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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묵상글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물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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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서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저에게 건네시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제가 답해야 할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제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께서
저를 알고 계시니
굳이 답을 바라시지 않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일 수 없는
제가 결코
답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처럼
되어감으로써
제가 서서히 답할 수 있는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당신처럼 될 수 있으니
당신을 따르라고
저를 애틋하게 부르시는
물음 아닌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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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연중 제25주 금요일 >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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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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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 금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09238
김레오나르도 2022.09.23 04:53
- 줄탁동시(啐啄同時)
오늘 코헬렛서의 말씀은 때는 다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때의 주인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리고 정해진 때를 거슬러 우리가 뭣을 하는 것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대표적으로 정해진 것이, 바로 우리가 태어날 때와 죽을 때입니다.
태어날 때를 내가 정하지 않았고 죽을 때를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태어나고 죽을 때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8월 중하순에 배추와 무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것을 지금 뿌리거나 10월에 뿌리면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그러면 누가 이때를 정한 것입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 코헬렛서의 가르침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가운데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어리석기에 그럴 수도 있는데
교만한 사람은 인간이, 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연의 순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어제 어떤 할머니를 만났는데
마치 오늘 이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것 같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냉담 중이신 줄 알았는데 말씀을 계속 들어보니
뉴에이지 류의 자연 근본주의 이단에 빠져 계신 것 같았습니다.
긴 얘기를 짧게 하면, 인간의 생로병사가 다 자연에 따른 것인데
과학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하신 거라고 인간이 믿는 것일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렇지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증명된 것은,
아는 것이고 알면 되는 것이지 굳이 믿을 필요까지 없겠지요.
그런데 얘기를 다 듣고 보니 당신이 열심히 믿었다는 것이
실은 열심히 믿고 청했다는 뜻이었고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셨으니
하느님은 안 계시거나 안 들어주시는 분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거였습니다.
한 마디로 내 뜻대로 안 들어주시는 그런 하느님은 안 믿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무튼, 때의 주인,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하느님께서 때를 정하시는 데 우리의 인간의 뜻은 없습니까?
나의 때, 우리의 때를 정하실 때 독재자나 폭군처럼 당신 마음대로이십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때는 우리의 뜻과 우리가 생각하는 때까지
다 포함하는 때라고 믿는 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애쓴 것이 아무 보람 없게도 하시고,
우리가 고생하도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그때는, 사랑의 때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끼 닭이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는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나오는 데 있어서 이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지 따로 이뤄지면 안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제자의 때를 잘 알고 스승이 제때에 당겨줘야지
제자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도 빨리 깨닫게 하려고 미리 억지로 잡아당기면
제자가 깨닫지 못하거나 심지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그 아름다운 줄탁동시를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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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연중 25주 금요일-인생무상
http://www.ofmkorea.org/152529
김 레오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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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잡아다 주는 물고기를 먹었던 아들 곰은 자기 아빠 곰이 최고라고 늘 외쳤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를 둔 아들 곰은 힘든 사냥에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다른 아빠 곰과 달리 직접 사냥하는 방법만 가르쳐주냐고 했지요. 그래도 아빠 곰은 그때마다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늙었고 자기 힘으로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물고기를 받아만 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아들 곰은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냥을 배운 아들 곰은 아빠를 위해, 자기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새끼를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훈육법은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압니다. 계속해서 우리 삶 안에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불평불만만을 이야기할 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뿌듯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광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신 뒤에,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꽃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시밭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으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금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영광의 길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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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장 자크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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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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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으신 이’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임금으로 정하신 분"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예수님에 대한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길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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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도 불가항력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휴스턴, 오클로하마, 포트워스, 오스틴에서도 참가해 주었습니다. 160명이 참가 신청해 주었습니다. 경품도, 티켓도 잘 마련했고, 골프장도 멋진 곳으로 예약했습니다. 아쉽게도 일주일 전부터 확인했는데 대회 당일에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비가 내리는 중에 골프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참가해서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중에도 끝까지 함께 해준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행사 준비를 위해서 애써 주신 준비위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겁니다. 달라스 날씨가 무더운데, 비가 내리니 오히려 시원하고 좋았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골프대회를 통해서 수익금은 필요한 곳에 나누어 주고, 교우들은 친교를 나누고, 교우가 아닌 분들에게는 교회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까르페디엠(Carpe Diem)'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라틴어인 이 말의 문자적 뜻은 “현재를 잡으라.(Seize the day)”는 말입니다. 즉, “현재를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라.” 그리고 “오늘을 견뎌라”는 속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현재를 견뎌냅니다. 오늘은 그날을 준비하는 유일한 기회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이 말이 다시 소환 된 것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라고 말하면서입니다. 저는 이 말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골프대회 날, 비가 오는 걸 원망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계절을 바꿀 수 없다면 바뀌는 계절을 즐기는 것이 좋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바람은 별로 없었고, 내리는 비도 과하지는 않았기에 골프대회를 잘 마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가 내리니 오히려 차분해져서 좋았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말에서 겸손함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까르페디엠이라는 말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도 삶의 지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고통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으로 왔으니, 이 세상을 떠날 때 빈 몸으로 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평가와 세상의 가치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엘리야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든, 세상 사람들이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못한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악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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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베드로 사도가 백 점짜리 답을 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칭찬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주님께서 왜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알려지면 사람들이 모여들까 봐? 사람들이 왕으로 삼을까 봐? 아니면 제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까 봐?
