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어서는 안될 뜨거운 삶 살다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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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생전 소원 "대학생 친구"로 살았던 조영래 변호사의 뜨거운 삶
◇ 사법시험 합격 후 수감·도피생활…문재인·박원순과 연수원 졸업
그는 사법시험을 1971년 3월에 합격하지만 그해 12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 구속돼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한다. 1973년 출소한 그는 1974년 긴급조치 4호 발동과 함께 민청학련사건 배후조종자로 수배돼 6년간의 도피생활을 한다.
10.26 이후 복권된 조영래는 1980년 사법연수원에 복직해 1982년 9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는 문재인, 박원순 등이 있다.
변호사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조영래는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주도적으로 나서 만들기도 한다.
◇ 명석한 두뇌, 그러나 누구보다 겸손했던
어릴 적 집안형편이 기울어 서울의 달동네를 전전했던 조영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고등학교를 마친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당당히 서울대를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다.
평생을 두고 자랑할 법한 이 일에 대해 조영래는 "별 의미 없는 것이기도 하고 조금도 자랑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남들에게 쉽사리 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는 1964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차가운 비판적 사고를 일깨운 사건은 '3선 개헌'과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그는 김근태, 손학규, 장기표 등과 어울리며 활발한 학생운동을 전개한다.

◇ 1970년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두 살 이었다. 그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어렵게 구했지만 한자가 너무 많아 읽기가 어려웠다. "아...내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 전태일은 생전 책 읽는 것을 도와줄 대학생 친구를 간절히 바랐다.
전태일이 분신한 후 전태일보다 한 살 위인 조영래 변호사는 늦었지만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전태일'의 이름과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태일 평전을 쓰기 시작한 것.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간 쫓기는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고 1983년 전태일 평전은 익명으로 출간됐다.

◇ 올해로 25주기를 맞은 故 조영래 변호사 그는 누구일까?
1947년 대구 출생. 경기고 재학 당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해 정학 처분을 받았다. 1965년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하고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 대한민국 1세대 인권 변호사 조정래의 삶
‘부천서 성 고문 사건’
1986년 22살 권인숙 씨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일로 부천서 경장 문귀동에게 조사는 받던 중 성고문을 당했다. 당시 검찰은 문 경장을 재판에 넘기지도 않았고 조영래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재정신청과 재항고 등으로 검‧경의 만행을 폭로했다. 당시 조영래가 작성한 '부천 경찰서 성 고문사건 변론요지서'는 현재까지도 형사변론서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서 재판받아야 할 이는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법질서와 인권과 인륜도덕을 그 근본에까지 남김없이 유린하고 우리로 하여금 인간성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지닐 수 없게 만든 극악극흉한 문귀동 그 사람입니다.

"기성 세대의 눈으로 볼 때, 젊은이들이 대학 출신자에게 보장된 기득을 포기하고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일생을 걸고 노동 현장에 취업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로 비칠는지도 모릅니다. (...)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이제 우리 사회에 하나의 새로운 세대, 기성세대와는 다른 세대, 그들의 양심을 스스로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젊은 세대가 자라났다는 사실입니다."

"권 양의 진실은 그것을 끝내 은폐하려는 강대한 권력의 힘 앞에 부딪쳐 차단되고 좌절되어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 진실을 필사적으로 은폐하기 위하여 허둥대는 권력의 모습에 의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승리의 길로 전진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진실은 끝내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진실은 감방 속에 가두어둘 수가 없습니다."
(1986.11.21. '부천 경찰서 성 고문사건 변론요지서')
◇ 인권 변호의 영역을 대규모 집단소송으로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망원동 수재(水災) 사건’
1984년 9월 2일 폭우로 서울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의 수문이 무너져 일대 1만 7900여 가구가 물에 잠긴 사건. 조영래 변호사는 "이 사고는 서울시와 건설회사 잘못이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주장했다. 이후 조 변호사는 무료 변론을 맡아 수문 설계가 잘못된 것이 수해의 원인이었음을 밝혀내 주민들의 피해 보상을 받아냈다.
◇ 사법연수생 당시 썼던 일기…그의 신념 보여줘
연수생 때 검사 시보를 하면서 썼던 일기는 그가 '변호사'이기 이전에 어떤 '사람'인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1981년 12월 13일 사법연수원 검사 시보 시절)
◇ 그가 아들 일평에게 쓴 편지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1.18. 밤. 아빠가.)
◇ 1990년 12월 12일 마흔 세 살의 나이에 작고
"마흔 세 살 창창한 나이에, 정말 이제부터 그가 감당해야 할 일이 하고 많은데 이렇듯 졸지에 그를 잃다니...이 기막힌 슬픔을 그의 손때 묻은 글 줄이라도 다시 읽으면서 달래보고 싶었다." (홍성우 변호사 '간행사' 중)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12일 43세에 폐암이 악화돼 숨을 거뒀다. 생전 그의 글을 읽는 것으로 故 조영래 변호사에 대한 추모를 갈음한다.

◇ 1981년 12월, 사법연수원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 12월, 사법연수원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http://ebs.daum.net/knowledge/episode/1500
http://ebs.daum.net/knowledge/episode/1500

서울대 휴학생 권인숙양 항소이유서 중에서...
본인이 공문서 변조건으로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중,
형사 문귀동에게 당한 '성적(性的)추행.고문 사실'에 대해 몇 마디 적을까 합니다.
지금까지 한달 반이란 기간이 제게는 이제까지의 삶 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과 눈물의 기간이었습니다.
여자로서 참을 수 없는 성적 추행을 당하고, 눈만 감으면 나타나던
문의 두터운 입술과 지퍼를 풀은 채 드러낸 성기와 귀에 쟁쟁한 심한 욕설,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의 수치심과 정의감과의 싸움.
'제발 덮어두자.'고 세상에 알려지면 어머니 아버지 약 먹고 죽겠다는,
부모님의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애타는 호소,
너 때문에 부모님 중 어느 한 분이라도 어떻게 되시는 날엔 널 죽여버리겠다는 언니의 편지,
그러나 저는 고소장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내려오는, 우리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의 고문에 대한
한이 무엇인지 아는 제가 어떻게 자기 몸만 사릴 수 있겠습니까?

경찰 검찰 언론사가 똘똘 뭉쳐서 사건을 은폐했던 흔적...
그 때나 지금이나....

문귀동 경장

이 분이 불의에 맞서 싸우셨던 현재의 권인숙 교수.
여성학자이자 소설가이자 명지대 교수





















































첫댓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일수록 정부에의해 쫒기고
감옥에 보내지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있다..
올바른 대한민국이 오기를...
감사합니다.존경합니다.
진보가 이렇게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