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64
5월21일[연중 제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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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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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qCORJAdSOE
[서울대교구 김강룡 프란치스코(옥수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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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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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자기를 살리려는 사람 안에서 말씀은 죽는다>
알베르 카뮈의 희곡 중 「오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중부 유럽의 외딴 들판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 집에는 원래 ‘쟌’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가출하여 지금은 두 모녀만 살고 있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과 고독에 지친 나머지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여인숙에 투숙하는 손님 중에서 특별히 돈 있어 보이고 혼자 투숙하는 남자 손님에게만 마취약을 먹인 후 목 졸라 죽이고 소지품을 뒤져서 돈과 보석을 빼낸 다음에는 강물에 빠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고독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했지만 점점 이것이 상습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젊은이가 투숙했습니다. 돈도 있어 보이고 성공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두 모녀는 그 젊은이를 그날 밤 마취약을 먹인 후 죽이고,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다 떨어진 신분증과 사진을 보니, 바로 28년 전에 가출했던 바로 ‘쟌’이었습니다.
‘쟌’인 것을 확인한 순간 모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실신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모녀는 ‘쟌’을 죽여 갖다 버린 그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합니다.
이웃을 죽여 자신의 배를 채우다가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자도 죽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또한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은 이웃을 죽여야만 하므로 말씀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생명체든 남을 죽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자고 이웃을 죽이다보면 결국 예수님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온 전체를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 중, 특별히 육체에 해당하는 욕구, 혹은 육체의 주인인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또 자아나 육체의 욕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가 생존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하느님의 뜻과 맞서게 됩니다. 그러면 말씀이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러 가시는 중인데 그분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괜히 물어보았다가 정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이 작은이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려면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릴 것이고 심지어 자기 생각에 맞추어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말씀을 주님으로 모시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죽이십시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만큼 말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서학자보다 마더 데레사가 성경말씀을 더 잘 이해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임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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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겸손의 두 능력>
한 청년이 박해를 당해 고향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함디는 터키의 작은 마을에서 양떼와 염소를 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라는 이유로 온갖 비극을 견뎌야했습니다.(터키에서 쿠르드족은 차별과 탄압을 받아 왔습니다.)
그는 터키의 말살정책으로 테러범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터키를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차별과 싸워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주민들이 나라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업 경험이 아주 없었지만 그는 작은 요거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장 근처에 난민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디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난민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영어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직원 5명과 매일 가게에서 먹고 자며 밤새 일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고향에서 먹던 걸쭉한 요거트가 미국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은 적중하여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욕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거트는 날개 돋친 듯 팔려 회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100%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함디는 더 많은 난민들을 고용했습니다. 직원들은 함디의 은혜를 갚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회사를 미국 요거트 브랜드 1위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 매출 1.6조원을 기록하였습니다.
함디는 2,000개의 일자리를 더 만들었고 그중 600명이 난민들입니다. 그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나 나라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하며, 직원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한 명당 지분 1억 7천만 원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난민구조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누가 더 높으냐고 말다툼하는 제자들을 불러다놓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운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을 받아들여야 높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렇듯 ‘포용력’ 있는 이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돼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대우하며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차별 없이 품에 안을 수 있는 능력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호텔 32층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며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판단하는 사람. 범인은 심판관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낮아져 섞일 줄 알고 또 포용할 줄 아는 힘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두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의 두 능력은 어디에나 담길 수 있고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교만하여 서로 섞일 줄 몰랐습니다. 공동체에 섞일 줄 모르는 것을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섞일 줄 모르는 사람이 포용력도 없습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이냐를 놓고 다투다가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총기 난사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함디는 미국이라는 곳에서 난민이라는 처지로 섞일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차별한다고 해서 총기를 난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몸에 좋은 요거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섞이지 못하는 이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금을 내는 한 시민으로 섞이게 했습니다.
겸손은 열등감이 아닙니다. 열등감은 교만입니다. 내가 못나서 저 무리에 섞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잘 섞일 줄 아는 것이 겸손이고 누구라도 안아줄 수 있는 포용력이 겸손입니다.