알리지 말라는 이유는 이것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하고 그 말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것처럼 제자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성은 언제 됩니까? 바로 그리스도가 고난의 길을 지나 부활이라는 영광을 얻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보고 체험하고 그리스도란 세상의 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하늘의 왕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얻었고 하늘나라의 티켓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이미 시작된 신앙의 길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길입니다. 언제 끝납니까? 죽으면? 아닙니다. 주님과 같은 고난의 길을 가고 진정한 영적인 부활,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날 때 우리의 신앙의 길을 끝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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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는 것이 싫습니다.
사랑은 나이 들지 않습니다.
언제나 싹트고 있지요.
-블레즈 파스칼-
나이가 들면 감정이 말라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없어진다고 합니다.
기쁠 때 웃지 않고 슬플 때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가 들은 이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위의 말이 늘 제 마음속에 요동치기를 희망합니다.
언제나 생동감 있는 사랑이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웃지 않고 울지 않는 순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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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때를 아는 지혜와 겸손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나의 사랑, 내 성채,
나의 산성 구원자,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시편144,1-2)
얼마 전에 이어 제46차 해외 사목 여정차 9.26-9.29일까지 룩셈부르그와 벨지움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든 때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적절한 때에 가톨릭 교회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물하셨고, 또 당신의 때가 되자 해외 사목방문을 하게 하십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주옥같은 제목들입니다.
“섬김, 선교, 그리고 기쁨은 복음의 핵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룩셈부르그는 평화를 위한 협력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교황은 새로운 인문주의를 퍼뜨리기위해 룩셈부르그를 방문한다.”
“교황의 벨지움 방문은 ‘들음과 만남’의 계기가 될 것이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때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생애를 압축할 때,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 어느 때에 있습니까? 이런 때에 대한 확인이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은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때에 대해 적절한 가르침을 줍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고,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때가 될 때까지 겸손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때에 최선을 다해 협력하며 노력하는 것도 믿는 이들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고 우리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때요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다 좋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시도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함께 계시기에”<2023.10.21.>
그러니 주님이 늘 함께 계시고 모든 날이 다 좋기에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충실하며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다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그날에 최선을 다하며 됩니다. 하느님은 때의 대가이자 달인입니다. 금세기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물하신 하느님은 오늘 기념하는 16세기 모든 자선 단체의 수호성인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교회에 선물하셨습니다.
빈첸시오는 프랑스 말로 ‘승리자’라는 뜻이라 하는데 정말 영적승리자로 사셨습니다. 물론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분의 전생애가 온통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어려부터 가난한 이를 돕기를 무엇보다도 즐겼으며 자기 천성을 잘 보전하고 지켜서 자선과 박애 사업에 일생을 송두리째 투신했습니다. 루이사 드 마릴락은 최초의 수녀원장으로 모신 사랑의 자매회도 설립했습니다.
