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기록문화사 박금옥의 [금강을 품은 세종]-시간 속 이야기들은 모래톱에 스며들고
모래가 고운 것이 특징인 금강, 모래톱에는 새들이
(錦江)!! 글씨 그대로 비단강이다.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깊은 산이든 넓은 들이든 굽이굽이 휘돌아간다.
거대한 물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는 지방마다 부르는 강의 이름도 특색이 있다.
처음 세종시로 왔을 때 접한 금강의 모습은 참으로 특이했다.
강폭은 그렇다 치더라도 군데군데 모래가 쌓여 잡초가 무성해서 흘러야 하는 강물은 그대로 정체된 듯하다
내가 살았던 부산에는 낙동강 하류에 있어 강폭도 넓고 항상 수량이 많아 그야말로 도도하게 흐르는 물길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또한 육아를 위해 서울살이할 때도 눈에 보이는 한강은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면서 도심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흘러간다.
강에 대한 내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곳을 살아온 이웃에게 물었다.
왜 금강은 강폭은 넓은듯한데 군데군데 모래가 쌓여 있어 강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고.
돌아온 답은 본래 금강은 수량보다도 모래가 고운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철이 바뀌고 가을이 깊어지면서 모래톱의 어느 정도 잡초들이 마르고 난 뒤에서야 곱고 부드러운 모래톱이 드러났다.
그 모래톱 위를 철새들이 날아와서 먹이활동을 하는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한두리 대교 아래 모래톱:세종특별자치시를 경유하는 금강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과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의 면 계에서부터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동과 경계를 이루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까지 26.7㎞에 이른다.
금남면 부용리와 부강면을 이어주는 다리
세종특별자치시는 전월 산광 원수산을 배산으로 하고 금강을 임수로 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리적 형국에 자리한다.
세종특별자치시의 금강 양안은 넓은 들이 형성되어 있어 곡창지대를 이루었다.
풍족한 금강의 수원은 연기면의 장남평야와 금남면의 들녘을 적셨고, 주민들은 사시사철 금강이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금강은 애환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여름이면 물놀이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물고기를 잡아 부족한 양식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강은 예고 없이 범람하여 농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인명까지 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1946년 대홍수 때 급강둑이 터지면서 대평리는 완전히 수몰되면서 지형마저 바꿔 놓기도 했다.
한두리 대교 건너편의 첫 마을
금강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부강면 오호리로 유입되는 곳의 금강은 매호(梅湖), 금호리 앞은 검담(黔潭), 현 부강면 면 소재지 앞 금강은 주용강(芙蓉江), 미호천과 만나는 합강리 앞 구간은 초강(楚江)이라 하였다.
미호천과 합수되는 곳에서부터 예전 양화리 앞 금강까지는 삼기강(三岐江)이라 불렀고, 독락정 앞 강은 독락강·라강이라 하였다.
금강에 다리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나루를 통하여 강 건넛마을과 소통하였다.
주로 인근의 재래시장을 왕래하기 위한 나루였고, 학생들의 통학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강 건너에 토지를 두고 있는 경우 마을에서 배를 마련하여 나루를 운영하였다.
5일마다 개설되는 재래시장은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9년 기록에 의하면 강경 시장과 접해 있는 황산나루의 경우 1일 최대 통행인이 1,300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강경이라는 큰 규모의 시장이었기에 가능한 규모이다.
연기 지역의 경우 부강장과 대평장이 형성되어 있던 점을 고려하면 이곳 시장을 이용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나루를 통해서 이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강은 금강의 소강 종점으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으며 포구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관할 금강 본류에는 수많은 나루가 있었고 대로상의 나루는 현 나성동에 있던 나성 나루로, 인근에 독락정이 있어 일명 ‘독락정 나루’라고 불렀다.
나성 나루는 천안⇄전의⇄연기⇄진잠을 연결하는 대로상에 있었다.
예전 연기현에서 금사역을 거쳐 나성리에서 나루를 건너면 금남면 대평리였다.
대평동의 강 건너편 나성동 일대
따라서 나성 나루는 위로는 연기와 전의로 통하고 아래로는 회덕과 진잠으로 통하던 중요한 나루였다.
연기에서 청주로 가기 위한 동진 나루는 연기현에서 보통리를 경유하여 내판⇄저산역⇄청주로 통하는 길에 있었다.
금강의 나룻배는 오랫동안 주민들의 발이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버스 운행이 시작되면서 나루는 쇠퇴하였다.
포구는 상업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공급과 소비가 이루어지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부강 이상까지 선박 운항이 가능한 것으로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크게 활발하지는 않았다.
부강 상류로는 여울이 많고 토사가 쌓인 곳이 많아 배의 통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와 자연조건은 부강을 내륙 포구로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화물을 수송하던 역할이 바뀌었다.
1930년대에 들어 강바닥이 토사로 높아져 배의 운항이 어렵게 되면서 부강은 자연스럽게 포구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1929년에 작성된 『조선 하천 조사서』에 의하면 부강포구와 대평 나루의 주요 반출 물은 곡물이었고, 주된 반입물은 소금이었다. 무엇보다 부강 포구는 인근 청주나 보은, 옥천 등 내륙 깊숙이 소금과 어패류를 공급하던 포구로 기능하였다.
세종보의 전경: 금강 수위 관리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금강의 세 곳에 보를 설치하였다. 세종보는 세종특별자치시 세종공원 맞은편에 있고, 하류로 내려가면 공주보와 백제보가 있다.
창연정에서 바라본 금강:세종시를 한 바퀴 휘감아 돌아 공주로 이어진다.
오른쪽에는 세종시 최대의 전원마을인 청벽 마을 풍광이 좋은 강변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세워
지나가던 시인 묵객들은 한 번쯤은 정자에 올라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홍유손 : 1431(세종 13년)~1529(중종 24년)
연산군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홍유손은 67세의 나이에 노비로 강등되어 제주도로 유배됐다.유배 8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75세의 나이로 해배 됐다.
그 후 벼슬을 포기하고 세상에 은둔하여 백수(白壽)를 누리고 살다가 신선(神仙)이 되었다는 홍유손이 남긴 ‘소총 유고(篠䕺遺稿)’에 소개된 시조 '제강석(題江石), 강가의 돌에 적다’이다.
홍유손은 76세에 첫 장가를 들었고 7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80세에 아들 홍지형을 낳고 99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아들 홍지형은 아버지가 무오사화로 고초를 겪었던 경험으로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박금옥 문화기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