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고 업어주시는 하나님
이사야 46장 1~13
1. 어버이 주일 유래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어버이날, 어버이 주일의 유래는 원래 미국에서 온 선교사님들이 어머니 날을 지키자고 권면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버이 주일은 본래 어머니 주일이라는 명칭으로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 교회에는, 이 교회 주일 학교에서 26년간이나 꾸준히 봉사해 온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이었습니다. 훌륭한 주일학교 교사였던 그녀가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 선생님인 자비스 부인을 기념하기 위한 추도식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사는 자비스 부인의 딸을 추도식에 초청했습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자비스 부인의 딸 안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추도식이 있던 날, 식순의 하나로 안나에게 어머니인 자비스 부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때 안나는 그녀의 어머니인 자비스 부인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을 가르치면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늘 생각해 보라고 했던 것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카네이션 꽃을 추도식 제단에 바쳤습니다. 추도식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비스 부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안나의 말과 태도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추도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할 것을 그 자리에서 결의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어머니 날 운동은 특히 부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와너메이커도 이 운동의 취지에 적극 동의하여 그 활동을 도왔습니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험난했던 시대의 어머니들은 지혜와 용기로 가정생활을 이끌어 감으로 현재의 미국을 이룩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어머니 날\' 운동은 사회 여론이 형성되자 1914년 미국 국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일로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어머니 주일은 그 후에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 또한 중요함이 강조되면서 그 명칭이 어버이 주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어버이 주일이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머니 주일의 정신을 일반 대중에게도 전한다는 의미에서 5월 8일 (1955년 당시 어머니 주일)을 어머니날로 제정, 공포하였다. 지난주간 어버이 날은 지났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대부분 둘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어르신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도 준비한 것 같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계명부터 사람과 관련해서 주신 계명인데 사람과 관계에서 첫 번째 주신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신 5:16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2-3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부모를 공경함으로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땅에서 생명이 길고 잘 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이사야 46장의 시대적 배경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포로 생활로 많이 죽고, 이제 얼마 살아남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애절한 마음으로 내 말을 들으라고 외치십니다. 1.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사46:1-2) 바벨론이 섬기는 신은 벨과 느보입니다. 벨은 바알이라는 말로 주라는 뜻이고, 느보는 벨의 아들인데 이는 지혜의 신을 말합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벨우상과 느보우상은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함으로 엎드려지고 무너져 짐승의 수례에 실려 나갔습니다. 바벨론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우상들은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의 무너짐을 보여 주시고 이제 남은 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사46:3-4). 바벨론이 망할 때 우상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이 망할 때 그 바벨론이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신상들이 모두 파괴됩니다. 한 때 굉장히 떠받들어졌던 신상과 우상들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겨룪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되심을 증거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벨과 느보, 부자지간의 신들입니다. 벨은 바벨론의 주신입니다. 뜻은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마르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느보는 그의 아들 뻘되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이 이제는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원래 바벨론은 축제 때마다 벨과 느보를 어깨에 메고 다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축제 때마다 어깨에 메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벨을 섬겨라! 느보를 섬겨라! 마르둑이 우리를 구원했다! 느보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 그래서 벨과 느보를 언제나 어깨에 메고 나와서 그들의 축제의 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가 망하자 그 신상들이 피난 가는 백성들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원래는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이었는데 그 신들이 나라가 망할 때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어깨를 무겁게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피난 봇따리도 많은데 짐이 되어 더 괴롭게 한다고 말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평상시에 그토록 도움을 요청했던 신상들이 막상 위급한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의지했던 것들이 위급한 순간에 과연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의지하고 내가 기댔던 사람이 내 인생에 큰 짐이 되어서 나를 괴롭게 합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내 뒤통수를 치는 경험을 우리는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우상으로 삼는다면 그 사람이 결국은 내 인생을 더 고되게 하고 힘들게 할 뿐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세상의 권력과 돈을 우상으로 삼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를 구원해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 때문에 내 인생이 거기에 얽매여서 그 돈의 굴레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나 사람이나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이 만든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기대하고 구해야 될 분은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다.
