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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올바른 이해에 의한 바른 신앙
1. 청교도
청교도의 용어
청교도의 역사적 배경
2.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
프로테스탄트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
다양한 성격으로 분파된 청교도
3. 청교도 신앙이 끼친 긍정적인 장점과 부정적인 단점의 영향과 바른 신앙을 지향해 나가는 성경 이해
1. 청교도
청교도의 용어
'청교도'란 용어는 영어로는 “프레시전”(Precisian) 또는 “퓨리탄”(Puritan)으로 불린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560년경부터이다. (1)“프레시전”(Precisian)이란 용어는 ‘꼼꼼한 사람’, ‘몹시 의식적이며 형식을 중요시 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좋은 뜻에서 이렇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꼬치꼬치 캐며 따지는 사람’, ‘형식적인 외식하는 사람’, ‘교리적으로 딱딱하여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비판적 관점에서 이다. 이는 (2)“퓨리탄”(Puritan)으로 불리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용어는 ‘순결한 사람’, ‘엄격한 사람’, ‘근엄한 사람’을 뜻하며 ‘교회를 정화하여 깨끗하게 하는 사람’을 의도하지만, ‘깨끗하며 순결한 척 하는 사람’이라는 비아냥조로 쓰였다. 그런가 하면 (3)“프레스비테리언”(presbyterian)이라고도 표현하였다. 이는 ‘장로파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이 모두에는 까다롭고 비판적이고 자만하며 독선적이고 위선적이라는 멸시와 비방, 조롱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청교도란 용어가 사용된 배경
청교도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국가는 잉글랜드, 곧 지금의 영국1)이다. 그리고 이 용어가 사용되게 된 때의 잉글랜드는 헨리 7세(A.D.1485-1509)로부터 시작하여 헨리 8세(재위:1509-1547), 에드워드 6세(재위:1547-1553, 헨리 8세의 셋째 부인 시모어의 아들), 그레이(재위:1553),2) 메리 여왕(재위:1553-1558),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재위:1558-1603)으로 이어지는 튜더 왕조에 의해서 로마카톨릭교회(Catholic Church)와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Anglican Church/Anglican Communion)가 뒤바뀌는 혼란을 겪으며, 성공회가 영국국교회로 자리하고 있는 상태에서이다.
(1) 헨리(Henry) 8세 : 헨리(Henry) 7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영국교회를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교회인 국교회(국가교회) 성공회를 세운 인물이다. 이 국교회 성공회는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항하는 종교개혁에 있음으로 전혀 새로운 교회의 출현에 있어 온 루터교회나 개혁교회와는 또 다른 성질이었다. 그것은 헨리 8세가 왕비 케서린(Catherine)3)과 이혼하고 궁녀였던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고자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은 로마카톨릭교회와의 불화로 인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한 영국교회는 영국국교회(성공회)로 있게 된다. 헨리 8세는 1534에 수장령(국왕지상권, Act of Supremacy)를 발표하고 영국 국가와 함께 영국 교회의 머리가 됨으로써 교황과 결별하였다.
그러한 헨리 8세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저항을 하였다. 이때의 로체스터의 주교로서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인 피셔(John Fisher, 1469-1535)는 “나는 그리스도의 법을 계속 따르겠다”라고 하며 수장령을 거부하였으며, 모어(Thomas More) 또한 반대하였다. 그러자 헨리 8세는 피셔와 함께 모어를 처형함으로써, 수장령을 반대하며 국교회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면 왕권에 맞서 위협하는 자들이므로 프로테스탄트라도 박해를 하였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며 가로 막는 로마카톨릭교회와 결별을 하는 것인 만큼 여기에도 박해하였으니, 1536년에는 대역령(大逆令, Act of High Treason)을 내려 로마카톨릭교회를 탄압하고 수도원을 폐쇄하여 재산을 몰수하므로 국고 수입을 올렸다.
헨리 8세는 로마카톨릭교회와 결별하면서까지 결국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였으나, 앤 볼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간음죄를 씌워 처형하고, 세이모어(Jane Seymoure)와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헨리 8세는 비록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를 반대하는 로마카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영국교회를 국교회로 만드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것이 영국교회를 개혁하는 종교개혁에 있지는 못하였다. 교리와 신학, 그리고 예전에서는 로마카톨릭교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변혁된 개혁에는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헨리 8세는 당시 유럽에 정착되고 있던 루터주의 또는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도입할 마음은 전혀 없이 단지 앤 볼린과의 결혼의 정당성을 띠고 교회에 휘둘리지 않는 왕권의 강화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교황과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놓고 갈등과 대립을 겪은 그로서는 로마카톨릭교회와의 성향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칼빈의 신학과 신앙에 의한 사상이 영국교회에 도입됨으로써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의한 왕권의 약화로 자신의 권력이 교회에 미치지 못할 것이 우려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국교회로 자리하는 개혁의 모습을 취하되 교회를 왕권 아래 두고자 실질적인 개혁을 해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처럼 정치적 목적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등장한 영국국교회 내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내부적인 신앙 논쟁이 일어났다. 교황 없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길을 가는 국교회에 만족하는 성직자들과 여기에 불만을 갖고 로마카톨릭교회와 완전히 결별하여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할 것을 요구하는 성직자들로 나누어진 것이다.
(2) 헨리 8세가 죽자, 에드워드 6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영국국교회 지도자들의 자문을 받으며 6년간(A.D. 1547-53) 다스리다 요절하였다. 이 재위 기간에 에드워드는 교회의 예배의식을 바꾸었으며, 예배에서 라틴어성경 대신 영어성경을 사용하게 하였고,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출판하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켄터베리 대주교인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대륙의 개혁 지도자인 부서(Martin Bucer)를 초빙하여 개혁신학을 소개하는데 힘썼으며, 42개 신조를 채택하여 칼빈주의적 신학의 프로테스탄트 위에 영국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았다.4)
따라서 에드워드 재위 기간에는 부왕 헨리 8세에 의해서 시작된 영국국교회가 계속 이어졌으며, 영국국교회 지도자들의 자문에 의한 영국국교회가 보다 로마카톨릭교회의 성향에서 벗어나 프로테스탄트 성향을 띠는 개혁이 있었다.
