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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된 국민 방위군)
사진 출처1. 개요2. 첫 부대 소집3. 죽음의 행렬4. 예산 유용5. 사망자 수6.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7. 이야깃거리8. 다른나라에선9. 관련 항목 대한민국의 수치스러운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의 최대의 병크 중 하나이자 대형참사.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인해 100여일 사이에 전투에 참가는 커녕
총도 못 만져본 장병 수 만명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엄청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명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점은 적군이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아니라, 적을 맞아 싸울 전투병력이 나라의 손에 전선에 투입 한번 되지 못하고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 팟캐스트 방송
이이제이는
서북청년단 특집,
보도연맹 특집 연타 이후로 텀을 두고 국민방위군 사건 특집을 편성하여 청취자들로부터 짜증나서 못 듣겠다 라는 반응을 받은 적도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 서술될 내용들이 당시 방송에 나온 내용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의 자국민 학살 투성이라는 점이다.
이 사건으로
눈물의 장관 붉은 깃발의 인민 영웅 남조선해방 로력 영웅 수훈자 독립유공자인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제1공화국 정부에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부통령직을 사표 제출하는등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부정부패와 비리가 어떻게 국가와 사회를 무너뜨리고 뒤흔들 수 있는가를 반면교사로 보여준 사건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1950년,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에 의해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요인들은 그 동안
조선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남쪽의 장정들을 인적자원 차원에서 중국군에 의해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15일에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2월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돼 행렬에 나섰다. 사실 중국군의 진격이 너무 빨라 그로부터 겨우 2주 뒤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두른 게 이해는 가지만, 아직 행정체계고 뭐고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전토의 90%를 상실했다 수복했다 다시 상실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인원이송을 기획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재앙을 예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시 작전처장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부와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느라
[1] 양곡권 지급이 제대로 안 되었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 끼니는 제대로 해결될리가 없었으며, 심지어
인민군 치하에 의용군 대접만도 못할 정도였다. 의용군에서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했던 서태원
[2]의 증언에 의하면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라고 회고할 정도.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까지 유례없는 혹한이었는데,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되었으니 정부가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는데,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차량같은건 있지도 않았다.
이뭐병. 따라서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 질병이 창궐하여 몸이 약해진 사람들이 열병으로 수도 없이 죽었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재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여명을 수용할 것을 명시했다고 한다.
[3] 하지만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게다가 병력 운용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간부, 장병들의 월급마저 계산해두지 않고
[4] 알아서 해쳐먹으라는 식으로 건을 던져주었다. 거기에 교육대 간부 및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극우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5] 특히 사령관인 김윤근은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은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6] 말하자면 군행정에 대한 지식이나 책임감, 직업 윤리의식이 부족하며 당장 자기보전과 부의 축적부터가 우선일 수 밖에 없는 친정부 민간단체 인력을 간부로 충원한 것.
따라서 이러한 간섭은 군부 쪽의 반감을 사게 되며,(비 전시때라도 군인 양성에는 퇴역한 예비역장교들이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전선에 나갈수 없는 상이현역장교들이 간부가 되는것이 보통) 교육대 간부와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하면, 자기들에겐 수용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7]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
[8]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윤익헌이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원. 그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가량 될 때였다. 그를 수사한 인사가 훗날
"윤익헌이 돈을 쓰듯이 물을 써봤으면 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쓰듯이 돈을 쓰는"게 아니라...
[9].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게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 못한 것이었고, 빠듯한 예산에서 윗사람부터 사병까지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
젤리공장 또는 엿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의해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빈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젤리(엿) 공장의 경우 일단 만들어는 두었으나, 생산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쌀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안 산 거였고, 생선을 산다더니 장부상 기록의 1% 정도만 구입한 등등이 있다.
여담으로 국회 조사를 통해 밝혀진 횡령액수는 주로 대구의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유용된 것으로 전국 각지의 교육대
[10]에서 얼마나 빼돌려졌을지는 불명이다. 또한 횡령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민간업자와 일부 군인들의 연계로 벌어진 거대한
군납비리 사건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군납(軍納:
명사 인가를 받은 민간 업자가 군에 필요한 물자를 납품함)이라는 말은 군에서 소요제기, 예산심사, 입찰 등등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업자의 납품이 이뤄지고 대금을 받는 과정 까지가 군납이며 이 과정에서 비리가 벌어졌다면 군납비리 라고 하는데, 국민방위군 사건 전반에서 군납비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대부분 민간업자 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들이 부대내의 장부조작과 횡령으로 예산과 물자 다 해쳐먹었으며, 정부에서는 아예 국민방위군이 살아남기 위해 최소 한도로 필요한 쌀과 동계피복을 보급 해줄 개념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군의 물품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사용할 것인가 등은 군 내부의 군수(軍需:군사물자) 문제이며, 군 예산과 군수물자를 횡령하여 마음대로 유용한 국민방위군 사건은 군수비리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책임소재가 파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도 전부 국민방위군 간부들이지, 민간업자 등의 존재는 아예 없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직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사망자 5만~8만명 추산하고 있다.
