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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법원이 지난 19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에게 이례적으로 빨리 사망판결을 내린 것은 ‘김형욱이 청와대지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살됐다’고 기록한, 이른바 ‘코리아리포트’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연방법과 뉴저지주 주법은 실종자는 사망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후 목격일[last seen]로 부터 5년이 지난 이후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돼 있지만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실종된 뒤 1년6개월이 채 안된 1981년 3월 30일 사망판결이 내려졌다.
이처럼 미국 법원이 김형욱에게 조기사망판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형욱의 죽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제출돼 법적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며 그 증거는 ‘코리아 리포트’와 르몽드지 보도임이 법원 제출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는 어떻게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한국으로 송환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에게 권총 살해됐는지 그 내막이 상세히 기술된 코리아리포트와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지를 입수해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았다. 박우진(취재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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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주 버겐카운티지방법원
확인결과 김형욱실종관련 사망선고재판에서 유족측 변호인인 얼레인 치럿 변호사는 일명 코리아리포트로 알려진 8페이지의 불어판 원문을 증거로
제출했으며 또 다른 변호사인 알란 싱거 변호사도 동일내용을 보도한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한때 일본주간지에 일부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던 ‘코리아리포트’의 그 원문문서가 법원에 김형욱사망의 유력한 증거로 제출됐고 법원이 이를 사망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판단, 조기에 사망판결을 내린 것이다.
얼레인 치럿변호사는 1981년
3월 30일 법원에 코리아리포트 원문을 ‘P8-E’증거로 제출하면서 자신이 영어와 불어 등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므로 법원의 허락을 받아
원문은 증거 A로, 영어번역본은 증거 B로 각각 제출한다고 덧붙였다.
<선데이저널>이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지방법원 김형욱실종 사망선고 재판서류에서 찾아낸 이 불어문건에 따르면 미국내 중정책임자인 정태동공사는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임무를 수행한 뒤 ‘닥터 하인즈 초대성공’이라는 전문을 보냈고 프랑스내 중정책임자인 이상렬공사는 김형욱을 납치, 한국으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한 뒤 10월 7일 실종당일 프랑스시간 밤 12시 ‘닥터 하인즈 서울행’이라는 전문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김형욱의 중정내 암호명은 ‘닥터 하인즈’이였다.
박정희-김형욱, 서로 배신자 맞고함
중앙정보부는 프랑스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렬에게 김형욱을 파리의 안가로 데려갈 것, 마취 시킬 것, 소포로 위장해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보낼 것, 돌발 상황 발생 시 암살할 것 등 4가지 구체적 행동요령을 하달했으며 김형욱과 가족들과의 연락을 36시간동안 차단하는 것이 작전성패의 중요한 요소라고 적고 있다.
특히 이 문서는 김형욱이 부마사태가 발발한 1979년 10월 16일 청와대 구내 지하실로 끌려갔으며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김형욱에게 ‘더러운 배신자’라고 고함을 질렀고 김형욱은 박대통령에게 ‘배신자는 당신이다, 나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쳤으며 박대통령이 직접 두발을 발사, 김형욱을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5 Sundayjournalusa |
문서는 또 오작교 작전의
배경, 김형욱 회고록을 둘러싼 협상과정, 김형욱이 1979년 8월부터 2차례이상 파리를 방문해 회고록 포기 대가로 돈을 받아간 과정, 김형욱이
이상렬을 신임하게 된 배경, 이상렬의 중앙정보부 들어오기 전 행적등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비 스미스 판사는 바로 이
문서와 르몽드지 보도내용, 그리고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의 증언 등 3가지를 근거로 김형욱이 실종된 지 5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1년 6개월만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김형욱 사망판결문에 따르면 1980년 3월 30일 재판을 통해 김형욱에게 사망을 선고한다고 돼 있으며 사망 판결문에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80년 4월 9일자 스탬프가 찍혀 있다. 미국언론들도 3월 30일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일제히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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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리포트는 ‘오작교작전’등으로 일본 언론 등에 내용 중 일부가 보도됐고 국정원 진상보고서에도 ‘10월 16일 청와대 살해설’이 여러 가설중 하나로 언급됐으나 8페이지의 불어문서, 그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오작교작전’과 ‘청와대살해설’이 기록된 코리아리포트가 언론보도나 하나의 소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국법원이 이를 근거로 김형욱 실종
1년6개월만에 조기에 사망을 선고했다는 점이다. 김형욱의 정확한 실종내역, 즉 사망인지, 행망불명인지, 그렇다면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왜 죽었는지는 3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코리아리포트도 중요한 단서임에 틀림없다.