(3)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는 영국은 왕위를 계승하는 후계자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으며,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인 케서린에게서 낳은 공주인 메리(Mary)가 왕위를 계승(A.D. 1553-58)하므로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 37세에 여왕으로 즉위한 메리는 아버지 헨리 8세와 어머니 케서린 간에 있은 불화를 겪은데 따른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 케서린의 신앙을 따라 영국을 로마카톨릭교회의 신앙으로 복귀하는데 힘썼으며, 1534년 스페인의 황태자 필립(Philip) 2세와 결혼해서는 철저한 로마카톨릭교회를 따르므로 영국국교회를 탄압하였다. 공동 기도서를 폐지하고 신부의 독신제를 부활시키고 290명의 신교 지도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때 크랜머와 리드리(Ridly), 라티머(Lamtimer) 같은 신교의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4) 그런 메리 여왕 또한 왕위에 오래 있지 못하고 5년 만에 죽으므로 피의 통치의 막을 내리고, 뒤를 이어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볼린의 소생인 엘리자베스(Elizabeth, 1533-1603) 1세가 여왕에 즉위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A.D. 1558에 즉위하여 A.D. 1603까지 영국을 통치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데 기초를 다진 가장 뛰어난 왕이면서 또한 메리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이 로마카톨릭교회의 신앙으로 회귀해 있었던 것을 다시 영국국교회의 신앙으로 돌려놓아 영국교회를 국교회주의로 굳혀 놓았다. 이는 크랜머의 지도 아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배워 메리 여왕 시절 불안 속에서 지내왔었기 때문에 왕에 즉위하자 로마카톨릭교회 신앙의 영국교회를 다시 영국국교회의 신앙으로 복귀시켜 놓은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영국국교회는 헨리 8세로부터 에드워드 4세에 이르는 영국국교회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비록 영국교회를 국교회로 되돌려 놓고 굳건히 다져 놓기는 하였지만 교회를 대하는 왕권은 헨리 8세의 정치적 성향을 따르고자 하였다. 즉, 국가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까지 장악하여 왕권 아래 두는 것이다. 그 작업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가 선포한 반교황적 법령인 ‘수장령’을 부활시켜5) 영국교회를 국교회로 확립시키고 로마카톨릭교회를 억압함으로써 구교와 신교를 한데 묶으려는 교회의 통일을 꾀하였다. 이는 국교회의 예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으니 통일령(Act of University)6)을 내려 철저한 예배의 단일화를 꾀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러한 영국국교회의 확립은 로마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반발에 의한 대항을 받으며, 양 교회 모두를 탄압하는 정책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국교회 내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자들은 통일령에 의해서 사용하는 영국국교회의 기도서 중에 로마카톨릭교회적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여 사용하기를 거절하였으며, 제네바의 교회 제도를 모방할 것을 내세웠다. 영국국교회를 장로주의 체제인 장로교회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가와 교회의 수장으로 내세우고 있는 자신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으로 그들을 다루어 박해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박해에 대항하는 ‘퓨리탄’(Puritan)으로 불리는 ‘청교도’ 운동이 전개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카톨릭교회와 칼빈주의에 의한 개혁교회를 지향해 나가는 프로테스탄트(신교)와의 융합을 꾀하며 중도 노선에 의한 안정적인 정치를 해 나가고자 하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지를 받고 있는 프로테스탄트가 (1)보다 더 순결한 예배형식을 원하였으며, (2)신약시대의 교회정치 형식은 장로주의였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독주의 대신 장로주의를 채용하려고 했으며, (3)교리 선언을 개정하여 보다 더 많은 칼빈주의 실현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그 힘이 점점 커지므로 극단주의자로 여겨 배격하며 시국 안정을 꾀하는 정책을 쓰는 것에서 (1)1559년에 발표한 지상권령(수장령, The Act of Supremacy)에 의하여 영국교회는 왕의 직할 아래 두고자 하였으며, (2)1559년에 발표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은 에드워드 6세 때 제정되었다가 메리 여왕 때 폐지되었던 것을 다소 수정한 법령으로, 영국국교회의 예배와 예전의 법식은 일정한 규범을 따라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범이 되는 것은 공동기도서(The Common Prayer Book)와 교리 요목(要目)인데, 이것 역시 에드워드 6세 시대의 것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해서 성공회의 표준 예배식 기도문으로 채택하게 한 것으로 어떤 교직자든지 다른 예배 기도문을 채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7) (3)성공회는 세 계급의 교직 및 집회를 가진 감독제도의 정치를 하기로 하고, 사도적 계승을 하는 것으로 1559년에 성공회 감독으로 처음 안수를 받게 하였다. (4)그리고 42개조의 신조를 수정하여 ‘39개조 신조’로 만들어 1563년에 소집된 종교회의의 동의를 얻고, 1571년에 열린 의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이러한 조치는 프로테스탄트도 성공회로 묶어 교회 정치, 교리, 규칙, 예배를 따르게 하는 것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주의자로 취급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꾀하는 국가교회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여왕과의 사이에 두 차례의 큰 논쟁이 발생한 것에서 ‘청교도’란 이름을 얻었다.
첫 번째 논쟁은 예복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백의 입는 것을 거부하고 국회를 개혁할 것과 무지하고 추문 많은 성직자의 숙청을 부르짖은 사건이었다. 이 예복 논쟁은 클로우체스터의 존 후퍼(John Hooper of Cloucester) 주교에게서 야기되어 로렌스 험프리(1527-1590), 토마스 샘슨(1517-1589)에 의해 본격화되는데 이들은 ‘39개조 신조’에 반대하여 논쟁을 일으킴으로써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의복 문제가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여겼기에 이러한 ‘중백의(重白衣)’8)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566년 켄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로 하여금 ‘포고문’을 발표하게 하여 여왕의 종교 정책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성직을 박탈하거나 봉급을 받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1571년 ‘39개조 신조’는 의회에서 통과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는 이 정책에 반대함으로 이들에게 ‘청교도’라는 경멸적인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것이 청교도라는 명칭이 역사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이다.
