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4월9일 MBC라디오 싱글벙글쇼 백일장에 방송*
산의 아들
안영식
나는 산골 중의 산골이라는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약초며 더덕 산도라지 복령 등을 캐서 팔고 겨울에는 산토끼를 잡아 팔아서 기성회비도 내고 공책, 연필도 사서 쓰면서 산을 벗 삼아 자라온 산골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소장수를 하셔서 동부레기나 부룩송아지들을 사 오시면 산으로 끌고 가서 종일 소와 함께 산에서 지내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아연제련소가 들어오면서 우리는 농토를 팔고 풍기로 이사를 왔다.
성인이 되어 나는 서울에서 건설회사의 중장비 기사로 일하다가 사장님이 부도를 내고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1986년 처음으로 빚을 내어서 중고 굴착기를 사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강개발, 지하철 공사, 등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전방에 농지 개간 사업이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강원도 철원 최전방으로 갔다.
지뢰와 폭발물이 하루에도 몇 개씩 나오고 심지어 옆에서 일하던 굴착기가 지뢰를 건드려 장비는 대파되고 기사가 사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그 참담한 현장을 목격하고서도 나는 그곳에서 일을 했다.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행동이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중고 굴착기라서 그만큼 또 고장이 많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에 두고 전방에서 3년이란 세월을 보냈지만 굴착기 수리비와 수금이 원활하지 못하여 생활은 나아지질 않았다.
그래도 간신히 빚은 갚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일이 너무 힘들어 쉬기도 할 겸 대성산에 더덕 캐러 갔다.
험한 산을 돌아다니다 배도 고프고 해서 다래나무 넝쿨 아래서 빵을 먹고 있는데아무리 봐도 인삼 같은 풀이 있어서 뿌리를 살금살금 캐어보니 뽀얀 뿌리가 드러나는 것이 인삼을 닮았다.
산에 있으니 산삼이 아닌가?
먹다 남은 빵과 우유를 산삼과 함께 돌 위에 가지런히 놓고 산신령님께 세 번의절을 올렸다.
"산신령님 감사합니다,"
"조상님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없다 해는 뉘어 뉘어 넘어가고 배도 고프고 해서
하산을 하려는데,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서 혀를 날름 그리며 비켜주질 않는다.
하는 수없이 산등성 쪽으로 올라가서 돌아가려고 한참을 가다 보니 '따따따따' 소리가 나길래 살펴보니 이번에는 독사보다 더 큰 살모사가 꼬리를 흔들면서 독기 어린 표정으로 혀를 날름 그린다.
"네 이놈 누구 맘대로 산삼을 훔쳐 가느냐?"
"제자리에 심어두지 못할까,"
꼭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뱀들이 산삼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산삼을 버릴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그래, 한 번만 더 뱀을 만나면 그 자리에 심어주고 와야지 하고 다시 돌아서 산비탈을 지나오는데 물소리가 들린다.
목이 마르던 차에 물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물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노랗게 물든 산삼들이 밭을 이루고 있었다.
심봤다! 심봤다!
골짜기가 떠나가게 나도 모르게 외쳤다.
넓적 엎드려 절을 하고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무려 열 뿌리나 되고 어린 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었다.
이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내가 살면서 처음 느끼는 황홀의 경지였다.
연장도 없이 산에 갔기에 나뭇가지를 꺾어서 땅을 파면서 캤다
가장 큰 것 한 뿌리는 단풍나무뿌리 사이로 들어가서 도저히 캘 수가 없어 뇌두를 잡고 뽑았다
뚜~욱! 하고 산삼이 반동강이 나고 말았다
바지에 흙을 문질러 닦아서 씹어 먹었다
산삼 특유의 향기와 알싸함이 온몸에 퍼진다
천종 산삼을 무려 아홉 뿌리나 켔다.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내가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산삼을 판 돈으로 새 굴착기 계약금 내고 승용차와 피아노를 구입하고 전방 생활을 마감했다
우리 조상님들이 위험한 곳에서 어서 나가라고 산삼을 하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남방송이 밤새도록 들려오고 더러는 조명탄이 대낮처럼 밝았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서 3년 동안의 전방 생활을 마감했다.
그 후에도 많은 공사장을 다니다가 산삼을 팔아 서서 산 굴착기는 낡아가고 IMF를 맞아 일거리는 없고 해서 소형 굴착기로 바꿨다.
서울 명륜동 지하 터 파기 현장에서 일하다가 업자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4개월치 작업비를 못 받았다 아이들 둘이 대학을 다니는데 학비를 구하지 못해 정말 힘들었다.
돈을 받기 위해 소송, 압류를 신청했으나 공탁금을 낼 돈이 없어 포기했다.
노동부에 진정서를 넣어봤으나 우린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자이므로 노동청 소관이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고 법무부, 청와대, 국민 고층 처리 위원회 등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봤으나 정부기관의 답은 모두가 하나같이 '귀하의 민원은 노동부로 이첩하였습니다' 하는 답변뿐이었다.
KBS 방송국에 호소를 하였더니 취재파일 4321이란 프로그램에서 '체불노임에 우는 사람들'이란 재목으로 방송도 나왔으나 같이 일하던 근로자들은 모두가 돈을 받고 해결되었지만 나는 개인사업자란 이유로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돈 없고 백 없는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돈을 받기 위해 아까운 세월만 허비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못 배운 한을 가슴 깊이 숨기고 오로지 두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어려움도 참고 살아왔는데, 아! 이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렵게 마련한 집이라도 팔아야 한단 말인가?
부동산에 집을 내어놓고 나니 눈앞이 깜깜하였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인천에서 꽤 먼 경기도 모처에 있는 산에 올랐다.
세상을 향해 소리라도 질러보고 목놓아 울어도 보고 싶었으나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될까 봐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고 응어리진 가슴을 쓸어안고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울어 볼 요량으로 길이 아닌 산비탈을 헤치면서 하산하다가 산삼을 열여덟 뿌리나 켔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 산삼을 팔아서 아이들의 학비를 낼 수 있었다.
'또 한 번 하늘이 내린 선물을 받았다.'
그 후로도 장모님이 알츠하이머병이 들어 계실 때
산삼을 캐서 드렸고 어머님도 드렸고 드러는 팔기도 했다.
지금은 소백산 아래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고 있지만 산에 자주 가지 않는다.
내가 산삼을 하사받을 만한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바람이 들면 다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도 열심히 굴착기로 땅을 파고 있다.
*산삼을 먹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내 나이 예순여섯, 지금도 젊은이들과 똑같이 일하고 있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로 15번 길 195-5
안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