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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수도회] 의심과 절망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5,6ㄴ-8. 18.21ㅁ-25
† 복음 루카 7,18ㄴ-23
◈ 오늘의 묵상
일찍이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이토록
겸손하게 기다리던 메시아는 드디어 오셨지만, 요한은 감옥에서
그분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온갖 소문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왜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까? “예수님!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시지요? 이제 모든 일을 당신께 맡기고 저는 편히 눈을 감아도
되겠지요?” 이처럼 긍정적인 마음이었겠습니까? 아마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일찍이 당신을 메시아로
소개했는데, 막상 하시는 일을 전해 들으니, 도무지 메시아 같지
않습니다. 정말 메시아가 맞습니까?” 이처럼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까? 지난 주일에 묵상한
것처럼 요한과 예수님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아시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내가 아는 예수님과 실제의 예수님께서는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내가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법도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만들려는 예수님보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5,6ㄴ-8.18.21ㅁ-25
복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ㄴ-23
여러분들은 주먹밥 하나 만드는데 필요한 물의 양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주먹 크기의 주먹밥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물의 양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냥 주먹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벼농사를 지어 쌀을 추수할 때까지 필요한 물의 양까지
실제로 계산하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글쎄 자그마치
270리터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드럼통 하나에 보통
200리터를 담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거의 한 드럼 반 정도의 물이
있어야 주먹밥 하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먹밥 하나만 바라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처음부터 전 과정을 모두 생각하면 갑자기 주먹밥 하나도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따지고 보니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또한 필요 없고 쓸데없다면서
섣부르게 평가할 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어떤 것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섣부르게 내리곤 합니다.
‘저 사람 왜 그래?’, ‘저런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저
사람과는 도무지 맞지 않아.’ 등등의 말로 판단하고 또 단죄할 때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람의 이면에 있는 모습과 또 그
마음까지 생각했었는지 먼저 따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정말로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여쭙게 합니다. 그 역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정말로 구세주가
맞을까?’라는 의심을 품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넘어 그 뒤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사랑을 위해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사랑을 느껴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그 역시 겉모습만
바라보는 순간에 다른 이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의심의 굴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겉모습만을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때로는 단죄하는 모습으로는 절대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넓은 마음을 통해서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 하나 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절절하게 체험한다면
남을 바꾸려고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소중한 관계를 낭비하는
일은 없다(공지영).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겨울에 한 해가 바뀌는 이유(공광규)
우리가 겨울에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는 것은
일부러 하느님이 그렇게 계절을 가져다 놓은 것일 거야
사람들이 좀 추워하면서 반성하면서 긴장하면서
눈처럼 부드럽게 시련을 견디고 살얼음판도 좀 걸어 보라고
무엇보다 따뜻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른 사람의 난로가 되어 주는 사람인가를 시험하려는
하느님의 참으로 오래고 오랜 계획일 거야
추울 때 모든 것이 얼어붙었을 때 그 사람을 보려는 것이지
겨울에도 눈꽃을 피우는 나무의 의지를 보여 주고
얼음장 밑에서도 겨울을 잘 버티는 물고기와 수초도 보여 주고
일만 하지 말고 잠깐 멈추어 삶의 도구를 수리하라는 것이겠지
성장만 하지 말고 이불 속에서 움츠려 꿈도 꿔 보라는 명령이겠지
사람들이 함부로 헌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까 봐
염려가 되어서 하느님은 겨울에 한 해를 바꾸는 것일 거야
한 해가 바뀌는 이유. 여기에도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담겨 있군요.
조금 더 깊이 또 더 넓게 생각할 때, 하느님도 보인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갑곶성지의 성탄트리.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의심과 절망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기념 루카 7,18ㄴ-23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의심과 절망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인(마태 3,4) 요한은 신원의식이 뚜렷했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요한 1,2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마태 3,11)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요 심부름꾼으로 인식하고 자기 소명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무엇보다 더 먼저 하느님의 뜻을 중요시하며 실행하던 그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합니다(루카 7,19).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
흔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혼란과 의심에 떨어진 이들이 보도록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17,21-22)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7,23)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주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고,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이사 45,7),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45,21).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뜻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잠깐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동반자요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을 확고히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 어떤 풍파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고달파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을 때가 있지요. 아니
너무 고통스러워 고통스럽다가 말 할 여유조차 없이 극심한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지요. 그럴 때 믿음이 저 뿌리부터
흔들리고 의심이라는 암세포가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 지극한 눈길로 나를 지켜보십니다. 내가
주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통째로 내팽개쳐버리는 그 고통과
한숨소리의 한복판에도 그분께서는 함께하십니다. 함께하시며 나와
함께 신음하고 함께 십자가를 져주십니다.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은 죄가 많아서도,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지 않거나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인간의
잣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주님의
사랑은 나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의 선물을 주시며
사랑으로 품어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의심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는데서 시작됩니다. 사랑이 약해지면 두려움이 싹트게 되지요.
이것이 우리 삶을 망치는 암세포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영혼의 질병과 악령에 시달리고
눈먼 나를 해방시켜주실 수 없음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고히 믿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고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희망 달리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서울]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 7,18ㄴ-23
군대에 가면 훈련을 받습니다. ‘제식훈련, 총검술, 각개전투, 유격,
구보’와 같은 것을 반복해서 합니다. 군인의 자세가 몸으로 베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훈련에서 흘린 땀 한 방울이 실제 전투에서는 피 한 방울과
같습니다.’ 육체적인 훈련과 더불어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군인의 길, 군인 정신, 군가’와 같은 정신교육입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이 있어야만 두려움 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외웠던 군인정신과 군인의 길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군인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을 견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나는 영광스런 대한민국 군인이다. 하나 : 나의 길은 충성에 있다.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하나 : 나의 길은 승리에 있다. 불굴의
투지와 전기를 닦는다. 하나 : 나의 길은 군율에 있다 엄숙히 예절과
책임을 다한다. 하나 : 나의 길은 단결에 있다. 지휘관을 핵심으로
생사를 같이 한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문득 생각합니다. ‘사제의 길, 사제의 정신’은 무엇일까? 사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이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나라는 아닙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표징과 가르침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타인의 십자가도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는 말로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보여 주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 구원의 역사에 한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목동들은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재능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시메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2016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곧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소중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능력,
재능이 다를 것입니다. 배움이 다를 것입니다. 직업도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후회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남은 시간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본연의 모습을 찾아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 7,18ㄴ-23
본연의 모습을 찾아라.
덕이 많은 수도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수사님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집에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수사님을 찾아와서 “우리는 수사님이 전해주는 하느님의 말씀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전해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사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천하지는 않고 늘 새로운 것을 듣기만 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미 들은 것을 가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그러고는 입을 닫으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한 마디의 말씀이라도 부여잡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루카7,21).해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근원의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대로 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대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언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시고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의탁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오시기로 되어있는 주님!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가해 12월14일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 7,18ㄴ-23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하고 묻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을 예고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그 오실
분은 종말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이 ‘오실 분’임을 보여주는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21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당신의 권능과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셨다. 그리고는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22절) 바로 옛날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이루지는 것, 즉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들은 것을, 여러 시대에 예언자들이 예고한 일들이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 유대인들이
그분을 의심한 것은, 신비의 깊이를 몰랐거나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께서 당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지고 바위에 부딪쳐 쓰러지고(참조: 이사 8,14; 로마 9,33),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참조: 루카 20,18)
그들은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을 보고도 그분께 돌을 던지며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요한 10,37-38)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곧 그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도 역시 이 세례자 요한의
질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가 변하는 기적을 이루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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