성인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라고 가르쳤고, 이것이 존경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이유이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갈 때는 겸손과 소박과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았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줄도 알았습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빈첸시오는 아주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딱딱하고 쌀쌀하며 거칠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나, 은총으로 온화하고 애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 다른 이의 요구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성인은 1660년 9월27일 오늘 잠자듯이 79세 나이로 고요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교황 글레멘스 12세는 1737년에 시성되었고, 레오 13세는 1885년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제때에 이뤄진 일입니다.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 또한 때의 달인이자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혼자의 깊은 기도가 때를 아는 지혜를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도 필요시 혼자 깊이 기도하신 주님이요 오늘 복음에서도 기도가 끝나 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확인시킵니다.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받아낸후 즉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면서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내다보며 늘 오늘 지금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의 때를 사신 주님이셨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았던 베네딕도 성인 역시 언제나 하느님의 때를 사셨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모두 순례여정중 하느님의 때를 살게 하십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오늘도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면서, ‘꽃같은 하루 꽃같이, 시같은 하루 시같이’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피시나이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헤아리시나이까?
사람이란 한낱 숨결 같은 것,
그 세월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사옵니다.”(시편144,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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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9,20)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다
다른 사도들도 일고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처럼 그분의 본성과 이름을 함께 고백한 그는 모든 덕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만을 고백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나심에 대해 따져 묻지 않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언제 어떻게 태어나셨으며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인간의 사고라는 부실한 도구로 자세히 알아내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물음은 믿음을 북돋기보다는 걸림돌임을 알았기에,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드님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요한 3,35 참조).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한 귀족이 먼 낯선 나라로 갔다가 더 부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루카 19,12 참조)는 구절을 접하게 됩니다. 복음서의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게 됩나다. “나를 따르지 않고”, 자기를 여의지 않고, 자기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 놓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자기를 위해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자야말로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무를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하느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고, 우리의 뜻을 항상 하느님의 뜻 안에 두고,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난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참된 자기에게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선 자체와 선한 것들은 영혼에게 안식을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내게 아무 뜻도 없이 무언가를 주신다면, 나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뜻하셔서 내게 무언가를 주신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는 그것에 만족하겠습니다.(248)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아우구스티노는 서방 교회 교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뛰어난 천재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다. 큰 강이 수많은 작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듯이 그는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들이 추구하고 가르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명확한 인식과 절대자와의 신비적 일치를 추구했고,육체와 물질을 경시한 마니케이즘의 어둡고 부정적인 비관주의를 추구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은총으로 충만한 하느님께 대한 복음을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서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교부를 공부하는 사람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서방 그리스도교의 내적 요소들을 모두 살펴보게 된다. 니체는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을 읽고 난 뒤 자신의 친구 오버베크(Overbeck)에게 “나는 그리스도교의 뱃속을 들여다보았네”라는 글을 써 보냈다. 그의 이 판단은 그리스도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서방세계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노는 354년 11월 13일에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수크 아라스라고 불리는 도시인 타가스테의 평범한 소시민 가정으로 태언났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었고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의 아머지 파트리치오는 아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것이 없다. 그러나 열성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가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겼는가에 대해서는 고백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가 어머니와 가진 외적 관계에 따라 그리스도교와의 관계가 결정될 정도였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멀어지면 그리스도교 신앙과도 멀어졌고, 깊은 관계에 들어가연 그만큼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관계도 깊어졌던 것이다(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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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카 9,20)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는 이 단순한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복음서를 집필한 네 명의 복음사가들은 후대 사람들의 의문에 대해 많은 정보나 힌트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거의 95%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구원과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12,8)
지금 이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먼저 G.K. 체스타톤의 다음 글을 읽으면서 대답을 위한 힌트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키가 크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뚱뚱해서 싫다 하고, 어떤 이는 그가 너무 말라서 안됐다고 한다. 누구는 그의 피부색이 너무 검다고 말하고, 누구는 너무 창백하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우리는 황당해한다. 이런 경우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 그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일지 모른다. (...) 간단히 말해서 어쩌면 이 비범한 존재야말로 정말 평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장 정상적이며 중심을 지키는 사람 말이다.』 이어서 윌리암 블레이크의 다음 글 또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내가 보는 형상과 전혀 반대라네. 그대의 그리스도는 그대처럼 매부리코, 나의 그리스도는 나처럼 들창코, 둘 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건마는 그대가 검정이라고 읽을 때 나는 흰색이라고 읽네. 』
