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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폴리젠>뉴폴토론방, 글쓴이: 원시소년똘비]
동아컴 토론방 시사발언대에 김병희박사님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박정희 대통령님과 대구사범 동기이면서 친구분으로서 울산에 살며
올해 91세이시지만 매우 정정하셔 책도 쓰시고 하루 한편씩 글도 올린답니다.
댓글 달아주시면 매우 좋아하셔 꼬박꼬박 멋있게 답변도 해주시지요.
현대사의 산 증인으로서 경부고속도로,한일회담,카이스트등을 박대통령님께
처음 건의 하여 관철시키신 분이시고 수학박사님인데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아인시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소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화학 대사전을 13년에 걸쳐서 편찬하신 분입니다.
이과출신은 아마도 모르시는 분이 없을겁니다.매일 매일 나라걱정 뿐이고요....
60년대에 초대카이스트이사장,한양대문리대학장,인하공대학장등을 역임하시도 했고요...
박대통령의 문교부장관 제의도 거절하신 영원한 강골 수학자 이십니다.
참, 존경하는 분입니다.사실은 저도 박사님 덕분에 이런 토론방에도 오게됐답니다.
요즘 나라걱정과 박근혜님 땜에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글에서는 박대통령님과 친구인 사실을 조금 숨기더라고요.
친구여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것같이 보일까봐 그런것 같습니다.
근혜지지자님들 한번 가셔서 박사님에게 힘을....
가시면 살아있는 역사와의 대화요 영광일 것입니다.....
[아래는박대통령과김병희 박사님의 일화중 하나입니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도 그대로 인용된 박사님의 자서전의
일부분 입니다. 참고로 자서전은 비매품이라 팔지 않습니다.박사님에게
댓글로 부탁하시면 그냥 줍니다.
의장실(議長室)의 무상출입(無常出入)
내가 최고회의(最高會議)에 가서 해가 바뀌자마자 박(朴) 의장(議長)의 문교부(文敎部) 연두순시(年頭巡視)가 있었는데, 최고회의(最高會議)측의 공식(公式) 수행원(隨行員)으로 김 용순 문사위원장(文社委員長), 정 세웅 최고위원(最高委員) 그리고 자문위원(諮問委員)인 내가 되었고, 행정부(行政府)측에서는 김 현철 내각수반(內閣首班)과 문교부(文敎部) 장차관(長次官)*1이 안내역(案內役)을 맡았다. 이상 6 명이 그날 행사(行事)를 모두 마치고 문교부 임시청사의 현관에서 의장 각하(閣下)에게 하직 인사를 드릴 때였다.
박 의장이 승용차(乘用車)를 타려고 한쪽 발을 차에 걸친 채 배웅하는 그 6 명 중의 한 사람인 나를 보고, "야! 병희(昞熙)야, 오늘 오후(午後)에 내 방에 좀 오너라."라고 했다. 모두가 놀랐다. 그때까지 각하(閣下)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그 사람의 성(姓)에 관직명(官職名)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상례(常例)였는데, 이름만을, 그것도 아무 존칭(尊稱) 없이 불렀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날 오후 나는 처음으로 의장실(議長室)에 가게 되었다. 비서실(秘書室)을 경유해서 비서실장실(秘書室長室)에 들어가니 10여 명의 선착자(先着者)가 각하(閣下)를 배알(拜謁)하려고 각자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별을 단 군인도 있었고, 브리핑 차트를 들고 있는 행정부(行政府) 각료(閣僚)들도 있었다.
약 2 시간을 기다려서 겨우 부관(副官)의 안내를 받아 의장실(議長室)에 들어섰더니, 박 의장이 나를 보고 하는 첫말은, "이 자식아, 한 건물 안에 있으면서 왜 안 왔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들어오는데 2 시간이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함부로 올 수야 없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부관(副官)을 불러서, 앞으로 나만은 그의 집무실(執務室)에 무상출입(無常出入)할 수 있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후로 나는 비서실이나 비서실장실을 경유하지 않고, 각하(閣下) 만이 사용하는 비밀(秘密) 통용문(通用門)으로 출입하게 되었으니, 이거야 말로 나로 하여금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인양 착각케 했던 것이었다.
다시 본 인간(人間) 박 정희(朴 正熙)
의장실(議長室)에 무상출입(無常出入)하게 된 나는 30년 지기(知己)였건만 인간(人間) 박 정희의 새로운 편모(片貌)를 보게 되었다. 내가 의장실(議長室)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의 첫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장식물(裝飾物)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특별한 기물(器物)도 없었다. 마치 야전사령관(野戰司令官)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가 앉는 의자(倚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손님용 나무 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품(最高品)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膳物)로 받은 미국제(美國製) "바이스로이"를 피웠는데, 그것도 저것도 아닌 "아리랑"을 그가 피우는 것을 보고 놀랐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단돈 10 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그날 식단(食單)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 원짜리 우동을 50 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 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받았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執權者)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感銘)을 받았다.