두 번째 논쟁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1583년 영어본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모든 영국인들에게 강요함으로 야기되었는데 교회 의식과 예복 문제에서 교회 규칙과 징계 원칙을 둘러싼 문제로 발전하였다. 여왕은 수장령중 제8절을 근거로 하여 44명의 ‘고등 종무관 재판소(Court of High Commission)’ 임원들을 임명하고 여왕의 정책을 강행케 하였으며 공공 예배 불참자들은 중벌에 처했다. 여왕은 또한 1585년엔 ‘예수회 탄압법(An Act against Jesuits)’을 통과시키고 1593년엔 ‘청교도 탄압법(An Act against Puritans)’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선동적이고 불충스러운 분파주의자들과 사악한 집단”으로 말미암은 “위험과 불편”을 막는다는 것에서였다. 이 법에 의하면 16세 이상 영국 남자로서 “공동기도서”를 배척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배척하도록 부추기는 사람, 종교적 위장을 쓰고 불법적인 집회를 하는 사람들을 범법 혐의만으로도 투옥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의 무리한 강행은 결국 영국교회에 수많은 분리주의자들을 양산시켰고 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혁명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에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는 영국국교회에 대항하는 극단주의자들을 뜻하는 것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도모된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에 의해서 ‘퓨리탄’, 곧 ‘청교도’라고 불려왔다. 이는 영국이 정치적 성향에 의해 종교개혁에 있어온 영국식의 개혁교회인 영국국교회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지향해 나가는 개혁교회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가 배척과 탄압을 받는 상황에 있은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가 막바지에 이르게 되자 그동안 해온 프로테스탄트의 배척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나 중세적 의식에 대한 습관에 물들지 않은 자들로 교회가 채워지게 되었고, 교회 예배 형태는 청교도적 이상에 가까워졌으며, 성찬상이 일반적으로 교회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백의는 치워지게 되었으며 의식들은 한 수 있는 대로 간소화되었다. 그리고 청교도에 대한 탄압도 점차 느슨해지고 늦춰지게 되었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승계자가 청교도들의 탄원서에 막혀 그 승계가 늦어지게 된 일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603년에 왕위를 이을 직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나 그녀는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를 합법적 왕위 계승자로 지명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합하여 통치하는 제임스 1세(1566-1625)로 등극했다. 그런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방법을 택함으로써 영국에는 여전히 로마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청교도와 영국국교회인 성공회가 공존하는 형태가 지속되어 가면서 로마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청교도를 영국국교회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청교도 모두 박해해 나갔다. 따라서 영국국교회인 성공회는 반카톨릭, 반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취해졌다. 이로 인해서 프로테스탄트 청교도를 급진적인 자들로 대해 1606년에 반(反)청교도적인 일련의 교회법들을 교회 당국에 의해 승인하게 하여 그의 통치 기간 중에는 어떤 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제임스의 통치 기간 중 개혁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판단한 분리주의자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함으로써 네덜란드 또는 뉴잉글랜드로 떠나 그곳에서 영국에서 이루지 못했던 개혁을 지속해 나고자 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청교도는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 그리고 크롬웰에 의한 공화정시대, 그리고 다시 찰스 2세의 왕정복구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특성을 띤 분파를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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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영국(정식명칭 :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간단히 영연방이라고 함)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영국의 명칭은 잉글랜드에서 유래가 되며, 영국 인구의 4/5를 차지한다. 잉글랜드는 1707년 합병령으로 스코틀랜드, 웨일즈, 잉글랜드가 그레이트 브리튼으로 성립되었으며,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1922)할 때 영국의 영토로 남았다. 이 중 잉글랜드는 영토가 가장 커 영국의 절반에 해당하며, 영국 경제의 중심이 된다.
2)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1537-1554)는 헨리 7세(재위: 1485-1509)의 증손녀로 아버지 헨리 그레이와 헨리 8세(재위: 1509-1547) 누이의 딸이었던 어머니 레이디 프란시스 브랜든의 세 딸 중 장녀로, ‘9일간의 여왕’인 비운의 여왕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존 더들리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피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가 군대를 동원하여 왕위를 빼앗으므로 9일 만에 여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참수를 당하였다.
3) 헨리 8세의 왕비인 케서린(Catherine)은 헨리 8세의 형 아서(Arther)의 아내였으나 아서가 일찍 사망함으로 헨리 8세가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관면하에 결혼함으로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 케서린은 헨리 8세와의 슬하에서 3남 2녀의 자녀가 있었으나 딸 메리만 생존하고 모두 사망함으로 잃었다.
4) 42개 신조는 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서 루터교적인 성향의 39개 신조로 바뀌었으며, 여왕의 서명은 받았으나 의회의 통과는 보지 못했다.
5)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수장령은 헨리 8세의 수장령에 약간의 수정을 한 것이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그리스도 다음 가는 영국교회의 지상 최대의 수령은 실로 영국 왕이다" 라고 하였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왕은 이 나라에서만 최고의 통치자이다"라고 수정해 표현하였다. 이 최고 통치자의 권위에 대하여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많은 경건한 군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권력을 의미하는데 불과하며, 교회에 관한 것, 혹은 국가에 관한 것을 불문하고 모든 영역을 다스리고 감독 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6)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선언한 예배의 통일령(Act of University)은 영국국교회의 예배-기도-의식의 통일을 위해 제정한 법이다. 이 통일령은 에드워드 6세의 제1차 통일령인 ‘기도서’(1549)를 개정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과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통합하여 영국국교회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7)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선언한 예배의 통일령(Act of University)은 영국국교회의 예배-기도-의식의 통일을 위해 제정한 법이다. 이 통일령은 에드워드 6세의 제1차 통일령인 ‘기도서’(1549)를 개정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과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통합하여 영국국교회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8)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선언한 예배의 통일령(Act of University)은 영국국교회의 예배-기도-의식의 통일을 위해 제정한 법이다. 이 통일령은 에드워드 6세의 제1차 통일령인 ‘기도서’(1549)를 개정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의식과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통합하여 영국국교회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2.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
프로테스탄트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보는 청교도는 그 신앙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나와 새로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개신교(도)’, ‘신교(도)’를 지칭한다. 이 신교도의 등장이 있게 된 출발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에 의해 분출될 기운이 잠재되어 오다가 1517년에 있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있게 되며, 쯔빙글리에 이어 칼빈에 의해서 있게 되는 개혁교회에서 완성을 보게 되고, 이후 개혁교회의 계승자에 의해서 있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란 용어가 생겨났다. 프로테스탄트란 ‘항의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로마카톨릭교회에서 항의하는 항의문인 루터의 95개 조항에서 보는 교회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항의한 데서 시작하여, 1529년 독일에서 열린 스파이어 회의의 판결에 루터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저항함으로 루터와 그를 따르는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고 부름으로써 생긴, 로마가톨릭교회의 세력에 맞서 항거한 데서 유래한 말로,1) ‘항거’를 뜻하는 라틴어 ‘프로테스타티오’(protestatio)에서 유래한다. 로마카톨릭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는 교회를 개혁해 나간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로마카톨릭교회를 반대하고 저항하며 반란에 있어 나간 자들이므로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항하는 ‘반대자’요 ‘항거자(대적자)’요 ‘반란자’이다.
