖에 위로받지 못하는 남자이기도 하다(「검은 말」). 또 사랑이 결핍된 남편과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아내이기도 하고(「삼림 관리인의 딸」), 사랑하는 남자와 아기를 모두 잃은 여자이기도 하다(「퀴큰 나무 숲의 밤」). 이야기 속 인물들은 각자 다른 상실에서 비롯한 상처와 결핍을 안고 있으며, 키건은 이를 섬세하고 간결한 언어로 조심스레 건져 올린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어두운 과거에 매이지만은 않는다. 「작별 선물」의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몰래 팔아 비행기 표를 구입해 고향을 탈출하고, 「푸른 들판을 걷다」의 사제는 중국인 치료사를 찾아가 지난날의 상처를 직면함으로써 회복하며, 「퀴큰 나무 숲의 밤」의 주인공 마거릿은 잘 모르는 어부의 배 위에 올라타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탈출하는 등 실패의 궤적 밖으로 걸어 나가려 노력한다. 그것이 운명적인 선택이든 혹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동이든 그들의 “한 걸음이 어디로 이어질 수 있는지(202쪽)” 독자로 하여금 옅은 희망과 기대를 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