박 의장의 애국심(愛國心)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는 당시 장충단(奬忠壇) 공원(公園)에 있는 의장(議長) 공관(公館)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에 국민학교 6 학년인 장녀(長女) 근혜(槿惠) 양을 운전병(運轉兵)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박(朴) 의장(議長)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車)가 니(네) 차냐, 그 차가 아버지 차냐?" 하고 힐책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네)가 감히 등교용(登校用)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오른다. 박물(博物) 시간에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보아가며 크고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를 박(朴) 군이 차지했었다*1.
그는 일찍 경북(慶北) 선산군(善山郡) 구미보통학교(龜尾普通學校)를 수석(首席)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首席)들 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大邱師範)의 9 : 1이라는 입시경쟁(入試競爭)을 돌파한 엘리트였고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라는 평점(評點)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頭腦)는 비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질타(叱咤)하는 작전계획이라면 저 미국 육사 출신의 엘리트들조차 우리 박(朴) 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기에 스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강도강작전(漢江渡江作戰)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정희(正熙)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大邱師範)에 입학해서 본관(本館) 2층이었던 1년 2조(組)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던 "희(熙)"를 우리 둘은 공유(共有)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兄弟)와도 같은 친근감(親近感)을 느꼈었다.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義憤)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다.
어느 날은 박물교실(博物敎室)의 뒤뜰에서 대구(大邱) 출신 S 군과 약골(弱骨)인 주 재정(朱 宰晶) 군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는 주(朱) 군을 단숨에 때려 눕혀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麥酒甁)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박(朴) 군만이 뛰어들어 그 S를 때려 눕히고 주(朱) 군을 구출했었다.
그 용기와 그 지모(智謀)와 그 애국심 등이 박 군의 그날[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그에게 넘겨진 대한민국에는 GNP 83 불(弗)의 헐벗은 백성들이 사월남풍(四月南風)에 대맥(大麥, 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2.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悲運)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 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同胞)들의 굶주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 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長壽煙)이나 희연(囍煙)*3 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回想)하면, 그 "아리랑"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人間) 박 정희(朴 正熙)!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어찌 나의 이 추모(追慕)의 정(情)을 알이오. 오늘에 와서 그를 비방(誹謗)하는 일부 인사(人士)들도 있지만, 진정 그를 아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나는 그 당시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만사에 청렴결백(淸廉潔白)했던 그를 보았지만,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후일의 가족을 위해 어느 구석 진, 이를테면 MBC 재단 같은 곳에 그들의 생활비 정도는 나올 무엇인가는 마련해 두었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 세상에 그처럼 결백한 집권자(執權者)가 또 어디 있었을까, 있을까?
칵텔 파티에서 만난 박 정희(朴 正熙) 의장과 필자 1962
이 사진은 1962년의 어느 날 반도호텔에서 열렸던 칵텔 파티에서 박 정희(朴 正熙) 의장과 필자가 대담하는 장면을 누군가가 찍은 사진인데, 당일의 그 파티 장에 일반 사진사나 신문 잡지사 등의 사진기자는 완전히 출입이 금지되고 오직 최고회의(最高會議)의 공보처(公報處) 사진반만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훗날 알았다. 이 사진이 찍힐 때, 나는 한양대학교(漢陽大學校) 문리대학장(文理大學長)이었는데, 그후 최고회의(最高會議)의 자문위원(諮問委員)이 되었을 때, 어느 날 나의 책상 위에 발송인도 밝히지 않고 이 사진이 보내졌었다.
첫댓글
보릿고개하면아직도생각남니다.보리죽에다가.쑥을넣어서끓인히멀건죽정말이지.박대통령의애국심.10원짜리우동한그릇드시고나라걱정하시든모습이아직도눈에쟁쟁함니다...
대단한 열정이십니다~!그분에비하면 아~!나는~!
21세기 님, 실바람 님, oribal 님, 댓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게시문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폴리젠' '동아 토론방' 등, 여러 싸이트들에 가시면, 많은 '박 대표 지지자들' 의 글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댓글도 써 주시고, 추천 버튼도 눌러 주시면, 그 분들의 활동에 힘을 더해 주는 것입니다.
포항체철.조선 ,자동차,비료공장, 전자,과학기술 모든 것이 박정희 대톨령 영감님이 만든 것이고, 그이후에는 어떠한 대통령도 만들어 놓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어려운 나라 발전시킨다고 한평생 고생 고생하신 박정희대통령영감님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여 오네요!
박.정.희.라는 이름 세자를 부르기에도 황송한 그런 어른 이십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일생을 살다 또 그렇게 수이 가 버릴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 분의 진실 앞에서면...
맨 위에 지도자 한 사람이 옳바라야 아래 사람들이 도독질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집권 후 한 1년쯤 하는체 하다가 에이! 될데로 되라지 하고 포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기면 이젠 끝장이 날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어른과 육영수 여사의 따님이신 근혜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스크랩 해 갈ㄲ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