이 세상에서서 이런 겸손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반드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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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체의 호르몬 중에 ‘도파민’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여행과 모험을 떠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게임을 하고, 스포츠를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도박과 마약도 즐거움입니다. 연애도 즐거움입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조금 고상하게 맹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일없이 건강한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 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인간을 ‘Homo Ludens(즐거움을 찾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면서 발전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예술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체의 호르몬 중에 ‘세로토닌’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안정과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을 피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아프리카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 요셉 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은 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헌신과 나눔을 추구하기에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도파민이 가속 페달이라면 세로토닌은 브레이크입니다. 가속 페달이 없는 차는 움직이지 않지만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사고가 납니다. 둘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파민이 이끄는 삶과 세로토닌이 이끄는 삶의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본당의 사목도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 좋습니다. 교우들의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서 체육대회, 본당의 날, 음식 나눔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습니다. 적당한 유머와 놀이는 집의 창문과 같아서 활력을 줍니다. 본당에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이 함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공부와 피정, 봉사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영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신앙의 자긍심을 얻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날개로 본당이 균형을 이룬다면 활력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직책이나, 우리의 업적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보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직책이나 자리를 가지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참을 수 있다면,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을 먼저 생각 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이기기 이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나눔, 사랑, 겸손, 봉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고, 그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재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오늘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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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 말씀하신다(3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를 못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투었다(34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되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초대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봉사자와 지도자들은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 모두가 바로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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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의 ‘서열 논쟁’으로 생긴 갈등을 정리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는데,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욕심”에서 비롯합니다.
독서는 이를 매우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복음은 이러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할 방법으로 세 개의 이미지(꼴찌, 종, 어린이)를 제시합니다. “꼴찌”로 옮긴 그리스 말 ‘에스카토스’는 끝이나 종말 또는 마지막을 의미하며 맨 끝자리의 ‘무의미한 존재’나 ‘쓸모없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종”으로 옮긴 그리스 말 ‘디아코노스’ 또한 식탁에서 봉사하는 이를 뜻합니다. “어린이”로 옮긴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 어린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어리고 연약한 이들을 말합니다. 결국 이 세 개의 이미지를 통하여 “첫째가 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대신 힘 없고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가지도록 제안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그것이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독서에서는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꼴찌가 되고 누군가의 종이 되며 연약한 아이처럼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식이나 위선 없이 진심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야말로 구원의 초대이고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때 하느님께서는 바닥에 있는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 주셨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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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3-37)
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는데(마르 9,30-32), 제자들은 그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당시에 제자들의 주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마르 10,37), 그들은 그냥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 또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 더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특별한 사람들’로 변화되지만, 예수님 수난 전에는 그런 문제로 자주 다투고 논쟁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라는 말은, 사도들도 자기들의 논쟁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명예욕과 자존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스스로 낮추라는 예수님 말씀은 높아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니고, 높임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나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나라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똑같은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는 “하늘나라에는 높은 자리도 없고, 높은 사람도 없다. 그 나라에는 사람들 사이에 서열 같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런 문제로 다투지 마라.”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하고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3) ‘꼴찌, 종, 어린이’ 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낮춤과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 단어의 뜻을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것이 싫어서 실천을 안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아예 모른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지식으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생활입니다.(마태 7,21)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을 알아야만 할 정도로 주님의 가르침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4) 뒤의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낮춤’과 ‘섬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입니다.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직책의 높고 낮은 차이가 있고, 누군가는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월감을 가져도 안 되고, 교만해져도 안 됩니다. <만일에 직책을 내세우면서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낮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거나 비굴해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원하는 직책을 얻지 못하거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일이 생기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해도 속으로는......)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실제로는 참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자존심 하나만 제대로 다스려도 성덕을 쌓는 일에 큰 진보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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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신학생 때, 한 학기에 한 번씩 교구장 주교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많은 편지 가운데에서 문득 오늘 복음을 듣고 생각나는 글이 있습니다. 편지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몇 가지 유념하는 공리(公理)가 있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한단다.”
그때 왜 하필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살면서 단순하고도 연륜이 느껴지는 이 말씀을 자주 떠올립니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치고 주위에서 반기는 사람 없고,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치고 주위에 사람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그 누구도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수는 없으며, 단점 없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자신의 단점을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털어놓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비웃거나 얕보지 않고, 편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여느 사람들과 같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물 위의 주님으로 드높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무시와 비웃음을 당하는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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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석중 루도비꼬 신부님]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경험하듯이, 불확실하거나 불분명한 것은 대부분 불행한 사태를 야기 시키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명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할 때는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고 온갖 억측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억측들은 대부분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좋은 내용이나 기대가 아니라 정반대로 불길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아가, 내가 오는 화요일에 병원에 가야하는데...”라고 말했다면 이 젊은 며느리는 도대체 이 시어머니 말씀의 숨은 뜻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직접 병원에 가야하는지? 아니면 혹시 병원에 예약은 해 놓고 다른 일 때문에 가실 수가 없다는 말씀인지? 병원 가시기에 겁이 나시는지? 시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특별히 보살펴 달라는 부탁인지? 당신의 병을 지금까지 알아주지 못해서 책망하시는 건지…….”