위에 언급한 내용을 마음에 간직해 놓고 잠시 상상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파트가 높이 서 있어 이젠 거리를 볼 수 없지만,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입니다. 거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손으로 햇빛을 가리키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건물에 가려서 그 사람이 무얼 가리키고 있는지 자신의 방 창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오신 지 2000년 넘은 오늘이란 시점,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창가에 서 있는 어떤 사람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윌리암 블레이크의 시에 잘 드러나듯이, 우리는 때론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만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인 ‘바버라 터크만’이라는 분은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규칙이란 다름 아닌 『앞으로 빨리 감기를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역사학자는 그 역사적 사건의 분위기를 재창조해서 『독자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는 터크만의 주장과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빨리 감기’의 시각을 견지한 채, 복음서를 연구하고 가르쳐 왔는지 모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우리 모두 ‘앞으로 빨리 감기’ 식의 통상적인 대답이 아닌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듣고 보고 느끼고 만져 보면서’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9,18)라는 표현처럼 무엇보다 먼저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빨리 감기식의 영혼이 없는 주입된 대답이 아닌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만남을 통한 살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9,20)하는 질문은 관계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으며, 또한 내가 누구인지, 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믿음의 핵심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다,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12,8)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모르지만, 아빠 하느님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저희도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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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재림하신 그분께서 묻기 전일지라도 /
박윤식 [big-llight] 2024-09-26 ㅣNo.176297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대답했다. “세례자 요한”, 또 어떤 이는 “엘리야”, 또는 “옛 예언자 한 분이 살아나셨다”하고 답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나는 고난을 겪고 원로와 사제,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야 되살아나셔야 한다.”라고 이르셨다.’
만약 이 시각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우리는 과연 그분을 누구시라 나름으로 답할까? 믿음의 정도로 보면 정작 쉬운 물음이라지만, 답하기는 그래도 쾌나 어려울 게다. 그러면 ‘나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는가?’라고 스스로 물어 보면 어떨지? 이건 생각할수록 더 어려울 게다. 이렇게 자신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이처럼 날마다 눈 뜨고 살면서도 내가 나를 잘 모르는데, 어찌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잘 알랴?
그러면 반대로 예수님께 ‘나를 누구라는지’를 직접 여쭤보면, 그분께서는 어떤 답을 주실까? 우리야 아마도 여러 추측을 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간단히 나에 대해서 알려 주실 게다. 이 세 물음은 어쩜 같을 수도. 그래서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알면,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고, 내가 정말 누구인지를 알면 그분도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보속하시려고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운명’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어디 한번 바꾸어 보자. 우리는 우리가 한 일에서 스스로의 역할이 미소하다는 걸 알고, 또한 자신이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스스로 살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평화를 찾는지를? 또 우리 삶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느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보자. 다른 일을 모두 다 처리하고 나서야 하느님을 찾는지, 아니면 먼저 하느님을 기억하고서 그분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일을 하는지의 그 우선순위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시각에도 이 질문을 우리에게 하신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는 원로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만 한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참된 메시아이신 당신께서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이 우리에게는 정녕 어떤 길인지 일깨우신다. 십자가의 저 예수님께서 이 시각 되묻는 이 물음은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할 게다. 어쩌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도, 때로는 그분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운명이 두려울 수도. 그렇지만 그분 길을 걷겠다고 세례 받은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그분을 늘 바라보는 삶이어야 한다.
어쩌면 십자가의 삶을 원하지 않는 이는 여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그리스도로 바라볼 때만 스스로도 그리스도가 될게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 그 시각, 우리는 온전히 드러나실 그분을 꼭 뵈올 게다. 그때에 우리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해야만 한다. ‘너희는 나를?’이라 그분께서 되묻기 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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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에서는 코헬렛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셨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고에 대한 갚음도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일의 “때”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한지, 지금 일어난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인간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일이라고 쉽게 판단을 하지만, 그 일이 장차 가져올 모든 결과를 다 알고서 하는 판단은 아닙니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 보면 그 일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 행한 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가져올 모든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서는 행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코헬렛의 신앙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코헬렛을 의심스럽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와 코헬렛의 차이는 우리가 큰 비극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코헬렛은 훨씬 작은 일에서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헬렛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교만을 버립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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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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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해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말씀드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신데
각자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 표현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계를 생각한다면
또 다른 생각해 볼거리가 생깁니다.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겉으로는 관계를 맺지만
속으로는 세례자 요한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상대방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나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조금은 다를 것입니다.
