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시황의 중국 통일
(1) 이사가 등장하다
이사는 진시황 시대를 장식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이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철학을 보자. 이사는 자신의 경험담에서 화장실의 쥐보다 창고의 쥐가 훨씬 더 살이 찌고, 복이 있어 보이더라. 그는 깨닫는다. ‘그렇지. 사람은 노는 물에 따라 땟깔이 달라진다.’
그는 한비자와 함께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한비가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느끼고 열등감으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한비가 진시황에게 찾아와서 같이 일하게 되었다.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는 과정에 두 사람은 의견이 달랐다. 이사는 약소국 한부터 치자고 했고, 한비는 강한 제니라부터 치자고 했다. 이사가 모함했다. 한비는 한의 왕자임으로 자신의 나라를 보호하려고 개소리를 한다고 하여, 진시황이 사약을 내리도록 했다. 이 일로 이사는 후대 사람들로부터 무지하게 욕을 먹는다.
진시황이 6국을 하나하나 병합하는 과정과, 그때마다 중국사에 이름을 남기는 영웅호걸들이 등장한다. (그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3) 진시황의 업적
(1) BC221 - 중국 통일(6국을 병합)
(2) 만리장성 축조
(3) 시황제 – 군현제 실시.(봉건제도 정비)
(4) 인재 등용(6국 출신을 모두 등용)
(5) 문자, 화폐, 도량형, 도로를 통일하다.
진시황은 야심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사람이었다. 중국 통일도 그의 야심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자신을 신격화하고, 신성화하여 정책을 편 것도 그의 야심이 만들어 냈다. 스스로 시황제라 한 후에 모든 일을 자기 마음 먹은대로 시행했다. 위에 열거한 업적들이다. 그가 봉분제에서 군현제(그가 처음 시행한 것은 아니다.)로 바꾼 것도 자기 정책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일벌레였다는 평도 듣는다. 결단을 내리려면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소문이며, 진정서까지 일일이 자신이 확인하였다고 한다. 결과물이 중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었다. 일부 학자는 과로가 그의 수명을 단축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이 6국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각 나라는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중국 문자는 그림에서 따온 갑골문이 뿌리이다. 청동기에 새기는 금문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은 자기들이 입맛에 맞도록 조금씩 변형했다. 여기서 다시 대전(大篆)이 만들었다.
진시황은 대전을 더 간략하게 하여 소전(小篆)을 만들어서, 문자를 사용기 쉽도록 하였다. 중국의 문자 발달을 보면, 소전보다 더 사용하기 좋도록 간략하게 하고, 규격화한 문자 예서가 나타난다. 진시황 때에 예서의 기미도 보인다고 한다.
화폐와 도량형, 차바퀴의 간격을 통일한 것은 물품의 유통에, 즉 경제 통일에 이바지 했다.
만리장성은 몽염 장군과 맏아들 부소에게 맡겨서 축조토록 하였다. 북방의 흉노 침법을 막아서 중국민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은 백성들의 백골로 쌓았다고 할만큼 백성들의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통의 상징물은 나라를 잡아 먹는다.
4) 불로장생과 진시황
진시황의 악정으로 꼽는 것 중의 하나가 불로장생을 추구한 일이다.
방사들의 꼬임에 빠져서 불로장생 약을 구하려 한 일이다. 불로장생 약을 구하는 일이 진시황 치세 후반기에 중요 사업이 되었다. 방사들은 자신의 출세와 부를 얻을 목적으로 진시황을 꼬드기고, 속이고 이용하였다.
첫 번 째 사기군이 서복이다. 서복은 불로장생 약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어마어마한 국가의 지원을 받고, 동해바다로 선남선녀 3000을 데리고 떠났다. 그들이 닿은 곳이 제주도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천재적인 사기군이고, 진시황은 사기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자였을까. 그 시대는 신선사상이 유행했고, 사람들이 믿었다.
또 한 사람의 천재적인 사기군이 나타났다. ‘노생’이다. 약을 구하지 못한 것은 나쁜 사람이 방해하고, 악귀가 기로막기 때문이라 하였다. 노생이 약을 구하지 못한 핑계(사기)를 진시황은 죽을 때까지 믿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뜯어갔다.
이때 서복이 나타났다. 봉래산에서 약을 갖고 오지 못한 이유는 바다에 어마무시하게 큰 괴어가 방해하기 때문이라 했다. 진시황은 괴어를 퇴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서복은 다시 엄청난 국가의 지원을 받고 동해로 출발했다. 일본에 닿았다는 말도 있고, 속임수로 아예 출발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1년 뒤에 진시황이 죽는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불로불사를 정말 믿었을까. 아니라고 한다. 그는 생전에 많은 비용을 들여서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병마총을 보시라.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가.
5) 분서갱유(焚書坑儒)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대표적인 폭정이다.
