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헌고택 평면도
괴헌고택 전경(배면에서 본 모습)
영주 괴헌고택(榮州 槐軒古宅)
중요민속자료제262호/경북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877번지/2009.10.30
괴헌고택은 두월산 끝자락 경사진 대지에 내성천을 앞에 두고 서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은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현 주인의 7대조인 괴헌槐軒 김영金榮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집으로서 광무 8년(1904)에 김영의 손자인 김복연이 일부 고쳤다고 한다. 이 집은 외풍을 막아주고 낙엽 등이 모인다 하여 잘 산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삼태기형 명형국지名形局地 한 가운데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은 1972년 수해로 앞에 있던 정자인 월은정月隱亭(정면 3칸 측면 2칸)과 행랑채가 완전 붕괴되어 행랑채를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월은정 현판은 현재 사랑채 앞에 달려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뒤집어진 ㄴ자형 사랑채가 이어진 형태로서 경상북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 형의 폐쇄구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이 집의 특징이다.
괴헌고택 사랑채
새로이 복원한 행랑채를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가 중문이 있는 안행랑채와 붙어있어 평면상으로는 한 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벌대 정도 높이에 누마루처럼 높게 지어지고 지붕도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마치 별동 건물처럼 느껴지고 있다. 평면상으로는 전면 3칸 측면 4칸 반 규모로 되어있다.
사랑채는 김영에 의해 1904년에 중수된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는 흔하지 않은 직절익공집인데 아마 중수할 당시가 구한말이어서 사회적으로 기강이 와해되는 시기라 이전만 해도 일반 사가에서는 지을 수 없었던 익공집을 지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채의 익공구조는 일반 익공집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익공집의 경우 주두 바로 위에 보가 얹혀지고 그 위에 도리가 올라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보아지가 받게 된다.
그러나 괴헌고택 사랑채에서는 보가 주두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별도 설치된 장혀 위에 올라 타 있다. 그렇다보니 보 위에 도리가 얹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와 보가 같은 위치에서 만나고 오히려 도리에 보가 타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되었다. 구조상 특별한 장점이 없어보는 이런 구조를 왜 선택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임을 틀림없다.
사랑채 전면은 좌측으로부터 두 칸이 방이고 우측 모서리 한 칸이 대청으로 되어있다. 대청은 전편 한 칸 측면 두 칸 규모로 대가의 대청으로서는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그 뒤로 방이 두 칸 붙어있다. 사랑채 앞으로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는데 계자난간으로 멋을 내어 마치 누마루와 같은 분위기가 나도록 하였다. 퇴칸은 기둥 밖으로 반의 반 칸 정도 돌출시켜 일반적인 퇴칸보다는 넓게 하였다. 이렇게 퇴칸을 넓게 하였기 때문에 대청을 두 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대청에 있는 성주단지
사랑채의 중앙 칸인 어칸에는 앞서 말한 월은정이라는 현판이 붙어있고 우측에는 관수헌觀水軒, 좌측에는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월은정은 앞서 말한 정자의 것이고 관수헌이 사랑채의 당호이다. 이런 당호를 붙인 것은 아마도 집 앞 내성천을 바라다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관수헌觀水軒은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주변 경관에 딱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다.
사랑채를 제외한 안채는 ㄷ자 형에서 건넌방 쪽이 앞으로 두 칸 돌출된 형태이다. 돌출된 두 칸은 창고를 들였다. 안채는 민도리집으로 전면 5칸 측면 2칸인 삼평주 오량집이다. 안채는 부엌,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한 칸으로 구성된 전퇴집이다. 전퇴집이라고는 하지만 퇴칸이 한 칸이니 전퇴집이라고 하기도 무엇하다.
안채 대청
안채에는 집안에서 제일 높은 최고신으로 가내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인 성주신을 모시는 성주단지가 놓여있다. 이제는 옛날 집에 가도 성주단지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이렇게 된 것은 집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미신이라 생각하여 모두 치워버렸기 때문이다. 안주인의 말로는 이 집은 한번도 비운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성주단지가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 안방 앞 퇴칸을 보면 다른 곳과 달리 고미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안채 전퇴는 대부분 연등천장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미반자를 설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집안 구석구석을 알뜰하게 쓰려는 노력으로 이렇게 고미반자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고미반자를 설치하여 만들어진 공간인 고물의 출입구는 쉽게 위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일제나 해방 후 격변기에 비밀 피신처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채 안방 뒤쪽으로 돌출 된 2칸은 찬방으로 쓰였던 곳으로 집 주인 말로는 80년 전쯤 달아낸 것이라고 한다.
안채 퇴칸부분 천정(다락으로 쓰기위해 반자를 했음)
이 집에서 눈여겨볼 부분 중 하나는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안채 마당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채에서 안채가 자칫 쉽게 들여다보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장공간의 일부를 활용했다. 안채로 출입하는 문이 설치된 곳에는 벽장벽을 연장하여 설치함으로써 문을 열더라도 안채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사랑채에서 안채의 출입구는 두 곳인데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각각에 출입구를 두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칸반 규모로 동쪽 언덕 위에 배치하였다. 맞배지붕으로 전면에 퇴칸을 둔 직절익공집이다. 전체적인 느낌으로 볼 때 사랑채를 중수한 시점에 다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익공은 사랑채와 달리 보아지가 보를 받는 일반적인 익공구조이다. 사당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여 격을 달리하였으며, 작은 집이지만 단순하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중앙 어칸에 있는 문은 양개문으로 하고 좌·우측 협칸 문은 편개문으로 하여 입면의 변화를 준 것이 돋보이는 집이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문과 가림벽
괴헌고택은 사대강 사업 일환으로 추진되는 송리원댐 때문에 수몰되어 얼마 후 이건移建한다고 한다. 괴헌 고택 포함하여 주변 13개 지정문화재가 수몰되기 때문에 이건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문화재라는 것이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재를 함부로 옮겨도 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집은 불상 등과 같은 유물과는 다르다. 집은 제 위치에 있을 때 가치를 갖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집은 풍수와 주변 풍광을 고려하여 집을 짓기 때문에 원래 장소에 있어야만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집도 풍수형국을 고려해서 집을 앉혔다. 그 풍수형국은 그 집이 원래 위치한 곳에서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다른 곳으로 이건한다면 어떻게 풍수형국을 따질 수 있겠는가.
괴헌고택 사당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바로 집의 일부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집에서는 풍광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병산서원의 핵심은 누각인 만대루이다. 만대루 자체는 건축적 관점에서 볼 때 수준 높은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만대루에서 바라다보는 낙동강과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병산은 병산서원을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건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괴헌고택과 같은 살림집도 마찬가지이다. 제 자리에 있어야 참 맛을 알 수 있다. 괴헌고택 사랑채와 사당에서 바라다보는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는 것은 집을 지은 사람이 집터를 잡을 때 풍광을 고려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집을 이건移建하게 되면 앞으로는 결코 그런 풍광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사당에서 바라본 풍광
집에서 살던 사람이 무엇을 보고 생활하는가에 따라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격이 달라진다. 만일 그 풍광을 없애버린다면 그 집은 이미 죽은 집이다. 박제된 동물이 동물이 아닌 것처럼 전시된 집도 집이 아니다. 사람도 살지도 않고 풍광도 잃어버린 집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사태를 볼 때마다 언제나 우리나라 위정자들이 제대로 문화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참 아쉽다. 문화에 대한 단견이 문화재에 대한 홀대를 가져오는 것이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다. 문화재지표조사 조차 몇 개월 만에 뚝딱해치우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