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의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다
“인류학은 사물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 문화다양성과 생명권 수호의 최전선을 지키는 ‘행동하는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의 『사물의 표면 아래』는 인류학의 렌즈로 우리 삶과 세계를 들여다본다. 세계대전과 현대성의 탄생, 코로나19로 치부를 드러낸 미국의 실체, 탐험과 신성의 의미, 코카의 악마화와 마약 전쟁 등 다양한 소재의 에세이 13편을 담은 이 책은 편견과 인식의 한계로 인해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을 보여준다. 웨이드 데이비스는 역사, 문화, 환경, 종교 부문의 여러 편린들을 자신의 경험과 통찰, 연구와 결합해 ‘현대 사회의 지도’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로 직조해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인류학 교수인 웨이드 데이비스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생물학을 공부하고 민속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50년 가까이 동아프리카, 보르네오, 페루, 폴리네시아, 티베트, 토고, 콜롬비아, 바누아투, 북극과 그린란드 등 지구 곳곳의 오지를 연구 현장 삼아왔다. 그러면서도 “사회 변화를 예고하고 더불어 그 지적 기반을 다지”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해내는 것이 인류학자의 책무임을 잊지 않아, 말과 글로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데에도 열성적이었다. TED의 인기 강연자로 활약하는가 하면, 200여 개 대학과 여러 기업체의 강단, 22개 언어로 번역된 23권의 책과 무수한 매체의 지면을 통해 사회적 목소리를 내왔다.
그렇게 쉼 없이 세계를 누비던 그가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이게 된다. 연구실 안, 빽빽한 텍스트 숲으로 빠져든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쓰도록” 고무됐다. 동시에 팬데믹 상황에서 현대 문명의 무능을 목도하고, 이 위기가 “의학과 공중보건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그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권 대신 서구 사회의 민낯으로 시선을 돌렸고, 집필 후 6주 만에 500만 독자에게 읽히고 소셜미디어에서 3억 6,200만 회 노출된 「허물어지는 미국」을 필두로 현 시기 인류 최대인 문제인 「기후 불안과 공포를 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갈등을 색다른 시각으로 살핀 「약속의 땅」, 전망을 고민하는 청년에게 보내는 「딸에게 전하는 말」 등의 글들이 탄생했다. 여기에 우리의 문명 체계를 만든 역사적 사건들과 그 속에서도 늘 생명력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다룬 글들이 함께 엮여 이 책이 완성되었다.
탄소 순배출을 0이 되게 하겠다는 등 실현 불가능한 약속만을 내지르며 기후 불안을 조장하는 현재의 접근법으로는 기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거나, 마약 암거래와 그로 인한 해악을 없애는 방법은 합법화라는 주장, 북극과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탐험가들을 영웅이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나 헛된 명예욕에 희생된 인물들로 바라보는 관점 등 이 책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은 주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어떤 주장을 관철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 무언가를 판단하고 평가하기 전에 “충분한 정보가 바탕이 되게끔 판단을 미루라”고 말하며, 우리의 지식과 관념 그리고 모든 사건과 현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도, 단 하나의 정답만을 갖고 있지도 않음을 강조한다.
뿌리 뽑혔으나 생동하는 이들의 인류학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얼굴을 감춘 여인이 등장한다. 아름다운 꽃으로 가려놓은 ‘사물의 표면 아래’ 여인의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현상 아래에 보다 깊고 본질적인,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이 그림의 제목은 “대전(La Grande Guerre)”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마그리트는 이 작품에 대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더라도 그 속에는 추악한 진실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그리트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희생되었으나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시민들의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린 「전쟁과 추모」에서도 다뤄지고 있으며, 웨이드 데이비스는 책 전반에 걸쳐 자신의 문화, 자신의 시대를 성실히, 묵묵하게 살아나갔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를 통해 우리의 세상에는 “다른 존재 양식과 다른 사고방식, 다른 삶의 비전”이 존재하며, “모든 사람은 언제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붙들고 춤추고 있”음을 알려준다.
뒤틀린 세상의 구조를 이야기하면서도 시종일관 열린 자세와 긍정적 태도,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 책은 “인류학의 렌즈가 최선의 효과를 낼 때 우리는 중도의 지혜를 보고” “가능성과 희망의 관점”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물의 표면 아래를 보는 눈과 포용력 있는 자세를 갖게 하는 이 우아하고 지적인 에세이는 맹목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 서문에서
인류학은 판단을 지우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모두 인간인 이상 윤리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판단에 충분한 정보가 바탕이 되게끔 판단을 잠시 미루라고 할 뿐이다. 인류학의 렌즈가 최선의 효과를 낼 때 우리는 중도의 지혜를 보고 또 어쩌면 그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 지혜란 이 책의 모든 글에서 전해지기를 바라 마지않는 가능성과 희망의 관점이다.