이처럼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교회를 개혁해 나가는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서 시작하여2) 스위스의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프랑스의 칼빈(Jean Calvin, 1509-1564),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John Knox, 1513-1572) 등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어 독일,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됐고, 이민자들을 통해 북아메리카까지 확산되면서 많은 국가에 영향을 끼치며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세워나갔는데, (1)루터에 의해서는 독일에 ‘루터교회’가 세워졌으며, (2)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서는 스위스에 ‘개혁교회’가 세워졌습니다. (3)그리고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 신학과 신앙을 영향 받은 존 낙스(John Nnox)에 의해서는 스코틀랜드에 ‘(개혁)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의 흐름은 (1)하나는 루터주의 신학으로, (2)또 하나는 칼빈주의 신학으로 있게 되는데, (3)칼빈주의 신학에서는 다양한 프로테스탄트가 형성되었다. 이는 루터주의 신학은 국가교회의 체제에 의해서 통제되는 형성에 있었지만, 칼빈주의 신학은 개교회에 의한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신학의 이해가 다양성을 띠고 형성되어가는 발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서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트는 (1)크게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구분에 있었으며, (2)영국에서 장로교회의 장로주의 체제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청교도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관으로 삼고 영국교회를 장로주의 체제로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영국의 프로테스탄트에 이르기까지 보는 프로테스탄트의 주류는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로마카톨릭교회는 교회의 머리(수장)로 교황을 두고 있으며, 교황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 위에 있어 성경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 성경을 해석하는 교황의 권위가 앞선다. 이러한 교황은 로마카톨릭교회의 중심에 있으므로 교황에 비중을 두며 의례를 중시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에 비중을 두고 성경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신앙에 더 많은 중점을 두며 의례를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로마카톨릭교회가 성직자와 신도의 신분상의 차이를 두는 것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는 그 차이를 두지 않으며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모토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빛 아래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신학적 전통이다. 이는 다섯 가지의 모토에서 보게 된다.
(1)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토타 스크립투라’(tot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라는 모토에서 본다. 여기서 ‘솔라’(sola)는 ‘하나의’ 또는 ‘유일한’을 뜻한다. 그리고 ‘스크립투라’(scriptura)는 ‘성경’이다. 해서, ‘하나의 성경’, 또는 ‘유일한 성경’을 뜻하는 것으로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이 ‘솔라 스크립투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잘 말해주는 모토이기도 하면서 또한 종교개혁의 모토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에 있어오면서부터 계속하여 개혁교회가 신앙 하는 모토의 중심에 있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2)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로’)이다. 여기서 ‘그라티아’(Gratia)는 ‘은혜’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를 뜻한다. 둘째 모토가 ‘솔라 그라티아’인 것은 오직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구원은 교회의 의식과 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세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이를 믿는 믿음에 있어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3)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로’)이다. ‘솔루스 크리스투스’에서 ‘크리스투스’는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실 뜻을 정하셨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게 하시는 것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성육신이 있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다. 예수란 이름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심을 알리는 온 세상에 나타내신 유일한 이름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4)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이다. 이 모토는 종교개혁운동의 주제이다. ‘솔라 피데’에서 ‘피데’는 ‘믿음’을 뜻한다. 이 모토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의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교회가 ‘이신칭의’ 또는 ‘이신득의’를 강조하여 말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 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5) 다섯째,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에서 ‘데오’는 ‘하나님’을, ‘글로리아’는 ‘영광’을 뜻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경외심을 갖고 경배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영원히 살아 계시는 영광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대신에 나무나 돌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형상을 본뜬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신우상을 배격하며 다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롬 11:3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다섯 가지에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로’),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는 종교개혁의 삼대정신이다. 개혁교회는 이 종교개혁의 삼대정신을 계승하며, 여기에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로’)와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를 더하여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의 성경해석과 설교 및 가르침에서는 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
청교도란 용어는 영국의 헨리 8세 때부터 있어온 국교회인 성공회의 역사에 의해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기에 등장하게 된 것이지만, 그렇게 청교도로 불린 청교도인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리는 ‘(개)신교’의 한 분파였다. 본래 프로테스탄트는 (1)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개혁에 있어 온 교회로 구교인 로마카톨릭교회와 구분되는 ‘프로테스탄트’, 곧 ‘신교’로 불리게 되며, 루터에 의한 ‘루터교회’와 칼빈에 의한 ‘개혁교회’를 통해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란 구별된 두 흐름에 있는 개혁교회의 특징에 있게 된다. (2)그리고 칼빈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에게서 한 뿌리이나 칼빈에 의한 ‘개혁교회’와 존 낙스에 의한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장로교회’로의 개혁파 구분이 있게 되었다. (3)그리고 원류(주류)의 개혁교회와는 성격의 차이가 나 서로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가 생기게 된다. ①장로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장로교회와 ②감독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영국국교회인 성공회, ③그리고 회중주의를 교회정치 원리로 하는 회중교회이다.
이러한 분류는 다음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개혁의 과정을 겪는 것에서 있었다.
(1) 헨리 8세가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국왕을 수장으로 하여 국가와 함께 교회를 통치해 나가고자 하는 것에서 영국교회를 독립하여 국가교회로 삼으면서 교회정치 체제를 감독주의로 가져나가는 것에 영국 내에 있는 칼빈주의자인 프로테스탄트는 반구교반신교의 어정쩡한 모습을 띤 영국 교회의 개혁에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해 나가고자 하는 저항에 있었다.
(2) 짧은 기간이지만 에드워드 6세의 교회 개혁을 거친다.3)
(3) 메리가 여왕이 되어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 회귀하면서는 영국국교회와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가져나갔는데,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서 스위스 취리히와 제네바, 스트라스부르크 등으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서 신학을 배웠다. 특히 취리히는 쯔빙글리, 제네바는 칼빈이 있었던 곳이며,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언약 사상이 더 발전되고 보완된 곳이다.
