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일 학국 국적을 취득하는 두봉 레나도 주교. 그의 한국생활 65년은 '가난의 영성'을 강조한 신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1929년 9월 2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두봉 주교는 1950년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953년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두봉 주교는 1954년 6·25전쟁 직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라고 손꼽히던 한국에 파견됐다. 1969년에는 천주교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로 서품되며 초대 경북 안동교구장에 임명됐다.
두봉 주교는 유교적 전통이 깊은 안동지역에서 "외국인 선교사는 뒷바라지만 하면 된다. 10년간 교구 자립기반만 닦고 물러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대화와 상호존중을 통해 선교활동에 전력했다.
안동교구의 관할 구역 대부분이 농촌지역이라 농촌문제와 농민운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가톨릭농민회를 설립하고 농민회관을 세웠다.
또 상지전문대학(현 가톨릭상지대학교), 상지여자중학교, 상지여자고등학교 등의 학교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약속한 10년이 거의 다 돼 가 이미 사임서를 제출해 뒀을 무렵인 1978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인 일명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자 두봉 주교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당시 안동지역 농민이자 가톨릭 신자인 오원춘 씨가 군청에서 보급한 불량 씨감자에 항의했다가 납치, 고문을 당하자 두봉 주교를 중심으로 한 안동교구가 농민 인권 문제로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두봉 주교는 강제추방명령까지 받는 등 큰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교황청의 지지로 농민과 함께하는 선교활동을 계속 펼칠 수 있었다.
두봉 주교는 주교서품을 받았으나 권위주의적인 사상을 배격해 주교직을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조차 사용하지 않는 등 경북 북부지역 평신도 사역에만 전념했다.
은퇴 후에는 행여 후임 교구장에게 부담을 줄까 봐 안동교구를 떠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 공소에서 14년간 피정 지도 등을 하면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는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제의에 따라 지난 2004년 경북 의성군 봉양면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손수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인근 주민들과 나눠 먹는 소박한 삶을 살며 여전히 피정과 강의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안동교구 측은 "한국말은 물론 음식 취향까지 주교님은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다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늦게라도 주교님이 꿈에 그리시던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해드려 너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