진시황 34년에 아방궁에서 대대적인 잔치가 벌어졌다. 대표적인 학자들인 박사 70명이 줄을 서서 아부성 발언을 쏟아냈다. 진시황은 아부성 발언인 줄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때 박사 순우월이 화가 나서 말했다. ‘아부성 말은 폐하에게 도움을 주는 말이 아니다’라며 사자후를 토했다. 순우월은 진시황이 기분나빠 할 말만 골라서 했다.
“폐하는 형벌을 통해서 살인을 즐깁니다.” 등등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진시황은 (처음에는 방사들을 조질려고 했으나 눈치채고 모두 도망가버리자) 유생을 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을 한 후에 죄목을 ‘혹세무민’이라 하여 생매장해버렸다. 백성들도 유가들을 혹세무민하는 자로 받아들였다면 문제는 쉽게 끝이 났을 것이다. 여론은 오히려 나빠졌다.
(생매장한 인원이 700명이니, 70명이니, 460명이니 한다. 460명 설을 가장 많이 인정한다.)
==> 사실은 박사들은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분제로 되돌릴 것을 주장하는 보수세력이었다. 처음에는 사상통제의 방법으로 분서만 했으나 여론이 좋아지지 않자 사람도 붙잡아다가 처형앴다. 갱유의 기록도 사마천은 사기에 ‘술사를 파묻었다.’고 기록했다. ‘술사’는 유생 중에서도 음양오행을 주장하는 사람을 말했다. 사마천은 진시황으로부터 70-80년 후의 사람이니 비교적 정확하리라고 본다.
술사를 도교에서는 ‘방술하는 사람’을 말하고, 유가에서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말했다. 이런 이유로 갱유된 유가는 순수한 유생이 아니었으리라는 주장이 나온다. 반고가 저술한 ‘漢書’는 사마천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동한 시기가 되면 ‘분서갱유’라는 말을 정식으로 사용한다. 이후, 남북조 시대의 책(위굉이 쓴 책)에는 분서갱유의 설명에, ‘유학자를 파묻었다’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갱유’를 말할 때는 사마천의 ‘사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
근대에 와서는 어떻게 평가할까.
진시황이 영토 뿐아니라 경제, 사상까지 통일해나가자 가장 보수적이었던 유가들이 진시황의 통일정책에 태클을 걸었다.(주의 봉건제도로 되돌리자는 주장은 자신(유가)들의 이익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사상통일이 절실한 정책과제인데 유가의 주장은 대표적인 분파주의 주장이다. 분파주의 제거가 필요했다.
순우월은 ‘도의’(공자의 사상이다.)라는 무기를 들고 진시황에게 도전했다. (법가 통치는 잔혹하니 어쩌니 하면서. 그러나 법가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진나라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승만 시대의 용공주의자나 같다.)
분서갱유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사마천이 사시를 쓸 때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가의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고 했다. 유가 책을 깡그리 없애버린 것이 아니고, 민간에서 유가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였다고 말한다. 어쨌거나 민간에서 소유하는 서경과 시경을 거두어서 불태우므로 사상 통일을 이루려 한 것은 분명하다. 공공 도서관에 보관한 책은 그냥 두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사상 통일을 위해서 시행한 분서갱유가 오히려 반대 세력을 더 키웠고, 결국은 자신이 반대 사상에 의하여 망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니 정치란 힘이 있다고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 진시황이 죽다.
진시황의 죽음은 의미가 있다. 본인이 죽음을 한사코 거부한 일은 신선사상이라는(황로학) 시대 사상과 관계있다. 또 그의 죽음으로 중국 역사가 소용돌이치게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다섯 번의 천하 순유 즉 순방길에 올랐다. 순방길인 평원린에서 병을 얻어 사구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지만, 순유를 떠날 때는 건강했던 그가 갑자기 죽자 온갖 의혹들이 꼬리를 물었다. 진시황이니 만큼 정치적 파장은 너무나 클 것이므로 그의 시신이 함양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죽음을 숨겼다.
그의 죽음에 따른 정치적 이야기만을 보자. 순방길에는 둘째 아들 호해와 승상 이사, 그리고 옆에서 시중 드는 환관 조고가 수행했다. 진시황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장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서를 써서 조고에게 주었다.
수행한 조고를 중심으로 정치적 계산이 깔리면서, 조고가 중심이 되고 이사가 동조함으로 황위 계승자를 호혜로 조작하였다.
시신을 수례에 태워 함양궁으로 돌아올 동안 살이 썪어 생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방궁에 도착하자 유언서를 공개했다. 황위는 호혜에게, 맏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는 자결을 명했다.
호혜가 2세 황제가 되었으나 자격지심으로 황음무도해졌고, 권력은 조고와 이상의 싸움에서 조고가 승리하여 조고가 전횡하였다.
이렇게 진시황이 피땀으로 일군 나라를 거덜내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