(4) 우리가 일반적으로 ‘청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본 뿌리가 제네바로 망명을 갔던 자들이기에 칼빈의 신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는 언약 사상이 있었다.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등극하자 그들은 제네바에서 돌아와 영국교회에서 열성적으로 로마의 잔재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로마카톨릭교회가 영국국교회에 대항하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단절하고 영국교회를 국교회로 존재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국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황의 지배권을 회복시키려고 한 것에 반해서 영국 내에 있는 청교도로의 모습을 띠게 되는 프로테스탄트는 국교회로 있게 된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제대로 된 개혁에 있지를 못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들은 국교회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교회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5)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교회의 영적 ․ 윤리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에서 그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성직자들은 성도들을 목회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을 청교도로 불리게 되는 칼빈주의자인 프로테스탄트는 교회정치제도의 문제라 생각했고, 실질적인 교회 개혁이 이루어 져야 성도들의 영적 ․ 윤리적 문제도 개혁되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들이 시도하고자 한 교회 개혁은 칼빈주의에 의한 교회로서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시도해서 성공한 것과 같은 완전한 칼빈주의 제도가 정착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교 제도를 폐지하고 총회와 교회 당회에 의한 장로주의 정치로 전환하며, 다른 지역의 개혁 공동체에서 시행되는 것과 더 합치되는 예배와 더 많은 평신도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과거의 관행에서 나온 일체의 제의와 장식품과 예식, 성물 사용을 금지하고, 과거의 전례들을 금지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영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에 의해서 급물살을 탄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치리 문서」를 올린다. 카트라이트는 독일 개혁교회의 중심인 하이델베르크와 제네바에서 실제로 ‘개혁된 교회’의 모습을 보고, 장로주의 체제의 정치가 영국 교회가 채택해야 할 정치제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들을 박해함으로써 영국 내의 프로테스탄트가 개혁하려던 교회 정치제도 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청교도로 불리게 되는 칼빈주의자 프로테스탄트가 원했던 것은 영국 교회의 정치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이상형은 장로주의에 의한 정치제도였다. 그러기에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망명지로 가 있던 그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를 맞이해서 다시 영국국교회로 돌아와서는 감독주의 체제에 의한 구교의 답습에 있는 교회를 장로주의 체제로 바꾸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시도와는 달리 왕권 강화에 있고자 한 여왕은 감독주의 체제4)를 확고히 하며 장로주의 체제5)에 의한 개혁교회의 신앙을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것에서 청교도의 등장이 있게 되었다. 이렇게 영국에서의 청교도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선 프로테스탄트가 로마카톨릭교회가 아니면서도 로마카톨릭교회적이며 로마카톨릭교회에 맞서면서도 비프로테스탄트의 성격을 띤 영국국교회에 결연히 맞서는 것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간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영국교회에서의 프로테스탄트는 영국교회를 칼빈주의에 의한 장로주의 체제의 개혁교회를 세워나가는 데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로마카톨릭교회도 아닌 또한 프로테스탄트도 아닌 전혀 다른 반로마카톨릭적이며 반프로테스탄트적인 국교회인 성공회를 유지해 나감으로써 영국교회에는 프로테스탄트의 한 줄기에서 성격이 다른 네 지류로 흐르는 청교도가 형성되었다. 이제 다양한 성격으로 분파된 청교도를 살펴보는 것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양한 성격으로 분파된 청교도
영국 내의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시작된 청교도는 영국국교회에 대항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에 의해 이전의 청교도와는 성격이 다른 청교도의 모습을 띤다. 정성구 교수6)는 청교도는 (1)장로교 청교도 (2)감리교 청교도 (3)침례교 청교도 (4)회중교 청교도 (5)성공회 청교도 다섯 가지 계열이 있다고 보았다, 이 다섯 가지 계열에서 장로교 청교도가 있는데, 칼빈주의 신학 사상에 의한 장로주의를 추구하는 청교도로 다른 네 가지 계열의 청교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먼저 성공회 청교도는 영국교회가 본래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신앙에 있는 교회인 것을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독립하여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로 있게 될 때 이 안에 남아 있는 로마카톨릭교회를 개혁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자들이 장로주의 또는 회중주의 등 교회 정치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이상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성공회란 새로운 교도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국교회 밖에 있는 청교도의 특징은 교회 정치체제가 회중주의를 추구해 나가기 때문에 회중교회를 세우는 회중교 청교도로 있기도 하고, 회중주의의 청교도는 세례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재)침례의 입장에 있어 침례교회를 세워나가는 침례교 청교도로 있기도 하며, 회중주의 청교도에 의해서 감리교회를 세워나감이 있었으므로 감리교 청교도도 있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교파에 의한 청교도의 계열은 장로교 청교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회중주의를 추구하는 교파이다.
한편, 정성구 교수는 미국에 들어온 기독교가 칼빈주의에 있는 유럽에 있는 기독교가 여러 가지 계열이 있으니 칼빈이 개혁하고 난 다음에 (1)화란(네덜란드)에 돌트 총회를 통해서 개혁교회가 크게 일어났으며 (2)프랑스에는 스위스에서 칼빈이 세운 제네바아카데미를 통해 신학 교육을 받은 자들이 돌아와 프랑스 교회를 개혁해 나간 위그노파들이 큰 고난을 받으면서 세상에 흩어졌고 (3)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가 개혁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4)영국으로 가서 청교도로 있게 되는 꽃을 피우고 (5)1620년부터 1700년 어간 미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청교도로 다섯 계열이 들어왔으나 18세기와 19세기에 활개 친 자유주의자들로 인해 거의 다 타락을 하여 자유주의로 흘러 가 흩어졌는데, 두 계열의 교회가 그래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돌트 신경의 진리를 계속 파수한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이다. 이들에 의해서 오늘의 미국 장로교회가 이루어졌는데, 다행히도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물들어 타락해 가던 시대에 진리의 파수하며 신앙을 지켜 온 화란의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들어옴으로써 신앙의 계열로 보면 카버넌트의 전통을 이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청교도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영국국교회인 성공회에 의해서 있게 된 청교도는 특징을 달리하여 분류가 되는 여러 종류의 분파가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살펴본다. 정이철 목사7)에 의하면 (1)분리파(분리주의자) 청교도 (2)비분리파(비분리주의자) 청교도 (3)국교회파(국교회주의자) 청교도 (4)독립파(독립주의자) 청교도 넷으로 분류된다.