오작교 작전 특명 1호가 김형욱 납치
이 코리아리포트에 대해 주섭일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경찰 수사발표[발표일은 1980년 1월 24일]뒤 10여일쯤 지나 발신처미상 노란 봉투 등기물이 자신에게 이 보고서가 배달됐다’며 ‘문체로 봐서 프랑스인이 작성한 문서가 분명해 프랑스 정보기관이 슬쩍 흘러준 것으로 추측했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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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도 박정희 대통령 시해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을 때 1979년11월 3일부터 11월 8일사이에 간수헌병에게 ‘중요한 것이니 미스터 박이 잘 간직하고 있다가 밝혀야 할 상황이 오면 밝히라’며 ‘10월 10일부터 20일 사이, 김형욱은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3인이 있던 청와대 지하사격장에 끌려왔으며 차지철 경호실장이 권총 3발을 발사해 사살하고 사체는 행려병자로 위장,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간수헌병이 국정원 진상조사위원회에 진술한 내용으로 182-184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김형욱은 한국으로 납치된 뒤
경복궁과 청와대간 연결된 지하벙커의 박대통령 앞으로 끌려와 박대통령 지시에 의해 살해됐다고 월간조선이 보도하기도 했으며 김재규의 부하
박흥주대령이 10.26직전 시내 술집에서 만난 친구에게 김형욱이 산채로 납치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월간중앙에 보도되기도 했었다고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 58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또 10.26당시 중정
일본책임자로 김재규의 동서인 최세현박사 또한 ‘어떤 식으로든 김형욱을 한국으로 납치할 수 있는데 굳이 외국에서 살해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김재규가 10.26을 결행한 것은 김형욱의 죽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언론과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등이 청와대 살해설을 보도하고 보고서에 남겼으며 간수헌병 등이 전한 김재규의 주장은 미국법원이 김형욱의 조기사망선고의 근거로
받아들인 코리아리포트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죽인 뒤 사체는 벽제화장터에서 화장
국정원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중 외국 폭력배를 고용해 파리의 숲속에서 살해하고 낙엽으로 덮었다는 내용은 중정요원들이 김형욱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결정적 허점이 있다. 김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은 채 소지품과 외국인들의 살해했다는 말만 듣고 백% 죽음을 확신하고 본부에 성공을 타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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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장 닭모이설은 작전을 수행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소 황당하다.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임무가 부여됐을 때 전혀 사용해 본 적도 없는, 낯선 양계장의 기계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고 이 무서운 일을 처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을 익숙하지 않은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양계장 분쇄기에 김형욱을 밀어넣은 뒤 분쇄도중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작동이 정지된다면 속수무책인 것이다. 그대로 두고 달아난다면 발각될 것이요, 그렇다고 분쇄되지 않은 부분을 도로 빼내서 가져간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자기완결이라는 수칙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무리한 점이 많은 것이다.