3. 거짓 우상과 참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 우상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백성들이 피난 가던 중에 허무한 우상들은 그들을 구원해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업고 계셨고 안고 계셨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발에 이르기까지 영원토록 우리를 안고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고 안고 가시고 업고 가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 시키셨을 때,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따라올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업고 홍해를 건너가셨습니다. 사막의 그 메마른 땅을 지날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하지 않도록 하시고 그들을 안고 가시고 품어 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함께 안고 사자 굴에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군왕들과 세상의 수많은 권력들이 우리를 지켜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안고 계셨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항상 그렇게 계셔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마치 태아가 모태에서 보호받으면서 그 보호받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심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외로울 때는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오시고 우리가 괴로울 때는 나를 돕는 자의 모습으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힘겨울 때는 강력한 힘을 가진 권능자의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너무나 잘못된 죄악의 길로 갈 때는 나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시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어떤 한 형상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때마다 시마다 다른 모양으로 다른 모습으로 인도하셔서 이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이겨내고 살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꼭 만나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업어주는 정
오래전 어느 항공사의 승무원이 즐거움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미국 LA로 가는 비행기에 어느 미국인 부부가 입양한 한국 아기를 데리고 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아기가 요란하게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당황한 미국인 부부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때 두 승무원 아가씨가 아기의 옷을 벗겨주고 번갈아 가며 아기를 안아주었습니다. 미국인 부부가 몇 시간 후 잠이 곤히 들었지만 승무원은 아기를 업고 있었습니다. 아기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선뜻 자신의 등을 내어준 것입니다. 승무원의 등에서 아기도 곤히 잠이 들었습니다. 한국인 승객들은 승무원들을 칭찬하며 격려하였는데 승무원은 아마 아기가 미국인 부부를 보고 낯가림 심해 울었던 것 같다고 하며 오히려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했답니다. 한국 아기를 입양한 미국인 부부도 우리 승무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한국 아기는 업어야 잘 자나 봅니다. 업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등을 아기에게 내어 준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아기에게 내 등을 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비행기 승무원들은 비행기가 비행하는 동안 쉬지도 못하고 승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아기까지 없고 일을 하는 것은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는 승무원이 아기를 업고 있는 사진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들을 때 코끝이 찡한 미담입니다. 원래 한국인은 모체접촉이 가장 많은 민족입니다. 아기를 업어서 키우고, 젖을 먹고 자라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엄마가 들어나가고 집에 없으면, 집안에 형님이, 맏 언니가 동생들을 업고 키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모체접촉이 적어지고 어머니의 품에서 아기를 떼어놓고, 업어주지도 않고, 밖에 나갈 때는 바구니에 넣어 짐처럼 들고 다닙니다. 이런 아기들이 병에 노출되고 육체적으로 약해지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업어주는 것이 건강한 것은 하나님의 정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강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시기 위하여 업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9:4에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걸어간 것 같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이 ‘어부바’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서 옮겨놓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60만 명을 다 업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리가 부러졌겠습니다. 모성애가 강한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료에 보니 답이 다 다릅니다. 포유류나 조류가 모성애가 강하다고 합니다. 난생류 보다 포유류가 일반적으로 모성애가 강하다고 합니다. 원숭이도 모성에가 굉장히 강합니다. 새끼를 업고 안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험한 일을 만나면 원숭이는 새끼를 품에 안고 내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본능은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낳으시고, 안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에는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아주시고 입을 맞춰주십니다. 그리고 지키십니다. 시편 17:8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업으십니다.
5. 이스라엘은 태어나면서 안겼고 업혔습니다.