(1) 하나는 ‘분리파 청교도’(분리주의자 청교도, Separatist Puritans)이다. 이들은 ‘비국교도 청교도’라고도 불린다. 이 청교도는 (a)영국국교회 안에서는 장로주의 체제의 교회로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b)감독주의 체제에 있는 영국국교회는 여전히 로마카톨릭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 영국국교회를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영국국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 견딜 수 없어했다. 그러기에 그들 대부분은 성직을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났다. (c)그들은 영국국교회 밖에서 자신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들 중 소수인 일부는 영국국교회를 탈퇴하여 그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영국장로교회를 세웠다. (d)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이 네덜란드 난민이었던 재세례파와 열광적 개혁주의자들, 반율법주의자들과 합류를 하였다. 그들은 시민 불복종을 설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조치가 취해졌으며 일부는 화형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분리주의자인 분리파로 불리는 이 청교도 중에 영국국교회와는 전혀 새로운, 그렇다고 영국장로교회도 아닌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세울 것을 시도한 이가 있었다. 그가 로버트 브라운으로, 분리파 청교도가 시도해 나간 회중주의 교회, 곧 회중교회를 세웠다.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1550~1633)은 로버트 해리슨과 함께 1581년에 영국 최초의 회중 정치제도의 교회인 회중교회를 세웠다.8) 이들에게 이러한 사상을 갖게 한 것은 바로 ‘교회언약’이다. ‘교회언약’은 개인 언약의 확장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스스로 언약관계를 맺은 자들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하나의 교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이들은 최초로 ‘교회언약’이라는 서약 절차를 거쳐 교회를 세워 교회서약에 따라 교회 직분자들을 세웠다. 로버트 브라운의 지도 아래 그들은 한 무리로 연합하여 주님께 헌신하며 주님의 율법과 통치를 지키고 성도끼리 서로 교제하며 무질서와 악을 금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돕고 순종하겠다는 것 등을 서약하였다. 이들이 가진 교회관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의 교제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들어가고 세례를 통해 그 체결한 언약을 확증함으로써 한 무리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여 분리파 청교도에게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의한 그리스도의 피로 약정되는 하나님의 언약 체결 외에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언약의 체결을 가져나가면서 그 교회의 순결을 가져나가는 것에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성격을 띠었다. 그래서 브라운은 “하나님의 백성은 믿는 자들의 무리로서 하나님과 자발적 언약을 맺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들어가며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당신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이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청교도가 어떤 신앙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며, 또한 이후의 청교도가 지녀온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함께 잘 말해주는 것이 된다. 청교도 신앙에서 유난히 엄격함과 철저함이 율법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고자 1607년에 상대적으로 관용한 네덜란드로 갔으며, 1609년에는 레이던에 정착하여 ‘라이덴 잉글랜드 분리파 교회’(English separatist church at Leiden)를 세웠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과 적응되지 못함으로 1620년에는 다시 더 나은 곳을 찾아가고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를 지도자로 하여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의 사우샘프턴에서 102명이 메이플라워(Mayfpower)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출발하여 미국 메사추세츠9) 남동부에 위치한 플리머스(Plymouth)에 자리를 잡고 겨울을 보냈는데 인원 중 절반이 사망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메이플라워 맹약(Mayfpower Compact)10)을 체결하였으며 서약자는 41명이었으며 이들 중 35명이 회중교회 청교도이다. 이렇게 플리머스에 정착한 분리주의자 청교도를 ‘플리머스 분리주의자’(Plymouth separatist)라고 한다.11) 이후 1630년부터 1643년에 걸쳐 있어온 영국 출신의 이주민들에 의한 청교도의 대이동은 대략 20,000명에 이른다.
(2) 그리고 또 하나는 ‘비분리파 청교도’(비분리주의자 청교도, Conformist Puritans)이다. 이 청교도는 분리파 청교도로 불리는 분리주의자 청교도와는 달리 영국국교회에 그대로 남아 국교회의 목회자 신분도 유지하면서 충돌 없이 조용히 변화를 가져와 서서히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영국국교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장로파 청교도’이다. 비분리주의자 청교도가 이처럼 영국국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할 뜻을 가진 것은 비록 로마카톨릭교회의 잔재가 영국국교회에 남아있더라도 교회의 표지(慓識)12)가 남아있다면 분리는 할 수 없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분리주의자 청교도를 이끈 지도자는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었다. 하지만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의 의도대로 영국국교회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시기 영국 정부와 대주교 윌리암 라우드(William Laud)가 청교도를 강하게 탄압했고, 청교도의 모든 양상을 뿌리 채 뽑는 청교도 말살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악화되는 경제사정에 시달리던 많은 청교도는 견디지 못하고 이들 또한 뉴잉글랜드로 향하였으며,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것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떠나는 배에서 존 윈스롭이 설교한 ‘기독교적 사랑의 한 모형’(A Model of Christian Charity)에서 언급하고 있는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13)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도시 건설에 있는 공동체의 특징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를 둔 신앙의 이상향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그 몸을 매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는 것은 곧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경건한 사회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칭찬거리가 되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들이 계속 정착촌을 세워 갈 때 하나님은 이를 뉴잉글랜드에 주신 축복으로 만드실 것이며,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기 되어 만인의 눈에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경건한 사회를 위해 분투하는 것이 마지막 시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청교도 운동에 의한 신앙이 분리주의자 청교도에서 보는 율법주의적인 것에서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에서는 경건주의적인 특성을 보게 된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둘이 혼재하며 혼합되는 특성으로 발전하는데, 율법 준수와 경건한 생활의 유지가 경제적 성공을 이루는 축복의 길이요 관문인 것으로 여겼다. 이렇게 존 윈스롭(John Winthrop)을 지도자로 하여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한 청교도가 비분리주의자 청교도이다.
(3) 그런데 영국국교회 내에서 교회 개혁을 꾀해 나간 청교도에는 비분리파 청교도인 ‘장로파 청교도’외에도 ‘국교회파 청교도’가 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에 남아 성직자 신분을 유지하는 길을 택한 청교도들 가운데 소수로 매우 특별한 노선을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전과 같이 장로주의 체제에 의한 교회를 세우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의 제도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으며 여왕과 감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고자 하였다. 대신에 영국국교회의 신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개혁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이 청교도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에 의해서 펼쳐나간 청교도이다. 퍼킨스는 영국국교회에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하신 율법을 순종하는 행위에 있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는 언약 개념을 만든 것이다. 그럼으로써 첫 사람 아담부터 모든 사람은 노력과 행위로 자기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하나님께 반응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이 사람들에게 주입되니, 영국국교회 감독들의 그늘에서 안주하던 사람들이 달라졌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자세가 확산되어 1640년대에 잉글랜드의 일반 시민들이 국교회를 강요하면서 독재를 행하는 국왕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교회 청교도들로부터 확산된 사상이 아니었으면 국민들이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혁명은 불가능했다.