이 때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곰곰이 생각하여 스스로 숨은 뜻을 알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입니다만, 종종 소홀히 하는 일도 있습니다.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전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사람의 아들이란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 어떤 사람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계시는지? 혹시 로마인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아니면 친척이나 친구들인지? 당신 제자들인 우리가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는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여 하필이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부활은 무엇인지? 당신의 반대자들이 벌써 이것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명확한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장차 일어날 큰 기적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인지... ‘
앞에서 말씀드린 며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애매모호한 것이 많아서 당연히 곰곰이 생각해보야야 하지만, 자주 그러하듯이 제자들은 도대체 제대로 알려고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오랫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이해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님 앞에서나 동료들 앞에서 어느 누구도 어리석은 질문을 하여 놀림거리가 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삶의 태도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리 행동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이 불확실 할 때는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물어 보셨고, 인간들에게 심지어는 당신 제자들에게도 질문하십니다. 당신께서는 길에서 제자들이 무슨 일로 논쟁하였는지 알고 싶어 하시고 질문하십니다. 제자들은 비록 대답은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신하였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기본적인 삶의 규칙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위대한 자로서 인정을 받지만 권한만을 요구하는 사람은 결코 큰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작고 약한 자들 편에 서 계시면서 죽기까지 하느님과 인간에 봉사하신 당신의 삶 안에서 당신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자주 물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이가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어른들에게 질문을 하여 자신과 세상을 알려고 하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이때에 많은 것들이 이전 보다 훨씬 더 명확해지고, 하느님과 세상의 진리와 이치가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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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길 가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새삼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오래도록 세상엔 신분제도가 이어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신분제도를 떠나서, 인간의 크고 작음에 대한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제자들의 논쟁에서 크고 작음은 바로 누가 더 높으며 낮은가, 아니면 누가 더 예수님의 신임을 많이 받느냐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무척 궁금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부자라 하느냐 자기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강자라 하느냐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누굴 가장 현명한 자라 하느냐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이기보다는 더 많이 가진 자 되길 바라고, 강자이기보다는 억누르는 자가 되길 바라며, 현자이기보다는 어리석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길 더 좋아하는 어리석음 범하며 살아간다. 큰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큰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큰 사람이라면 타인의 잘못에는 관대하며, 자신에게는 채찍을 가하는 사람이 아닐까?』 한 번쯤 마음에 새길 말씀이라고 느낍니다.
덧붙여서 여호수아 17,17에 보면, 요셉의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항변합니다. “주님께서 자금까지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이토록 큰 무리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제비를 딱 한 번 뽑아서 그 한몫만 우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십니까?” 요셉 지파는 막상 제비를 뽑고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자기 지파의 크기에 비해 배정받은 땅이 생각보다 훨씬 적다고 불평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실 땅 한 평도 받지 못한 레위 지파가 들으면 아마도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다고 들을 소리 아닙니까? 이를 다시 표현하자면, 나는 큰데,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했는데,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 나는 우리 가운데 큰 사람(고참이고 연장자)인데 왜 작은 사람 취급하느냐? 나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 있느냐? 이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이 시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아닐까요? 불평과 불만, 부족감에 시달리는 것은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누가 진짜 큰 사람일까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봅니다.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나의 공로보다는 예수님의 은총뿐이라고 고백하는 삶이라고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이런 논쟁이 어떤 배경에서 파생했는지 전후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로 시작합니다.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32) 하고 제자들의 심리상태를 자세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 고 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듣고서도 잠에 곯아떨어진 맹목盲目의 상태, 즉 의식이 깨어 있지 않고 잠든 상태와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미래와 추종에 따르는 자기 몫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참으로 어이없게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라는 현실적인 관심사를 갖고 논쟁한 것입니다. 철딱서니하고는. 쯧쯧! 그런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느낌이나 마음 상태는 어떠하였을까요? 참으로 어이없으셨겠지만 그래도 이런 제자들을 알고 부르셨기에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 하고 가르침의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첫째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기보다는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처방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꼴찌는 맨 마지막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앞자리를 차지하도록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며 마음 씀씀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맨 뒷자리가 바로 예수님처럼 첫째가 되려는 사람이 머물러야 할 꽃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남을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그런 섬기는 삶을 살려면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려는 사람만이 남의 종이 될 수 있고, 종처럼 남을 드높이고 남을 앞세울지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무릇 ‘예수의 小婢女'라고 자신을 내세우기도 하고, ‘종중의 종’이라고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종들에게서는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부류인 어린아이들을 기꺼이 환대할 줄 압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9,37) 이런 사람이 바로 첫째가 되는 길이고 예수님께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의 존재 태도입니다.