청와대지하실에 끌려와
살해당했다는 주장과 관련, 청와대에 그 같은 지하사격장이나 터널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부에서는 이 같은 주장을 일축했었다. 그러나 최근
청와대인근 삼청동에서 지하터널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다. 청와대내부는 특성상 이 같은 터널이 발견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지만 담장을 사이에 둔
삼청동일대에 이 같은 터널들이 한두개도 아니고 수십개씩 발견됐음이 TV를 통해 알려졌다는 것은 청와대 내에도 이 같은 터널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양계장 닭모이설은 황당한 소설
김형욱의 실종 또는 사망과 관련, 여러 설이 분분하며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고 미국법원의 판단 근거라고 해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국법원이 청와대살해설을 근거로 김형욱 조기 사망선고를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코리아리포트에 근거하자면 사살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6명으로 경호원 3명을 제외하고 박대통령과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간수헌병에 따르면 김재규는
이미 전말을 설명했고 김형욱은 죽었을 것이므로 말이 없다. 그렇다면 박대통령과 차지철 두 사람 중 10월 26일 숨지기 전 주위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대통령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혹시 차지철은 김형욱의 실종 또는 죽음에 대해 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차지철의 부인은 그 같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부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차지철 전 경호실장이 김형욱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10월 16일부터 자신이 김재규에게 살해되는 10월 26일까지 열흘간의 짧은 기간에 누군가에게 김형욱실종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과연 차전실장이 그 전말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까, 그렇다면 그 전말은 코리아리포트와 일치할까’
어쩌면 그 의문은 조만간 풀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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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작전은 반체제인사에 대한 특수임무’
오작교작전이란 한국 중앙정보부[KCIA]에서 수행하는 특수임무를 일컫는 암호중 하나이며 이는 보안, 납치, 파괴와 연관된 한국중앙정보부에게 익숙한 임무들이다. 오작교작전은 특수임무 즉 해외에 피신중인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에 대한 납치와 암살을 일컫는 것이다, 이 임무가 주어진 이유는 1977년 해외피신중인 주요인물들이 한국 정치에 대한 반대활동을 두드러지게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1977년 6월 김형욱이 미국의회에서 엄청난 증언을 함으로써 비롯됐고 11월에는 한때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충격적 진술이 잇따랐다.
2페이지 | ‘오작교작전 첫대상은 김형욱 ‘닥터 하인즈’
오작교작전의 첫 번째 대상은 김형욱이었다, 프레이저청문회에서 유신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김형욱의 증언에 분노한 박정희대통령은 복수를 생각했고 더구나 김형욱은 회고록을 작성중이라 틀림없이 18년간의 박정권에 대한 기밀누설을 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를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중앙정보부에 임무수행명령을 내린다. 그 뒤 중앙정보부는 미국내 중정책임자인 정태동공사에게 작전수행지시를 내린다. 김형욱을 일컫는 암호는 ‘닥터 하인즈’였다. 정태동은 이전의 중정책임자 즉 육군출신의 김용환, 해군출신의 양두원[실제로는 해병 출신임]과는 달리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인텔리였다. 1979년 7월 정은 뉴저지 알파인 김형욱의 집 부근의 한 식당에서 김형욱을 만나 회고록 포기를 설득하게 된다.
3페이지 | ‘프랑스에 이상렬있으나 김형욱 혼자 가라’
김형욱의 자필회고록과 바꾸는 조건으로 50만달러를 제시했으나 김형욱은 스위스계좌로 2백만달러 이체를 요구함으로써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이튿날 정태동 김형욱은 몰루신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고 ‘정’은 2백만달러를 받아들이며 선금으로 스위스계좌로 50만달러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정’은 이 거래를 책임지는 사람이 김형욱 부하로 일했던 프랑스내 중정책임자 이상렬이므로 김형욱에게 혼자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날도 두 사람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김형욱은 2백만달러 일시불로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곧 김형욱은 돈을 전달받을 때 아내와 자식들이 동행하면 납치의 위험성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 중앙정보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맏아들이 김형욱의 경호원역할을 해왔다.
4페이지 | ‘4페이지 정태동, 협상성공뒤 하인즈박사초대성공 전문
김형욱은 정태동과의 대화를 녹음하기를 요구했다, 김형욱은 ‘나는 쉽게 납치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명심하시요’라고 말했고 정은 ‘우리가 김대중 납치 때의 쓰라린 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정태동은 중앙정보부 본부에 ‘닥터 하인즈 초대성공’이라는 암호 전문을 보낸다, 김형욱과 정태동이 합의를 본 것은 다음과 같다 ‘김형욱은 파리에서 이상렬을 만나 그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50만달러 수령을 확인한다. 그 뒤 자필회고록은 백만달러를 지불받을때 교환한다’였다. 1979년 8월 10일 김형욱은 전 가족과 함께 파리에 도착, 호텔 GEORGE V에 짐을 풀고 다음날인 11일 이상렬에게 연락한다.