(4) 영국국교회 내에서는 ‘독립파 청교도’도 있다. 네덜란드에서 분리파 청교도 개혁운동을 하던 헨리 제이콥스라는 청교도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영국국교회로 복귀하여 국교회 안에 청교도 교회를 세워나가는 운동을 했다. 그 청교도는 국교회의 성직자이면서 국교회 감독의 통치를 받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는 분리파들이 시작한 회중교회를 국교회 안에 세웠으며, 윌리암 퍼킨스의 신학을 따른 것에서 비분리자 청교도인 ‘장로파 청교도’와 다르며 또한 ‘국교회 청교도’와도 성격이 달랐다. 그러나 국교회 내에 있은 독립파와 국교회 청교도들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합해졌고, 이들이 1640년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회중주의 정치와 행위언약 사상 등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활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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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 의식과 선행에 의한 구원관을 비롯한 갖가지의 비성경적 신앙을 가진 로마카톨릭교회에 맞서 루터는 1517년 95개조의 항의문으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이후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외쳤으며, 이 믿음은 신자들이 직접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있게 된다며 “오직 성경에 의한 믿음”을 말함으로써 교황에 권위를 두는 로마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성경에 권위를 두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에서 개최된 신성 로마제국의 의회에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17일에 도착하여 출석하였으며 4월 19일에 의회 앞에서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말하며 개혁에 대한 그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확고히 하였다. 이런 루터에 대해 황제 칼 5세는 의회 마지막 날인 1521년 5월 25일에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규정하며 루터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은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내용을 담은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한 신성 로마제국의 16선제후(신성 로마 황제<독일 왕> 선출에 참여할 권리를 지닌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곧 봉건영주)들과 14자유도시들이 향후 종교개혁을 불허하는 스파이어 회의의 판결에 항의해 ‘반대서’를 발표한 사건에서 ‘저항자’(항거자)란 뜻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는데, 이 용어는 이후 쯔빙글리,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와 그들에 의해 세워져 시작된 개혁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개)신교도’를 한데 아우르러 총칭하여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2)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어 종교개혁시대를 열기 전에도 종교개혁을 시도한 자들이 있었다. 스위스 콘스탄츠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한 체코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 1415년 콘스탄틴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고 사후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불태워진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7), 성직자가 아닌 신도로서 설교를 하는 까닭에 이단으로 정죄받은 프랑스의 페트루스 발두스(Petrus Waldus, ?-1197), 종교재판후 화형 당한 이탈리아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Hieronymus Savonarola, 1452-1498). 이 4명은 루터보다 100여년전, 혹은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며 개혁을 시도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처형당하거나 박해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행한 종교개혁의 시도는 훗날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두는 밑거름이었다.
3) 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세이머(Jane Seymeour) 사이에 태어나 1547년 9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에드워드 6세는 프로테스탄트인 외삼촌 소머셋 공작(Duke of Somerset)과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렌머, 노섬벌랜드의 섭정으로 영국교회를 개혁해 나간다. 헨리의 수정법안들을 삭제하고, 6개 신조법령을 철회하였으며, 이단법을 파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에 있게 하고, 우상숭배의 행위인 모든 성상을 파괴시키고 신앙의 미신적인 행위를 금하였고, 예배의 의식을 단순화하고 예배 시에 복음서와 사도서신을 영어로 낭독하게 하였으며, 신도에게도 이종성찬(떡과 포도주)을 허용하였으며, 새로운 연보법(chantries act)을 통과시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카롤릭교회의 재정을 압박하였고, 신부들의 결혼을 허용하였다. 또한 ‘제1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1549)를 작성하였으며, 개정판 제2 기도서(1552)에서는 ‘제단’ (altar)이란 말 대신에 ‘상’(table), ‘신부’(priest)란 말 대신에 ‘성직자’ 또는 ‘목사’(minister)로 고쳤으며,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주일성수를 명령하여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 또한 성경의 출판과 판매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1553년에 42개신조(the Forty-two Articles of Reoigion)를 작성하여 영국교회의 교리가 되는 공식 신조로 삼았다. 에드워드 6세의 이러한 교회 개혁은 개혁주의 노선을 따른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로마카톨릭교회적인 요소를 모두 배제시킨 것은 아닌 영국교회만의 독특한 성격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피터 마터(Peter Martyr), 오키노(Ochino), 마틴 부써(Martin Bucer)등이 영국으로 망명해 왔으며, 영국교회는 이들을 초청하여 개혁신학을 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4) 영국국교회의 정치체제는 왕을 수장으로 한 ‘감독주의’이다. 이것은 왕을 국가와 교회의 수장으로 하여, 왕 밑에 대주교(Archibishop)와 감독(Bishop)을 두어 다스리고, 감독들은 성직자 임명 등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완전한 계급주의 교회 정치체제이다.
5) 프로테스탄트의 ‘장로주의’는 회중인 성도에 의해서 회중의 멤버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고, 선출된 장로는 장로들의 모임인 장로회(당회)를 구성하는데, 장로회를 구성하는 장로는 교훈장로(목사)와 치리장로로 구분된다. 이러한 장로의 관계는 수직에 의한 상하의 계급 관계가 아닌 평등하니 동등하다. 그리고 장로와 성도의 관계 또한 상하의 수직에 의한 상하의 계급 관계가 아닌 평등한 동등 관계이다.
6) 총신대학교 학장 및 총장 역임.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7) 미국 미시간 주 남동부, 휴런 강 연안에 위치한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목사, 바른믿음대표.
8) (1)회중교회에 대한 다양한 표현의 용어 : 일본에서는 회중교회를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 번역한다. 회중교회는 또한 모든 사제권 제도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 개인적 판단의 자유를 주장했다. 이 자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권위와 연합된 자유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자들이 모여 구성한 교회야말로 정치적으로 자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자유교회’라고도 한다. (2)회중교회를 세운 회중파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 회중교회를 세운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세 부류 중 하나였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윌리엄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등 5명이었다. 비록 참석자의 숫자는 적었으나 올리버 크롬웰의 지지를 받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교회정치와 관련한 회의에서는 장로회주의자들과 자주 충돌했다. 회중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동의했다가 나중에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3) 회중교회의 회중주의자와 침례교회 : 회중주의는 특히 침례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1611년 혹은 1612년에 토머스 헬위즈(Thomas Helwys), 존 머튼(John Murton)이 영국 런던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침례교회는 회중교회보다 더욱 급진적이어서 회중정치 외에도 침례와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룰 주장했다. 이후 침례교는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설교로 크게 부흥한다. 미국에서는 노예제도 문제로 1845년에 남침례교가 분열하였으나, 미국 내지 선교에 진력하여 북서쪽으로 확장하여 지금은 로마가톨릭에 이어 미국 최대 교파다. (4)회중교회의 교회정치 체제인 회중정치를 채태한 다양한 교파 : 회중교회의 회중정치는 회중교회 외에도 침례교회, 재침례교회(아나뱁티스트), 형제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퀘이커교, 유니테리언 등이 회중정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특색을 보면 본래의 칼빈주의자들에서 벗어나 교회 정치체제만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심지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성을 띠는 것으로 바뀌었다.(5)회중주의자의 주요인물 :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이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존 윈스롭(John Winthrop),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외에도 유명한 대표적 청교도 인물로 존 오웬(John Owen, 1616-1683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등이 있다.
