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독특한 술자리 정치...
음주 습관 따라 벼락승진에 참수까지
세조(世祖) 하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군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성공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의 1인자가 된 수양대군(세조)은 2년 후인 1455년 6월 단종을 압박해 왕위에 오른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만큼 세조에게는 늘 정통성 시비가
따라붙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이 중심이 돼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킨 것은 세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
그러나 세조는 왕이 된 후 문종, 단종 이후 추락된 왕권 회복을 정치적 목표로 삼아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부활시키고 ‘경국대전’과 ‘동국통감’ 같은 편찬 사업을 주도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세조가 왕권 강화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정치를 펴 나가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자주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조실록’의 ‘술자리’ 검색 기록이 무려 467건이나 나타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의 왕 중 최고기록이다.
그뿐 아니라 실록에 나타난 ‘술자리’ 검색어 974건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다.
술자리 횟수에 관한 한, 세조는 조선 최고의 군주라 불릴 만하다.
세조는 왜 이처럼 자주 술자리를 마련했던 것일까?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들에게 자주 술자리를 베풀어주면서 만남의 장을 가졌다.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등 공신들과 함께 술자리를 즐겼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대화는 물론이고 흥이 나면 함께 춤을 추거나 즉석에서 게임을 하는 등 술자리에선 신하들과 격의 없이 소통했다.
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강한 이미지가 남아 있었던 만큼 최대한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또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공신 세력을 양날의 검(劍)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공신들이, 또 다른 순간에는 자신에게 칼끝을 겨눌 위험성을 인식한 세조는 잦은 술자리를 통해 그들의 기분을 최대한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짐하도록 했다.
세조가 왕이 된 후 술자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455년 7월 27일의 일이다.
“왕이 노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술자리를 베푸니, 종친(宗親) 영해군 이상과 병조판서 이계전 그리고 승지 등이 모셨다.
음악을 연주하니 왕이 이계전에게 명해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지극히 즐긴 뒤에 파했다.
이후 영응대군 이염의 집으로 거둥해 자그마한 술자리를 베풀고 한참 동안 있다가 환궁했다.”
1차의 아쉬움 때문에 2차까지 갖는 모습은 세조의 술자리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술자리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춤을 춘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 등 여러 공신을 불러 주연(酒宴)을 벌이면서, 사람을 시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정도전에겐 다가가서 “이 곡은 그대가 작곡한 것이니 일어나서 춤을 추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정도전이 즉시 일어나 상의를 벗고 춤을 췄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전한다.
세조 역시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푸는 행사에서 잔치에 나온 종친과 대신들이 모두 일어나 춤추는 것을 즐겼다.
북쪽의 야인 정벌에 나선 군사들을 위로하는 행사와 관련해서는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다.
“세자가 술을 올리고, 구성군 이준(李浚)과 잔치를 모시는 종친과 여러 재상과 신하들이 번갈아 일어나 축원을 기원했다.
술이 반쯤 취하자, 이준·정인지·신숙주·한명회·홍윤성·홍달손에게 명해 일어나 춤추게 했다.
여러 장수와 호위군사에게 술을 내려줘 취할 때까지 마시게 했다.”
1455년 8월 16일 세조는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왕의 술상인 어상(御床)에서 내려와 왼손으로 이계전을 잡고 오른손으로 신숙주를 잡고는 서로 술잔을 주고받자고 말했다.
왕의 돌출 행동에 놀란 이계전 등이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자, 세조는 “우리는 옛날의 동료다.
같이 서서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느냐?”면서 다가섰고, 신하들은 어색해하면서도 세조의 뜻을 따랐다.
공신들과 자신이 동지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과 신하가 잔을 나누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어 세조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춤을 추게 했고, 화기애애한 술자리 분위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세조는 술자리를 신하들의 장점을 칭찬하는 장으로 활용하기도 했고 경복궁 사정전의 아침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신하는 물론, 호위군사들에게도 술자리를 베풀어주는 세심함(?)도 보였다.
“내금위(內禁衛)·사복(司服)을 궁중의 뜰 동쪽으로 불러 술을 내려주고, 거듭 북을 쳐서 입직(入直)한 군사를 뜰로 모이게 해 술을 내려줬다(1461년 4월 10일).”
세조는 술자리를 정치의 장으로 활용하는 측면 또한 강했다.
홍윤성 같은 측근 신하가 비리 혐의에 연루돼 탄핵을 받자, 세조는 직접 홍윤성을 불러 벌주를 내리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도록 했다.
술자리 과정에서 발생한 재미난 일화도 있다.
술이 거나해진 세조가 장난기가 발동해 신숙주의 팔을 세게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는 신숙주에게 자신의 팔을 세게 비틀어 보라고 했다.
취기(醉氣)도 있고 해서 신숙주는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었고 아픔을 느낀 세조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술기운을 이용해 자신을 능멸했다고 본 것이다.
원래 술을 잘하지 못했던 한명회는 멀쩡한 정신으로 상황을 목격했고, 신숙주의 앞날이 걱정됐다.
신숙주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면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한명회는 신숙주의 종에게 말해 그날만큼은 신숙주가 바로 잠을 잘 수 있도록 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는 사람을 시켜 신숙주의 동태를 살피게 했고, 신숙주가 잠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혹 맨정신인데 술을 빙자해 자신의 팔을 비튼 것이 아닌가 하고 괘씸해했던 세조는 신숙주가 정말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임을 파악하고는 분노를 거뒀다.
한명회의 기지가 신숙주를 살린 것이다.
술자리를 통해 벼락승진한 경우도 있었다.
이조참의로 있던 어효첨이란 인물은 “술에 크게 취했으면서도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조에 의해 바로 이조판서에 임명되는 행운을 누렸다.
이조참의는 ‘정삼품’ 벼슬로 위로는 이조참판과 이조판서가 있다.
어효첨은 음주 습관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이조참판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이조판서로 직행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술자리에서의 실수로 참형을 당한 인물도 있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김종서 제거의 행동대장으로 나섰던 양정(楊汀)은 세조가 왕이 된 후에도 주로 변방 근무를 했고 이에 불만이 쌓여갔다.
1466년 6월 평안도에서 돌아온 양정이 세조를 알현하자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서거정 등을 불러 사정전에서 양정의 노고를 위로하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서로 술에 취하고 분위기가 좋아지자 세조는 참여한 신하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했고, 이에 양정은 욱하는 심정에 술기운을 빌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가 이미 오래됐으므로, 오로지 한가롭게 쉬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세조 어진)
왕의 퇴위를 언급하니 술자리 분위기는 확 깨졌다.
세조는 충격 속에서도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어찌 왕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인가?”라며 승지에게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에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양정을 비판했고, 결국 양정은 술자리의 실수가 빌미가 돼 참형에 처해졌다.
술자리에서는 누구보다도 너그러웠던 세조지만 왕의 자리까지 언급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술자리를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갔던 세조. 술자리를 통해 깊은 정을 쌓았기 때문일까?
세조는 임종 직전에 원상제(院相制)를 만들어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같은 측근 공신들이 자신의 사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원상이란 ‘승정원에 출근하는 대신’이란 뜻이다.
세조는 17명의 대신들을 원상에 임명하고, 원상들은 4교대로 돌아가며 세자와 함께 국사를 결정할 것을 지시했다.
세조가 죽기 직전 마련한 원상제는 이후 세조의 공신 세력들이 예종과 성종 시대를 거치면서 훈구파(勳舊派)로 자리를 잡아가고, 그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결정적인 바탕이 됐다.
첫댓글 이런 일화도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