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0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나이다.
죄로 얼룩진 죄인이오나 주의 긍휼을 바라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 앞에서 살기 원하여 나왔사오니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옵소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 안에 주의 영을 풍성히 부으소서.
주여,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옵소서.
주의 성령을 떠나지 마옵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이 다시금 회복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벧전 4:12-19
제목 : 목회와 선교의 출구는 복음이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 나의 묵상
죄를 그친 자가 당하는 비방과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방식에 대하여 4장 전반부에서 말씀하고 있다면 후반부인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불과 같은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이다(12).
오히려 우리 믿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기쁨으로 감당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영광의 날에 진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13).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먹고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복이다.
그것은 바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성령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14).
따라서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살인 도둑질 악행 또는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고난 받으면 안 된다(15).
그러나 만약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면 전혀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려라(16).
이제 심판이 시작되었다.
그 심판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부터 시작된다.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인가?(17).
또 의인들도 이처럼 구원 받기가 힘이 드는데 그렇다면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과 죄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18).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실 것이다.
고난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19).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전 2세기의 다니엘서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로 인하여 죽음에 직면하는 고난과 박해를 당하였다.
때로는 잠을 자다가 이대로 눈을 뜨지 않고 천국에 갔으면 할 정도로 그 박해의 정도는 심하였다.
기독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 이유는 기존의 악한 세력과 체제에 대해 저항하여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체제를 전복하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예수를 부인하거나 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폭력을 쓰지 않고 육신은 고스란히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주님께 붙들려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잠시 자신들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단순히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라기보다 더 큰 이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12절의 불 시험은 모든 것을 다 태워서 없애버릴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극한 고난이다.
그러나 풀무불 속에서도 금은 정제되어 순금으로 새롭게 태어나듯 이런 불 시험을 통해서 더욱 연단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욥 23:8-10)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 믿는 자들을 향하여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박해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여기저기서 교회를 끊고 믿음을 저버리며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하기야 지금 현실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하여 교회들이 엄청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어서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가 주선하여 교회 출석을 가급적 금하고 있으며 많은 젊은이들을 비롯하여 성도들은 정부의 권유와 함께 바로 이 때다 싶어 코로나 감염에 대한 염려로 교회 출석을 멈추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앙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과연 마지막 때에 있을 대 환난의 시기에는 과연 그 믿음을 지킬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주님께서는 그 숫자가 많지 않을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다수가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이는 적다.
주님께서는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에 과연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믿음이 있는 자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러나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도 목사로서 얼마나 많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설교했던가?
그러나 정작 목사인 나 자신부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했으며 넓고 화려한 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좋은 길로 가기를 탐하지 않았던가?
목사인 내가 그럴진대 오늘날 세상이 넓고 큰 길로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크고 넓은 길을 선호한다는데 있다.
요즘 개척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척을 해서 전도를 해도 성도가 모이지 않고 현실이 그렇다 보니 매달 나가야 하는 달세와 교회 운영비 등을 감당하기가 버겁다.
개척교회 목사들이 바로 이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패배감과 상실감에 빠져서 결국 낙심하곤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를 위해 헌신하였는데 이런 좁고 협착한 길의 고난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이런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개척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이 길은 좁은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가야만 한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했다는 말을 ‘더불어민주당’에서 빌어썼다는 이 말이 세간에 화제다.
‘문제는 경제야 경제’
이 말은 경제대국인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정치가들이 역점을 두고 이끌어가는 정책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복음이다.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목사들조차 자신의 경제, 즉 먹고 사는 문제에 천착하여 성도들의 숫자가 밥그릇으로 보이기도 하고, 큰 교회 목사들은 자기의 권위와 명예로 보기도 한다.
나 역시 교회를 개척했던 목사이다.
그러나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운의 꿈을 안고 교회를 개척하여 전도 열심히 해서 교인들을 많이 모아서 큰 교회를 이루어 예배당도 크게 짓고 어깨 펴고 보란 듯하게 목회에 성공?한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1년, 2년 지나는데 성도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다.
조금 모였다 싶으면 쑥 빠져나가고, 또 모였다 싶으면 빠져나가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맨날 고만고만, 거기서 거기였다.
게다가 교회 안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인하여 분란이 생기고 성도들 마음은 흩어져 제 각각이 되는 것이 아닌가!
목사인 나 역시 완전 탈진 상태에 빠져 목회를 그만 두려고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큰 예배당 짓고 목사의 명성과 이름을 내서 보란 듯하게 목회를 하기는커녕, 몇 명 안 되는 성도들과 그 쪼그만 교회 앞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목회를 그만 두고 회피성 선교나 가려고 두 손을 늘어뜨리고 있을 때 주님은 나에게 복음을 듣게 하셨다.
복음생명캠프에서 처음 이 복음을 들었을 때, 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해 오던 목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 썩어 없어질 땅의 것이요, 나는 마치 애벌레처럼 땅의 것만 구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목사인 내가 개처럼 땅만 쳐다보면서 킁킁거리는데 어떻게 성도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많은 숫자를 구하였으나 주님은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다.
나는 더 많은 숫자를 원하였으나 주님은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전해서 생명을 주라고 하셨다.
그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이다.
나는 목회에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항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통합복음을 듣고 깨닫게 되자 출구를 찾게 된 것이다.
교인 숫자에 상관없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이었다.
특히 장사복음은 마른 가뭄에 소낙비와 같은 생명수였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불같은 시험, 즉 고난은 나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연단시키는 시험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장사복음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난은 나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온갖 불순물 섞인 원석을 풀무불 속에 던져 넣어 순금으로 만드시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은 미쉬파트, 즉 교정하여 세우고 회복시키심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의 심판은 진멸이다.
이 일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종말에 있을 일이지만, 지금도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심판이 임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를 회복시켜 세우고 순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돌아가셔서 더 이상 이 땅에서 효도할 수 없지만 진짜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효도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진짜 내 아버지, 하늘 아버지께 효도하는 것은 내 영혼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목사요 선교사로써 내 말, 세상 말, 땅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 하나님 나라의 말씀, 하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효도가 아니겠는가?
나는 복음을 통하여 목회의 출구를 찾았다.
그 이후 그렇게 이 복음만으로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정말 행복하다.
오직 복음을 전하여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 나는 행복하다.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간 탕자이다.
그 유산으로 내 맘대로 허랑방탕하다가 다 탕진하고 헤매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왔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잔치를 배설하셨다.
정말 기뻐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시고 받아주셨다.
거기에 기쁨(joy)이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 밖에서 재미(fun)를 찾았다.
헛다리만 짚었던 것이다.
목회와 선교의 출구는 바로 복음이다.
복음이 나를 살렸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집을 나간 탕자가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자기 것인 양 다 탕진하고 갈 데가 없어서 이리저리 헤매었나이다.
주님이 주신 생명과 영생은 어디다 뒀는지 내팽개쳐 버리고 세상의 것, 땅의 것, 만물 안에 있는 것으로 영화를 보려고 하다가 결국 쪽박을 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포기하려고 했을 때, 주님은 복음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탕자를 품에 안아 주듯이 주님은 당신의 품으로 나를 안으셨나이다.
주님...
나는 그 품안에서 복음을 듣고 다시금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가는 천국인줄로만 알았던 영생이 오늘 나의 삶속에서 영원한 현재가 되어 살아 숨쉬고 있나이다.
주님 안에 기쁨과 행복이 있고, 그 안에 출구가 있는데 나는 엉뚱한 곳에서 출구를 찾으니 헤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복을 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영생의 자리임을 알게 하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의 은혜가 크도소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