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水攻에 철옹성도 백기투항 저지대 성 주변따라 제방쌓아 포위 장마기간 닥치자 삽시간에 물바다 원래 그는 출신이 매우 비천하여 꼴을 베어 파는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오다 노부나가가 출병할 때 그가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노부나가가 물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 “너무 가난해서 살아갈 수 없으니 일거리를 주십시오.” 노부나가는 그에게 똥 푸는 일을 시켰다. 그가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했는지 냄새는커녕 흔적 하나 없었다. 선조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야기로 그의 성실성을 잘 보여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37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띄면서 무장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면서 장수로서의 자질을 쌓아갔다. 뛰어난 전략전술과 용병술로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때 그의 주군(主君) 오다 노부나가가 반대파에 의해 살해됐다. 그는 복수를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야마자키 전투에서 승리해 원수를 갚은 후 주군의 숙원사업이던 일본 통일을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즐겨 구사한 전술은 신속한 기동과 독특한 공성전이었다. 그는 평야에서의 전투보다 성을 공략하는 전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성을 공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을 철저히 봉쇄함으로써 승리하는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물로 공격하는 수공전술이었다. 초창기의 통일전쟁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적군이 농성하는 성 주변을 봉쇄해 승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미키 성을 포위해 공격했던 1578년 전투에서 그는 외부 지원을 철저히 차단했다. 먼저 성을 지원해 줄 가능성이 있는 주변의 작은 요새들을 파괴해 버렸다. 그런 다음 적이 성 안의 병력을 구하기 위해 보낸 주력지원군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강력한 무사와 승려 지원군이 포위를 뚫으려고 했지만 히데요시의 함정에 빠져 실패하고 말았다. 식량이 떨어진 미키 성의 성주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돗토리 성을 공략했던 1581년, 히데요시는 2만 명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다.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는 식량 공급 루트를 완전히 차단했다. 성으로 갈 수 있는 강어귀에는 정예군을 배치했다. 쌀을 가득 실은 적군의 배 65척이 히데요시의 정예군에게 전부 침몰되면서 결국 성주는 항복하고 말았다. 초기의 봉쇄작전에서 성공한 히데요시는 그 이후 전투에서 물을 이용한 수공작전을 펼쳤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연 강수량이 많다. 기온과 습도가 높고 동중국해에서 동진하는 기압골의 영향으로 비도 자주 내린다. 특히 장마기간인 5월 하순부터 7월 초, 가을 장마기간인 9월 상·하순께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 히데요시는 주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성들이 낮은 평야나 습지 부근에 위치한다는 점과, 비 내리는 날이 많다는 날씨 조건을 철저히 이용했다. 일본 통일의 강력한 걸림돌이었던 모리 데루모토와의 1582년 전투 때다. 히데요시는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던 다카마쓰 성을 공격했다. 그는 먼저 3만 명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다. 그런 다음 성 주변으로 물을 막을 수 있는 둑을 쌓았다. 12일 만에 길이 4㎞, 폭 21.7m, 높이 7.2m의 제방이 완성됐다. 제방이 생기자 성은 마치 호수 안의 섬 같은 모양이 됐다. 여기에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모리 데루모토의 군대는 포위된 성을 구하기 위해 밀려왔으나 히데요시군에 격퇴됐다. 식량이 떨어지고 물에 잠긴 다카마쓰 성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584년에 있었던 타케가하나 성 공방전 때다. 히데요시는 다카마쓰 성을 둘러쌌던 것보다 더 크고 길고 높게 제방을 쌓았다. 물 안에 갇힌 지 한 달 만에 적이 항복했다. 일 년 후 벌어진 오타 성 공략 때도 히데요시는 똑같은 방법을 썼다. 오타 성도 제방으로 둘러싸인 지 한 달도 못 돼 항복하고 말았다. 수공작전이 뛰어난 전술이 된 배경에는 첫째, 식량 공급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 둘째, 성 안이 다 물에 잠겨 버리므로 저항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히데요시가 제방을 만들어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만 하면 비는 자주 내리므로 성은 곧 물바다가 돼 버린다. 제방을 쌓아 성을 물로 공격했던 성들이 대개 한 달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 이유다. 세계 전사에서도 보기 드문 히데요시의 공성전술은 바로 날씨를 이용한 수공전술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파격성과 역동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단순화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결정하고 기민하게 행동했다. 이와 같은 파격성과 역동성, 그리고 신속성 등을 바탕으로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송치웅의 ‘일본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리더십과 국가’ 중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리더십에는 이 외에도 일에 대한 성실성과 주군에 대한 충실성이 큰 바탕이 됐다. TIP-진심으로 섬겨 얻어내는 전술 추운 겨울이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장군에게 발탁돼 신발 담당 심부름꾼으로 일할 때다. 날이 무척 추웠다. 장군의 신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히데요시는 가슴 안에 신발을 품어 따뜻하게 녹였다. 따뜻한 신발을 신은 장군은 생색내지 않고 진심으로 섬기는 히데요시에게 감격했다. 그날로 히데요시는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이후 탄탄대로의 길을 걷게 됐다.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사람이 센 리큐라는 사람이다. 히데요시가 장군이 돼 센 리큐의 집에 차를 마시러 오게 됐다. 아침에 오기로 했는데 밤이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센 리큐는 현관으로 들어가는 정원에 놓인 디딤돌에 돌 크기에 맞는 방석을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 눈이 그친 후 센 리큐는 방석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히데요시는 자기가 밟는 디딤돌들에만 눈이 쌓이지 않은 것에 주목했다. 그는 생색내지 않고 자기를 섬기는 센 리큐의 정중함과 존경의 마음에 감동했다. 이후 센 리큐는 평민이었음에도 권력의 핵심까지 올랐다. 성경에는 무슨 일을 하든 주(主)님께 하듯 하라고 한다. 주님을 섬기듯 상관을 충심과 진심으로 섬기면 복 받는다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한 최고의 전술은 충심으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닐까?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