■ 옮긴이 후기에서
인류학이 “이해와 관용과 공감의 백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특히 든든했다. 저자가 다룬 사안뿐 아니라 삶의 모든 면을 대할 때 늘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눈앞의 좁은 현실에 파묻혀 불이 하나둘 꺼져만 간다고 느낄 때,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 때 이런 관점 하나가 생각의 키를 다시 잡아줄 것이다. 한쪽으로 판단을 내리고 고민을 멈출 때의 아늑함은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한 갈래 길만 남기면 그 길이 절망으로 향할 때 달리 택할 길이 없다는 사실도, 외면할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선 모르지 않는다. 여러 갈래 길을 볼 수 있을 때 희망이 생기고 그 희망은 다시 여러 갈래 길로 나타난다는 것을 저자의 글과 만나며 되새길 수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유대인 친구가 불교 진리에서 위안을 찾는 것이, 남성 신체로 태어난 사람이 여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인류학의 자손이다. (중략)
지혜는 어느 영성 전통에나 있다고, 사람은 어디서든 늘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춤추고 있다고, 잼은 보존해도 문화는 보존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우리 종의 가장 숭고한 발견일 공감과 포용의 비전을, 모든 인류는 서로 이어져 있어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과학적 깨달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ㅡ67쪽
마사다가 기억의 안개 속에서 떠올라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제 마사다는 역사 속 전설이 아니라 유대인의 생사를 건 투쟁의 상징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중세 이래 보지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인재였다. 유대인으로서는 제2성전이 파괴된 후로 전연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시온주의를 정립해 구원하려던 유대인 남녀와 어린이 수백만 명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잿더미로 사라졌을 때 시온주의의 꿈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런 참상 앞에서 시온주의는 사막을 푸르게 가꾸는 것과는 아주 무관한 일이 되었다. 포위당했으나 절대 항복하지 않을 유대인의 실존만이 중요했다.
ㅡ86쪽
당신이 아는 모든 삶, 현대성의 모든 감각, 모든 실존적 의문, 분출되는 모든 혼란, 모든 신경증적 확언 또는 고통은 플랑드르의 진창과 피에서 생겨났다.
1차 세계대전은 현대성의 지렛목이었다. 재즈, 조이스, 달리, 콕토, 히틀러, 마오, 스탈린은 모두 이 대학살의 자식이었다.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은 19세기에 태어났으나 정통에서 심히 어긋났던 그들의 생각(종에 돌연변이가 생길 수 있다, 자기 사고의 정상성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사과는 뉴턴이 기술한 것만큼 단순하게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은 이 전쟁 후에야 꽃을 피우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ㅡ111쪽
어느 아침 다리우스 황제가 두 속민의 대표를 불러모았는데 한 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문화였고 다른 민족은 죽은 사람을 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리우스는 각 대표에게 서로의 죽음 의례를 따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양쪽 모두 생각만으로도 경악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명백한 결론을 도출했다. 모든 문화는 각자의 전통을 선호하고 다른 문화의 전통은 멸시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등장하기 5세기 전에도 이 영민한 관찰자는 의식의 여명이 밝아온 이래 다른 무엇보다도 인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특성인 문화적 근시안을 식별해냈다. 우리 방식이 옳은 방식이고 그 밖의 모두는 스스로 모를지언정 우리가 되는 데 실패한 이들이라는 생각 말이다.
ㅡ174~175쪽
인도를 자신들이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영국인에게서는 다른 여러 문제 외에도 특히 제 것 아닌 다른 렌즈로 세상을 보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명에 가차 없이 헌신했으며 힌두교를 우상 숭배이자 미신이라 경멸하라고 배운 이들, 하나같이 오직 눈으로 보고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지적 전통의 산물이었던 이들은 인도가 영적 울림으로 결속하고 종교 신념과 관습의 유대로 이어진 하나의 땅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또 언제나 존재했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ㅡ183쪽
모든 문화는 저마다의 역사에서 나온 산물이다. 시베리아에서 순록을 치는 네네츠족, 콜롬비아 아마존 숲에서 생활하는 바라사나족, 말리의 반디아가라 절벽에 사는 도곤족은 문화적으로 프랑스인, 러시아인, 중국인만큼이나 공통점이 없다. 전자를 원주민으로 묶는 것은 후자를 산업민이라는 억지스러운 범주로 포괄하는 것만큼이나 자의적이며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ㅡ201쪽
런던과 옥스퍼드의 커피하우스는 ‘페니 대학’으로 통하게 되었다. 자릿값 1페니를 내고 들어가는 그 공간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열린 대화와 토론에 열을 올린다는 뜻이었다. 파리의 커피하우스에는 런던 사람 못지않게 말 많은 남자들이 모여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이 본인들의 거처보다 다소 크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그곳은 혁명의 샘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이어진 무장 요구는 볼테르가 가장 좋아했던 커피하우스인 카페드포이에서 시작되었다.
ㅡ211~212쪽
월마트, 쉘, 아마존, BP, 토요타는 모두 넷제로를 목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엑손과 마찬가지로 자사 사업으로 생기는 탄소 발자국 전량을 해결하겠다는 곳은 하나도 없다. 세계 최대 육가공업체인 JBS는 하루에 동물 900만 마리를 도축하며, 지난 5년 동안 이 회사의 탄소 배출량은 50퍼센트 증가했다. 그러나 이 기업 역시 2040년까지 넷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서약했다. 《뉴욕타임스》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 약속은 흡연자가 20년 안에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하는 것 정도의 의미다. 실상 이런 기업 다수는 그저 문제를 미래로 떠넘겼을 뿐이다. 마이클 셸런버거의 말처럼 기후 변화 부정의 시대가 물러가고, 기업들이 이행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기후 약속을 내지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ㅡ286~287쪽
내가 오래전에 알게 된 신성 추구는 종교와 무관하다. 그것은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성은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다. 신성은 지금 이 순간 지구라는 파란 보석 위에 존재하는 것의 찬란함을 체현하고 그 광휘를 발한다. D. H. 로런스는 이렇게 썼다. “부처와 예수의 말씀 전에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있었다. 예수와 부처의 말씀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이팅게일은 여전히 노래하리라.” 순례자의 목표는 한 마리 새처럼 “하늘에 녹아들면서도 천상과 지상을 노래로 채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늘을 지나면서도 흔적일랑 남기지 않고 신성과 하나되는 것이다.
ㅡ322~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