#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계측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11] 6.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영향[편집]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하지만 재판으로 선고된 형량이 너무 낮자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고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으며 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이종찬 참모총창은 고심 끝에 적용법이 바뀔 경우
[12]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재심을 명하여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풍조를 불식시키는 차원에서 본래 비공개인 군사재판을 공개로 돌리고 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하여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려 했다. 그리고 당시 사령관 김윤근을 이승만이 빼돌릴거라는 소문이 돌아
[13] 이들은 대구 근교야산에서
공개처형된다. 이렇게 이례적인 조치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유당 정권에서조차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승만 다음 세력자였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은 후계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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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 총살 집행 순간.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윤익헌 등이 횡령한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단순히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더 높은 쪽'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의혹이 당시에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나오고 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횡령한 자금 중 적지 않은 액수가 신정동지회 등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외에도 다른 '
높으신 분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심증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자들이 신속히 총살형을 당해 버리는 바람에 이 돈이 얼마나 누구에게, 어떤 용도로 흘러들어 갔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의 추적은 거의 불가능한 편이다.
꼬리 자르기한국전쟁 기간에 우리쪽 군인들이 추위 속에서 굶주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거의 여기 끌려갔다고 보면된다. 당시 한국군의 병참이 형편없긴 했어도 국민방위군처럼 형편없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보고 정권 수준에 크게 실망한
이시영은 부통령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시인
신동엽과
정진석 추기경 또한 이 때 차출되었다. 신동엽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민물
게를 잡아 생으로 먹었다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고 간암으로 악화되어 요절하게 되었고 정진석 추기경은 이 때의 충격으로 삶에 회의를 느껴 최종적으로는 신에게 귀의했다.
당시 한 의원이 실상 파악을 하러 갈 때 가마니를 뒤집어쓴 어느 거지 방위군이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가냐고 묻자 이 병사는
"김일성에게 간다 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국민방위군 자체가 북한의 공격을 막는다는 1차 목표 이외에도 서북청년단과 이승만 친위세력이
군과 별도 조직으로서의 무장을 하는 단체를 가진다는 목적으로 보기도 하나, 친위대를 만들겠다는 목적에 이렇게 예산배정과 보급을 개판으로 하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별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당시 통역장교인
리영희는 이때 참상을 목전에서 봤다. 그는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리영희는 ''6·25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행위였다. 이승만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
#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겪은 리영희는 이후 그의 사상 체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종 책임자는 당시 참모총장인
정일권 김정일권 인데 정일권의 한국전 회고록이나 이후 최종판 회고록이 대단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수록한 반면에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 조선일보 논설고문이기도 한 홍사중의 회고에 의하면 운이 좋아서 당시 진주의 국민방위군 교육대에서 군수처 경리담당을 맡고 있었는데 국민방위군 상부에서 감사가 와도 서류는 절대 들춰보지 않고 교육대장 및 군수처장의
접대만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군수처장이 수사가 시작되었으니 같이 도망가야 한다면서
직인까지 찍혀있는 귀향증[14]을 들고 왔다고 한다. 더 기막힌 건 홍사중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경리담당에서 군수처장 보좌관으로
승진이 되어 있었다고...
한 마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병크 중의 병크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한마디로 이건
일본군이나 독일군이 미군 또는 소련군 포로에게 했던 짓거리를 자국의 예비병력 대상으로 저지른 꼴이다. 예를 들자면 독일군이
독소전쟁에서 사로잡은 소련군 포로들을 식량도 지급하지 않고 혹한에 수백킬로미터를 걷게 하여 포로 사망율이 60%에 달했던 사례이나
[15], 일본군의 유명한
죽음의 행진이 있다. 하지만 전자는
애초부터 소련군 포로를 절멸시키려는 의도로 실시된 것이고, 여기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인들은 후에 전쟁이 끝난후 전범 재판에 넘겨져 사형과 같은 엄벌을 받았으며, 후자는
이걸 군대는 커녕 도저히 인간이라고 불러줄 수 없는 놈들이 정신나간 상태로 저지른 일인데, 이 국민방위군 사건의 관련자들은
적군도 아니라 자국군에 이런 짓을 하고도 종전 후에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천하의 개쌍놈들인지 알 수 있다.
보도연맹 사건이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되는 특정 계층의 국민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실행한 사건이라면, 이건 자국의 예비병력에 대한 관리 의무를 방기한 끝에 제노사이드에 필적하는 참사가 벌어진 셈인 것이다.
그외에도 울릉도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월권행위를 해서 민폐를 끼쳤다. 여기서 기자와 담화하는
국민방위군의 박경구는
백의사의 간부이자,
독립유공자이다.
#,
#1955년에 정부가 한번 신문광고를 내서 국민방위군 사망자 신고를 받아 331명을 인정해준 적이 있었다.
장난?? 그런데 이때 전사통지서나 그밖의 서류가 있어야만 신고를 접수해주었는데 과연 국민방위군 소집자들중 몇이나 제대로 된 서류를 받았을는지...
[16]2002년 경북 영천
[17]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upload.namu.wiki%2Fupload%2F%25EA%25B5%25AD%25EB%25AF%25BC%25EB%25B0%25A9%25EC%259C%2584%25EA%25B5%25B0%2520%25EC%2582%25AC%25EA%25B1%25B4%252F%25EA%25B5%25AD%25EB%25AF%25BC%25EB%25B0%25A9%25EC%259C%2584%25EA%25B5%25B0_%25ED%259D%25AC%25EC%2583%259D%25EC%259E%2590%25EB%2593%25A4%25EC%259D%2584_%25EC%259C%2584%25ED%2595%259C_%25EC%25B6%2594%25EB%25AA%25A8%25EB%25B9%2584.jpg)
2010년 활동을 종료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유해발굴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애초에 자료가 제대로 있거나 남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한 막장중의 개막장이라...여담으로, 야인시대 88화에서 이기붕 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분노하면서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실은, 자신의 꼬붕들에게 화를 냈을리가 없다.
첫댓글 국부님의 클래스!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