아니 그가 비록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어도
그가 생각한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그리스도가 달라서
즉 그는 화려한 그리스도를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 앞서
수난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기에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인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지
고백하는 것이며
그런 나는 누구인지
드러내는 순간이 됩니다.
신앙 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만큼
나 자신도 누구인지 잘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신앙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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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빈첸시오 드 폴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눠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무더덤한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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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에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 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 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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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 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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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이 이야기를, 복음서를 기록할 때의 시점에서, 그리고 사도들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알아듣지 못했고, 그리스도이신 분이 왜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영적인 구세주’로 믿긴 했지만,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의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할 때에는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 재림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일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일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여기서 ‘때’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공적으로 처음 선포한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4.46-49).”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도 부족했고, 용기도 부족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때가 되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2) “너희가 확신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일은, 머리로 생각하는 믿음을 고백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도 믿음이긴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 증언할 정도로 믿는 것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하게 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들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경우,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을 겪었는데(루카 1,20), 그 일은, ‘믿음’이 없으면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입니다.>
3)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수 없습니다.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 증언에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의 ‘사도들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말재주’로 하지 않았습니다.
‘삶’으로 했습니다(사도 2,42-47).
물론 설교도 했지만, 그들의 설교는 ‘삶’을 바탕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4) “너희는 나에 대해서 증언할 때, 부활만 말하지 마라.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함께 말하여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들만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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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18-22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인하려고 들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제자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두고 목 베여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거라고, 엘리야 예언자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돌아온 거라고, 모세가 자기 뒤에 올거라 미리 예고했던 ‘그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등장한 거라고,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군중들이 자기 스승님을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꽤나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생각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그 손이 가리키는 달은 보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예언자의 모습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수제자인 베드로만은 자기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알아본 겁니다. 그가 세상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의 눈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라는 부분입니다. 어떤 말 뒤에 ‘의’가 붙으면 소유격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근동지방에서는 누군가의 아들을 가리킬 때 ‘아들’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기보다, 그 아버지의 이름에 소유격 접미사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들이 그 아버지께 속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께 속한 존재이니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게 당연히 수행해야 할 ‘소명’으로 주어지지요.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소유인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고 따라야 함을.
그런 점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의 신원에 대한 말씀 뒤에, 당신이 겪으셔야 할 수난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신 겁니다.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슬프고 괴로운 일을 떠맡으신다는게 아닙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기에 사랑에서 우러나는 순명으로 기꺼이 따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예수님의 순명과 희생을 어여삐 보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믿고 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런 믿음과 희망을 지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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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많은 고난과 배척을 받아 ”
이사야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기원전 745-695년까지
50년간 활동한 위대한 예언입니다. (역대하 26,22)
백년도 아니고 6백 년 이상의 시대에 어떻게 수난 받는 메시아 대한 예언을 할 수 있을가요?
이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완성되지만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예언자는 그 고통의 의미가 구원으로 이어지리라고 예언했고 이 사실이
예수님에게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종’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예언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메시아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는 대대로 이어집니다. 수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서
이미 예언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뜻보다는 세상의 기대가 더 컸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도 제각기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기도하시다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의 소문에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중에 한 분으로
여긴다고 대답합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대답합니다.
다행이도 제자들은 스승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주님께서 당신이 과거 이사야가 예언했던 ‘수난 받는 메시아’이심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22절)
사람들은 예언자를 통해서 수난 받는 메시아를 들었지만 그들은 세상의 판단에
젖어 있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다분히 정치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모습,
빛나는 자리에서 수난보다는 떠받들려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도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힘 있는 메시아 덕분에
나라도 되찾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도 닦아 줄 늠늠한 메시아를 그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무참이 수난을 받는다면 받아들이겠어요?
한 마디 말로 무시당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제어 어떻게 얻어맞고
무수히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어요?
그리고 이 예언도 아주 먼 옛적에 전해진 것이고 거기다가 기대까지
무뎌지고 관심도 없는 지경으로 흘러온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구세주의 수난의 성취를 이루시는 때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 제자들마저도 기대하지 못하는 수난과 죽음에 대한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흙속에 묻혀야 된다고요.