이사야 46:3에는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은 특별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날 때부터 하나님은 업어 키우신 것입니다. 안고 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성애를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모성적 표현이 많습니다.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합니다. 너를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먹여 주었다고 합니다. 업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모두가 하나님의 모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독수리 날개로 비행기 태워주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발이 부르트고, 피곤하고, 넘어지고, 지치고, 쓰러지는 것을 차마 못 보셔서 안고 업고 가시는 것이 더 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보호구역이 참 많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상수원 보호구역, 철새 보호구역, 문화재 보호구역, 삼림 보호구역, 야생동물 보호구역, 해양 보호구역, 반딧불 보호구역, 군사시설 보호구역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곳도 완전한 보호구역은 없습니다. 항상 빈 곳이 있고, 더렵혀지기 마련입니다. 미국에는 ‘인디언보호구역’ 있습니다. 말이 좋아 보호구역이지 인디언들을 집단수용하는 곳입니다. 인디언들의 종족 보존을 위하여 보호구역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 틈에서 잘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디언 보호구역에 날짜를 맞추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용돈을 주고, 연어 떼가 올라올 때는 다른 사람들은 못 잡게 하지만 연어잡이의 특혜를 줍니다. 이 인디언보호구역은 절대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보호구역에서 나오면 더이상 보호받지 못하고, 보조비도 없습니다. 그 후로는 위험에 노출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들은 깨어 있을 때보다 잘때에 더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영아는 만져 주지 않으면 성장에 지장이 있습니다. 아기들을 잘 만져주지 않으면 때로는 죽기까지 합니다. 어떤 분이 교육 연구를 하였는데 생후 첫 18개월 동안 꾸준히 안아주지 않고, 반응해주지 않으면 평생 남을 신뢰하는데 애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아주시고, 업어주시고, 만져주시고, 손을 잡아주시고, 눈을 마주치시고, 동행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반응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고 하나님을 평생 신뢰하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아플 때 하나님은 안아 주십니다. 손을 잡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등에 안겼고, 품에 업혔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 아래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6. 구하시려고 품고 업으셨습니다.
이사야 46:4에는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업을 것이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안아주시고, 업어주신 하나님은 노년이 되기까지, 백발이 될 때까지 품을 것이라고 합니다. 늙을 때까지 업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품고 구하여 내십니다. 이사야 43:6에는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억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로 된 백성을 풀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하나님의 품에서 내 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품에 품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여 내십니다. 할렐루야! 민수기 11:12에는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급하였지만 계속 투정하고, 불평하고 모세를 속상하게 합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모세는 낳지도 않은 백성들을 왜 품어야 하느냐고 불평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뜻은 ‘하나님도 너를 품듯 너도 백성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양의 문’의 비유를 보세요. 요한복음 10:28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목자는 이리에게서 한 마리의 양도 끝까지 품에 안고 빼앗기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리에게 내 양을 내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목자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면 백발이 될 때까지 품고, 안아주시며, 평안케 하십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샬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의 동화에 ‘오페이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페이로는 헬라말로 ‘업다’, ‘지다’(to bear, to bring)라는 뜻입니다. 오페이로라는 아주 힘이 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의 부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힘이 센 장수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장수가 마귀를 보고는 놀랍니다. 오페이로는 마귀가 더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마귀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힘이 세지만 한 번은 십자가를 보고는 놀랍니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의 주인의 부하가 되기로 작정하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찾기에 지친 오페이로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을 업어 강 건너편에 옮겨주는 일을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 하루는 한 소년이 강을 건너겠다고 하여 등에 업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별로 무겁지 않던 아이가 갈수록 납덩이처럼 무거워졌습니다. 강 중간에서 도저히 무거워 발을 땔 수 없어 물어보았습니다. “누군데 이렇게 무거워요?” 그때 그 아이는 “나는 예수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워요?”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지고 가기 때문에 무거운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페이로는 다른 사람을 업어주고 섬기다 가장 힘센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늘 함께 가십니다. 내가 힘들 때 업어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 버리세요. 천국가는 그날가지 우리 주님과 함께 춤추며 즐겁게 인생길을 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