“주님, 철없는 저희를 탓하지 마시고, 아버지 앞에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각자의 자녀성을 되찾게 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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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신부님 본당 아이가 그린 그림을 주보에서 보셨어요?”
제게 많은 분이 이러한 SNS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주보를 보니까 교구 주보에 어린이들의 그림이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그중 두 개의 그림이 우리 본당 아이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그림에 저로 보이는 얼굴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 많은 분이 제게 연락하셨던 것입니다.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니면 나빴을까요?
솔직히 부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주제 때문입니다. 그림 주제가 ‘내가 만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그림 속의 인물과 제가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를 그리면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일까요? 이 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스스로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죄 많은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짐했지만, 지금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의 눈에 저를 이렇게 봐주더니 어떻게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 눈에서는 신부를 모두 예수님처럼, 수녀를 모두 성모님처럼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함부로 사는 삶이 아닌, 예수님 닮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은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피하는 삶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과 시련은 내게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부활이란 커다란 영광입니다. 이 부활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그 전에 겪어야 할 수난과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더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 논쟁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가장 낮은 위치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높은 자리만을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닮는 삶은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낮은 사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즉,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 닮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기를 통해 다른 이에게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겸손한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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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옹다옹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9,34). 이 물음은 창세기 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을 살펴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섬기고 봉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는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내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 퍼 주고도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운만큼 주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면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참된 봉사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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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름다운 다툼>
마르코 9,30-37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가장 큰 사람)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 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름다운 다툼>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믿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실천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희망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기뻐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사랑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감사하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착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고운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바른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참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환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맑은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깨끗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올곧은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굳건한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부드러운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보듬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돌보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섬기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베푸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살리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북돋우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아우르는가?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헌신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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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겸손을 추구하라>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다-
오늘 새벽성무일도시 코헬렛 독서중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내용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바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눈에 들어온 겸손과 관련된 말씀이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친구란 나란히 서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다. 저보다 나은 사람만 사귀려는 것은 받기만을 바라는 욕심이다.”<다산>
참으로 겸손할 때 좋은 우정의 친구도 가능함을 봅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시카고 로욜라 대학의 교수진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꿈꾸는 사람들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부지런히 꿈꾸는 희망의 사람들,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겸손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입니다. 엊그제 주일에는 올해 60세가 된, 47년전 13세,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둘이 와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 줬습니다. 벌써 10년째 매해 방문하는 제자들입니다. 수사님들 잡수라고 추어탕과 게장도 선물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매해 추석때는 쌀 수십 부대를 수도원에 선물합니다. 스승의 은혜 노래는 늘 들어도 감격입니다. 저는 ‘스승’대신 ‘주님’을 넣어서 가끔 불러보곤 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의 은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절로 노래를 들으면서 자각하게 되는 감사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평생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겸손과 온유요, 평생 배워도 초보자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또 어제 대구가대 1회 동기생중 들꽃마을을 일구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최영배 비오 신부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대구가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대구백화점에 가서 베레모를 사준 동기신부인데 병환으로 향년 69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죽음 또한 겸손의 참 좋은 스승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늘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 조언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죽음을 생각할 때 환상이나 허영, 교만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겸손을 살게 합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인간(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을 닮은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생래적으로 흙을 찾는 인간같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겸손에 대한 주옥과 같은 설명이 많았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요, 천상선물의 가장 확고한 기초이다.”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모든 덕을 능가합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모든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은 환금사슬과도 같습니다.”
“거룩해진 영혼의 장신구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막의 수도승,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패퇴한 악마의 고백입니다.
“나도 네가 하는 모든 것을 한다. 너는 단식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너는 철야를 나는 전혀 잠을 자지 않는다. 오직 한가지 점에서만 네가 나를 능가한다.”
마카리우스 압바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악마는 대답합니다.
“너의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내가 너에게 맞서 싸울 수 없다.”