사람들에게도 사실 땅과 같은 아픔이 구원의 역사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과 함께 ‘쓴 잔’을 마실 줄 알아야 하겠지요?
주님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를 본다면 ‘이유 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때로 겪는 기분 상하는 말 한마디도, 수모로 여길 수 있는 무시당하고, 터무니 없는
모함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길로 가셔야 하지만 나는 무시당해서도 안되고 마음이 상해도
안 되는 ‘절대적 이기’와 ‘오만’을 떨고 사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고통 받으셔도 되지만 나는 절대로 안되는 오늘의 나의 모습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수난을 또한 바라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통의 신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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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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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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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교만을 버리고 겸손으로 사는 삶
<2024.9.27>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4:1~16절)
❝교만을 버리고 겸손으로 사는 삶❞
❚ 교만을 버리고 겸손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설 때에, 아름다운 삶, 승리하는 삶이 됩니다.
✔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7절).
남 유다의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이십오 세에 왕이 되어 이십구 년간 다스렸습니다. ‘아마샤’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강하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해 행했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행한 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는 같지 않고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을 하고 있었습니다(1~4절). 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아마샤는 부황을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서에 기록된 말씀(신 24:16)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6절). 아마샤는 에돔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고, 셀라를 차지하고 그 이름을 욕드엘이라고 불렀습니다(7절). ‘욕드엘’은 아마샤에 의해 정복된 후 에돔의 요새인 셀라에 새롭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더라도 정직히 행하며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때 기뻐하시며 그러한 노력을 하는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아 있는 무기력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처한 환경에 묶여 할 수 없다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믿음 없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지금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애쓸 때, 그것 또한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가 크고 화려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진실하게 교만을 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8~11절).
그때에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서로 직접 만나 힘을 겨루어 보자고 제안을 합니다(8절). 아마샤는 에돔을 치고 돌아와 자기 군대의 힘으로 승리한 줄로 여기고 교만해져서 하나님께는 묻지도 않은 채 군사적인 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유다 왕 아마샤를 ‘레바논 가시 나무’에, 그리고 자신을 ‘레바논 백향목’에 비유하면서 둘은 동등한 위치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즉 가시나무의 아들과 백향목의 딸이 결혼하는 것은 당치 않은 것이라고 하면서 유다 왕이 자신과 대등한 관계가 아님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입니다(9절). 또한 요아스는 아마샤가 에돔에 대한 승리로 그의 군사적인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꼬집어 비판합니다. 그리하여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10절)라고 위협하면서 아마샤의 도전을 무시합니다. 아마샤가 듣지 않자, 이스라엘의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를 맞아 유다의 영토인 벧세메스에서 대치하였습니다(11절).
교만함이 삶을 지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불신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형통해 보이고, 계획한 대로 일이 잘 되어 간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가 선 줄로 착각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내 속 사람을 조명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하는 사람이며,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잠 16:18)이라는 말씀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을 버릴 때, 하나님과의 온전한 동행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왔던 자신을 회개하며, 진실하게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삶이어야 합니다(12~16절).
아마샤 왕은 이스라엘 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맞서서 유다의 위세를 증명하고 했습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신감이 지나쳐 자만심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전투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압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군사력에 있어서 유다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샤는 에돔을 정벌한 자신감으로 이스라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에 이르기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의 보물 창고에 있는 금과 은과 모든 그릇을 약탈하고, 사람까지 볼모로 잡아서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12~14절). 요아스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누린 권세와 유다와 싸운 일에 관한 것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고, 요아스를 이어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15~16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허세에 빠져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교만은 우리의 삶을 위기에 처하도록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샤는 교만했고, 그래서 근거 없는 자신감에 빠져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결국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파괴하는 독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하게 되면 믿음의 눈을 뜰 수 없어 우리의 신앙과 삶은 결국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혹 우리 자신이 교만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서 있다면, 겸손히 내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승리의 길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겸손하게 내 자신을 낮추므로 아름다운 삶,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자신을 탓하며 주저앉아 있지 말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물질이라는 우상과 명예라는 우상, 그 어떤 우상이든 모두 버리고, 겸손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아름답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4:1~16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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