5페이지 | 이상렬은 원충연반란제보뒤 김형욱에게 발탁
이상렬이 소령시절 원충연 반란사건을 중앙정보부에 제보함으로써 이상렬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베트남에 파견됐으며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김형욱 직속 부서에서 일했다. 김형욱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이상렬은 김형욱에게 중앙정보부 활동에 신물이 났다며 캐나다나 미국으로 도피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의 은행에서 김형욱과 그의 가족앞에서 이상렬은 준비한 50만달러를 김형욱의 계좌로 이체시켰고 김형욱은 만족스러워하며 이상렬에게 현금 2만달러를 지불한다. 그 뒤 김형욱은 경호원역할을 한 그의 장남과 함께 카지노에 가기 위해 두 번이나 파리를 방문하고 자연스럽게 이상렬과 만나게 되며 잔금지불에 대해 이야기한다.
6페이지 | ‘마취 뒤 소포로 위장, 대한항공으로 서울보내라’
[1979년] 9월 30일 프린스턴대를 막 졸업한 그의 장님이 10월 3일 취업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에 김형욱과 동행하지 못했고 김형욱은 혼자서 에어 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간다, 파리에 도착, 리츠호텔에 숙소를 정한뒤 이상렬과 함께 바카라를 즐기기 위해 그랑체롤카지노를 방문했고 이상렬은 다시 김형욱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십만달러[숫자가 잘 안보임, 6자리]가 있다면 해외로 도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이상렬은 중앙정보부로 부터 상세한 납치 지시명령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김형욱을 파리의 중앙정보부 아지트로 데리고 간다 2. 마취를 시킨다 3. 소포로 위장해 대한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보낸다 4. 급작스런 상황이 벌어질때는 암살한다 김형욱의 가족은 안전이 염려돼 파리의 호텔로 정기적으로 확인전화를 함으로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지트로 부터 항공기 출발까지 적어도 36시간이 이상렬에게 필요했다.
7페이지 | 10월 7일 돈 잃자 중정운영 일본클럽으로 유인
그러므로 김형욱의 가족과의 전화연락을 끊어야 했으며 이 때문에 김형욱에게 호텔을 바꾸기를 설득한다, 김형욱의 심리를 이용해 리츠호텔은 너무나 알려진 호텔이라 프랑스 거주 한국인들의 눈에라도 띄면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10월 7일 아침 김형욱은 웨스트엔드호텔로 숙소를 바꾸지만 호텔변경에 대해 가족에게 연락하는 등 아주 중요한 사항을 간과하게 된다. 그 뒤 이상렬은 ‘내일 스위스에서 지난번처럼 남은 금액을 전달하면 모든게 끝날 것이므로 오늘 밤은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두사람은 그랑체롤에 가게 되고 저녁 7시쯤 계속 돈을 잃고 있던 김형욱에게 기분전환삼아 일본인이 운영하는 비밀클럽에 가자고 이야기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클럽 예약하는 것을 보여준다. 당연히 전화를 받은 상대는 아지트의 요원이었고 일본인여인이었다.
8페이지 | 10월 16일 청와대 지하실서 김형욱 사살
이상렬은 중앙정보부의 지시내용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는 김형욱을 아지트로 데려갔으며 마취를 시키고 이른바 ‘소포’는 쉽게 통관돼 한국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실렸다, 10월 7일 파리시간으로 밤 12시, 프랑스 중정책임자 이상렬은 전문을 날렸다 ‘닥터 하인즈 서울행’, 바로 이 사건 뒤 이상렬은 런던을 통해 서울로 들어간다,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그는 이후 중정 전남 지부장으로 승진한다, 10월 16일 부산에서 폭동[부마항쟁을 의미]이 일어날 때 김형욱은 중정요원들에 둘러싸여 청와대 지하에 위치한 한 장소로 끌려가서 박대통령과 재면하게 된다.
김형욱은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박대통령이 ‘더러운 배신자’라고 첫마디를 던지자 ‘배신자는 당신이다, 나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친다, 중정부장 김재규, 대통령수석경호원[경호실장을 의미]차지철, 그리고 또 다른 3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박대통령은 욕설을 퍼부으며 김형욱에게 직접 두발을 발사, 제거했다.
선데이저널 USA 박우진 기자 http://www.sundayjournal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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