어느 사막교부는 겸손한 자만이 온갖 악마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테오도라 암마는 금욕수행이나 철야 또는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요, 겸손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모세를 위시한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 또한 겸손입니다. 겸손의 대가, 겸손의 달인인 겸손한 성인들입니다. 영성의 진위를 식별하는 잣대가 겸손입니다. 겸손을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니 부단히 겸손을 추구하라 말씀하시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정결히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악마와의 영적전쟁에서 겸손보다 더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인자무적(仁者無敵)에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2차 수난예고에도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 예수님 부재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겸손을 배웠다면, 길위에서 이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불필요한 논쟁은 없었을 것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만 충실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제자를 불러 겸손한, 참된 종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은 같습니다.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드러나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 역시 훈련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가는 평생 겸손의 훈련장이 수도공동체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겸손을 추구하라는 말씀도 참 강렬합니다.
“그대가 윗자리와 최고 영예를 사랑한다면 이제는 끝자리에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십시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가장 작은 것을 추구하고,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 뒤에 세우십시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합니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주님의 제자들이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요 이들의 환대를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찌보면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인간 일반이라는 생각이듭니다. 하나하나 깊이 들여다보면 한없이 약하고 가련한 인간존재요 그 배경에는 예수님이,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은 차별함이 없이 주님을 맞이하듯 모든 사람을 맞이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겸손과 온유의 예수성심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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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하늘까지 치고 올라가>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가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의 사람과 겸손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되기 더 어려울까? 그러면서 탁 든 생각은 겸손의 사람이 더 되기 힘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영적으로는 둘 다, 우리가 되고 싶은 겁니다. 겸손한데다가 사랑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이 최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은 인간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이지만, 겸손 특히 낮은 것은 인간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과 작음과 낮음은 인간적으로는 싫은 것을, 완덕의 이유와 영적인 이유로 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다.
완덕과 영적인 이유라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가 되려는 것인데 제 생각에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라면 겸손하고 작고 낮은 자 되는 것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 누구가 인간에게 자기를 굽히고 낮추겠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누가 누구에게 굽히고 싶겠습니까?
밸이 꼴리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억지로 자신을 굽히는 것이지할 수만 있다면 남 위에 군림하고 싶고 적어도 밑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고 싶어서 낮추는 것이고, 하느님 앞에 설 때 낮출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첫째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첫째란 하느님 앞에서 첫째지 인간들 가운데서 첫째가 아닐 것이고, 첫째가 되기 위해 꼴찌가 되라는 말씀도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려면 사람들 가운데서는 꼴찌가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게 말합니다. 레오나르도야, 이왕 오르려거든 고작 이 세상에서 사람들 위에 있으려 하지 말고, 오르고 오르다 하늘까지 치고 올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어라!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권고한 것을 되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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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고의 사랑이 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은 진정 첫째가 되기 위한 것일까요? 중국 항우와 유방 시대에 한신은 가난한 집안에 볼품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많은 조롱을 당하지만 백만 대군을 거느리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달들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라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 모욕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도 안동 김씨 세도 하에 유림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모욕을 당하지만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큰 꿈 때문에 그 모욕을 견디어냅니다.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제가 잘 아는 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정직하고 성실하나 그것 때문에 세상을 힘들게 살았습니다. 두 번이나 사업이 실패하였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말수도 적고 너그럽고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고 난 뒤에는 같이 모이면 혼자서 많은 말을 하고 자기를 뽐내곤 하였습니다. 보잘것없고 가난한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힘 있고 잘 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을 감추고 낮추는 법이지요. 위의 예수님 말씀은 이런 뜻일까요?
인간적으로 봐도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큰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적인 차원이 아닐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낮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낮춤은 낮춤의 사랑이고 낮춤의 사랑은 존경의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중에 가장 품위 있는 사랑이 존경이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은 흠숭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에 있어서 최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를 하느님처럼 받들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그저 어린이로 보지 않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저 보잘것없는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눈과 사랑을 가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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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자기비하의 삶!>
오늘 복음(마르9,30-37)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몰이해'를 넘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면서 자리다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고, 더 낮추어야 한다.'는 '자기비하'의 말씀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삶'은 '겸손과 자기비하의 삶'이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 삶(마음)을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서로가 자신을 낮추려고 하고, 종이 되려고 합니다.
물질적인 세상 가치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이를 더 소유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자기비하의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따라가는 이들은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사람의 모습인 영원한 생명 때문에.'
오늘도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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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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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모습을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의 모습이란
꼴찌의 모습이며
종의 삶이며
어린이 하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은 결코
폭력적이거나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길 때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고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섬기는
삶에 충실하셨던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인 우리가
걸어가야할 길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내어주기 위해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심판과 판단의
이중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에서
꼴찌와 종으로
어린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받아들입시다.
낮은 자리에
계시는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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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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