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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너무 착했어. 아마 그는 처음부터 내게 너무 착한 존재
였을지도 몰라. 처음 만남부터가 난 너무 나쁘게, 그리고 그는 너무
착하게 서로에게 다가갔지.
다른사람에게 발이 걸려넘어졌을 때, 난 다짜고짜 내 앞을 지나가고
있던 그에게 화를 냈었는데,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내 화를 받아주었
어. 사납게, 그리고 매섭게 쏘아붙이는 내 말을 다 들어주던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어.
"죄송해요, 다치신데는 없으세요?"
자신이 발을 걸은 것도 아닌데, 그는 다친 나부터 일으켜 세우며
괜찮냐고 물었지. 그 때 부터 난 널 알아봤고, 착한 네가 내 남자가
되었었지. 열 여덟, 내게는 조그마한 사랑이 찾아왔지.
어느날이었을까. 물론 우리는 문제 없이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지.
"벌써 우리가 고3이다. 그치?"
"응. 시간 참 빨리 간다."
그는 고3이 된 것이 꽤 설레인 것 처럼 보였어. 이제 고3이 되면 자주
만나지 못할 텐데 말이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말했어.
"우리……. 서점 가자!"
"또?"
"응, 마땅히 갈 때도 없으니까~"
특별히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 애들에게 하늘을
찌를만큼 인기가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공부도 성픽?했고,
자신의 여자인 내게는 아주 소중하게 대해줬지.
서점은 거의 맨날 우리 데이트 장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였어.
책을 너무 좋아하던 그는 항상 서점에 들어가서 살 다 시피했지.
나도 책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 같이 서점에 가서 오순도순
얘기를 하곤 했지. 그리고 내겐 서점이 아주 특별해.
"여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다."
"정말이네? 그 때 책을 사고 나오다가 넘어 진 널 봤어. 나한테
어찌나 화를 내던 지, 너무 미안하더라."
"히히, 그 땐 너무 아팠거든. 솔직히 네가 친 것도 아닌데 뭐."
첫 만남을 생각하며 서점 안으로 들어섰지. 그는 서점에 들어서자
마자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한 책을 뽑았어.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책을 보여주었지.
"법?"
"응, 법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엄마가 이 분야를 원하셔."
"에이~ 마마보이도 아니고, 엄마가 하라는 데로 하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엄마잖아. 난 누구 뜻을 거절하는 건 잘 못하
겠더라고."
역시 착한 그는 부모님의 부탁이나 청을 거절 할 수 없었겠지. 하지
만 그의 그런 착한 성격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 줄은 몰랐었어.
"오늘 우리집에 놀러갈래? 한 번도 우리집에 놀러온 적 없잖아."
토요일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지. 거의 1주일만의 대화였어. 시험이다
공부다 하면서 만날 기회가 없던 우리는 겨우 전화로 만날 수 있었
던 거야. 그런데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것이였어. 그의 말대로
1년넘게 사귀면서 그의 집은 한 번도 가보질 않았어. 그래서 난 흔
쾌히 말했지.
"알았어! 놀러 갈게. 너희 집 어느쪽이야?"
집에서 츄리닝을 입고 뒹굴 던 나는 벌떡 일어나 한참 치장을
했지. 얼마나 치장을 했으면 옆에 있던 엄마가 내게 한 마디 하더군.
"어딜 가는데 그렇게 치장을 하는거야?"
"음~ 잘하면 엄마 사윗감 될 사람을 만나러?"
"아, 사혼이 만나러 가는구나."
"응! 오늘 놀러 가기로 했거든."
"그 때 보니까 꽤 멋있게 생겼던데, 언제 우리 집에도 데리고 와.
아빠에게도 한 번 소개 시켜주자."
엄마는 정말 그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도 솔직히 결혼까지는
생각 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 만큼 그가 좋았어.
그렇게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지. 내가 집을
잘 못찾아 갈 걸 알고 있었는지, 그는 저만치 날 마중 나와있었어.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지.
"빨리 들어가자! 우리 엄마가 너 엄청 보고 싶어 해."
그의 어머니께서 날 보고 싶어한다는 마음에 몸가짐을 더 바르게
하고 그와 함께 걸었지. 그의 집은 깔끔하고, 예쁜 정원이 있는
집이었어. 잘 사나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지.
거실에는 그의 어머니께서 다소곳이 앉아계셨어.
"사혼이……. 여자친구?"
"네, 서초연이에요."
"서초연?"
그런데, 그의 어머니께서 날 몇 번 훑어보더니 조금 두려운 표정으로
내게 다시 말을 하셨지.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아버지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
"네? 네……. 서영훈이세요. 서. 영. 훈."
내가 그 말을 하고 난 뒤, 그의 어머니께선 아무런 말씀이 없었어.
무엇을 그리 곰곰이 생각하시는지, 그가 몇 번이고 불렀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도,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어.
그냥 무슨 고민이 계시는 구나, 하고 난 생각했지. 하지만 그게 아니
였어. 그 어머니의 고민은 날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슬프게 만들어
버렸어.
역시나 공부 때문에 그를 자주 만날 수 없었어. 그의 집에 다녀오고
2주일 쯤이 지나서였을까. 갑자기 그가 우리 학교 앞으로 찾아왔지.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학교를 나왔었기 때문에 10시가 훌쩍 넘은
밤이었지. 하지만 그는 미소를 띄며 내게로 다가왔어. 그리고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지.
"미안해, 나……."
"응?"
"너랑 헤어질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 아무리 생각 해도 갑작스러웠거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어. 슬퍼하는 기색 없이, 아파하는
기색 없이 말하는 그가 조금 미워서였을까? 난 그 때 그렇게 말했어.
"너 같은 애가 나같은 애랑 사귀는 게 창피했니? 너희 어머니
께서 그러든? 그 때 보니까 나 꽤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나랑 사궜던 그 1년이 너무 초라해 질까봐?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고 떠나버리려고 그런거니?"
"그게, 그게 아니야. 나 유학……."
"그 1년동안 초라하게 만들어 버려서 미안해, 나 같은 애는 널 만족
시키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해, 정말로."
그렇게 쏘아붙이곤 집까지 쉬지않고 달렸어. 갑자기 유학이라니,
한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겠다는 말을 들은지가…….
너무 슬펐어. 정말로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삶이 초라하다고
느끼면 어쩔까. 나 때문에 너의 그 열여덟, 열아홉이 초라하다고
느낄까봐…….
그가 유학을 가기 전까지 난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어. 그를 잊으려
한참 노력을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였을까.
그가 유학을 갔는지도 몰랐을 때였어. 한 통의 음성메세지가 왔다고
울려되는 휴대폰 때문에 난 우연히 듣게 되었지. 그의 마음을, 점점
잊혀가고 있던 그의 진실된 모습을…….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텐데…‥. 음,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러
니까 나는 우리가 끝까지,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결혼을 하거나
그럴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내가 내 자신을 더 잘아니까, 그렇
게 까지는 생각 안 했어.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좀 웃겼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난 그 때가 너무 좋았거든. 살면서, 제일 좋았던 것 같아.
늙어서도, 죽기 전 까지, 죽어서도 말할 수 있어.
그래서 처음에는 어머니가 죽어도 서초연은 안 된다고 말할 때,
죽기 살기로 매달려 보려고도 했어. 하지만……. 내가 매달려도 힘들
어 질 껀 너니까 그리고 조금은 용서 할 수 없었어……. 우리 아버지
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 아버지였다는
걸 조금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가 시키는데로 유학도 가기로
했고, 너와 헤어지자 고 말했어.
헤어졌지만 내 열여덟, 열아홉. 최고의 여자, 내 삶을 가난하지 않게 만
들어 준 여자, 서초연은 미워할 수 없었어.
끝까지 사랑 할 수 없었지만, 내 삶에서 최고로 멋진 여자였다고…….
추억으로 간직할게. 사랑해, 초연아. '
그가 조금만 착했더라면 좋았을 거다. 그가 조금만 나빴더라면
내가 덜 힘들었을 거다. 그랬으면, 그가 덜 착했더라면, 조금만
나빴더라면 끝까지 그에게 매달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네가 아니면 난 이세상에서 살 수 없을 거라고, 허락을 해주지 않는
사회를 도피해서 도망이라도 가겠다고……. 빌고, 빌어서 너와 같이
살겠다고, 그 만큼 널 사랑해서 난 너 못 놓치겠다고.'
하지만 그는 내가 그렇게 매달릴 수 있을 만큼, 나쁜 사람이 되지
못했어. 너무 착해서 자신의 어머니도 나도 상처주기 싫었던 거야.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이런 거였어. 추억으로……. 마음 속에
추억으로 고이 간직하겠다고. 나도 잊지 않을거야. 차츰 잊혀져
간다고 해도 내 열여덟, 열아홉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윤사혼.' 이라는 남자 잊지 않을거야. 열여덟, 열아홉. 어린 나이였
지만……. 순수했던 사랑이었어.
내 삶에서 제일 아름답게 남을 것 같은 그를 생각하며 핸드폰 폴더를
조심스레 닫았다.
첫댓글 ㅠㅠ
보드레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느낌이 조아옹!!!!!!!~~~~~~~~~~잘지으셧엉!!!!!옹!!!
느낌이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ㅠㅠ재밋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