9)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미국 북동부지역에 위치한 6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의 하나.
10)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와 같은 이름으로 쓰여 있는 우리들, 하 나님이 은총에 의하여 영국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경이로운 최고 통 치자이신 우리 국광이요 신앙의 수호자인 제임스 왕의 충성스러운 신 하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증진 그리고 우리들의 국왕 및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건립하려고 항해를 시도하였던 바, 본 증서를 통하여 우리들의 보다 더 바람직한 질서 수립과 보존 그리고 전술된 목적들의 촉진을 위하여 엄숙하게 상호간에 하나님과 서로의 면전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시민적 정치 단체로 결속한다. 이에 바탕하여 식민지의 일반적 복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법률과 법령과 결정 그리고 관직을 수시로 제정하고 구성하고 조직하기로 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최고 통치자 제임스 왕의 영국 과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의 치세 18년; 그리고 기원후 1620년 11월 11일 코드 캡에서 우리들의 이름으로 여기 서명한다.”
11) 플리머스 분리주의자 청교도들의 관심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속에서 경제적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메이플라워 서약’을 맺고 자유가 최대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고자 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미국에 남긴 영향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은 무질서와 방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심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두면서 절대적 의미의 진리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것이 진리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에는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는 잘못이 있었다.
12) 참된 교회의 표지로 칼빈은 (1)하나님 말씀의 참된 선포, (2)성례의 바른 시행을 주장했다. 여기에 마틴 부써는 (3)교회의 신실한 권징을 추가하였다.
13)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잇는 하나의 몸과 같습니다.…이 몸의 각 부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그 중의 하나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부분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영광을 받으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기뻐합니다.…우리는 ‘언덕 위에 세워진 하나의 도성’(a city upon a hill)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들에게 쏠려 잇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을 잘못 이행하면…온 세계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이 조항들의 엄수를 게을리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과 우리 재물을 위한 큰 사업들을 추구함으로 우리의 육욕적인 목적들을 추진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 대하여 진노를 발하사 그런 사람에게 보복하심으로 우리에게 언약의 파기에 대한 대가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3. 청교도 신앙이 끼친 긍정적인 장점과 부정적인 단점의 영향과 바른 신앙을 지향해 나가는 성경 이해
청교도 신앙이 영향 끼친 긍정적인 장점과 부정적인 단점
이상에서 ‘청교도’란 용어가 어떻게 해서 사용되게 되었는지를 청교도가 생긴 역사적 배경의 이해와 함께 보았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와 청교도가 갖는 차이를 보았다. 청교도란 용어는 이 용어가 사용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청교도가 등장되는 태동은 이 용어가 사용되기 훨씬 이전에서부터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청교도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긍정적이며 좋다. 이러한 것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래에서 있은 박해와 순교, 엄격, 엄숙하면서도 철저한 신앙이 정신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청교도에 대한 이미지는 프로테스탄트의 성격이 강하였던 초기 청교도에서 보게 되는 것이며, 시간이 지나며 달라진 청교도의 모습은 많이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청교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파커가 그의 서한에서 반대자들을 겨냥하여 'puritan(깨끗한 척 하려는 사람)', 'presbyterian(장로파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까다롭고 비판적이고 자만하고 위선적이라는 야유와 비방의 의미로 사용했지만, 안디옥에서 시작된 멸시와 비방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인 성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듯이, 영국에서의 청교도란 용어 또한 그랬으나, 불행히도 오늘날에 이르러 청교도는 ‘순전한 청교도’에서 멀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청교도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청교도를 잘못 이해하고 막연한 추앙을 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를 흠모하면서도 전혀 청교도로 살지도 않는다. 청교도의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는 목소리만 내며 그 소리만 클 뿐이지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청교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청교도 신앙이 끼친 장점과 단점의 영향과 바른 신앙을 지행해 나가는 성경 이해를 가질 필요를 갖는다. 이에 이제부터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청교도 신앙이 영향을 끼친 긍정적인 장점
청교도가 등장하게 된 것은 영국국교회인 성공회가 생기면서부터이다. 영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영국의 국교회로 서면서 이에 저항하는 로마카톨릭교회와 맞설 뿐만 아니라 영국교회의 온전한 개혁을 요구하는 프로테스탄트에 정치적 부담을 가짐으로써 그들을 역시 저항의 세력으로 여겨 맞서 박해함으로써 청교도란 용어가 등장하였다. 이때의 청교도는 칼빈주의자였기에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이 효과있게 영국국교회 속에서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운동의 물결이 있었다. 이것의 가시화는 교회를 개혁해 나가려는 여러 움직임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성경에서 제시해 주시고 있는 교회정치 체제의 회복에 있고자 하는 것에서 있었다. 왕은 국가와 교회의 수장으로 교회의 주교(감독)를 세우며, 이 주교는 사도의 계승자로 그 권위는 그리스도 자신으로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감독주의 체제의 제도를, 왕이라도 영적인 치리에 복종해야 하며 영적 직책을 맡은 직분인 목사는 모두 동등하며 왕의 권위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 의해서 선출된 장로가 그리스도의 권위로 다스리고 가르치는 봉사의 일을 맡은 것이라는 장로주의 체제로의 개혁에 있어야 할 것에서 영국국교회와 청교도는 대립의 각에 있었다.1) 청교도에게서 영국국교회의 감독주의 체제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교황에 의한 주교정치의 변형에 불과했다.
둘째는 영국국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와 단절하고 독립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로마카톨릭교회적 잔재로 남아 있는 교회의식과 부속물인 장식품 등을 타파하며 예배의 개혁에 있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미신적인 의식의 수행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공적이고도 연속적인 설교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니, 하나님 말씀의 전파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수단과 방도라는 분명한 이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청교도에게서 예배의 개혁에서의 관심과 중심은 ‘설교’ 였다. 이 청교도의 설교에 대한 이승구 교수2)의 글에 주목하고 깊이 생각하자.
청교도들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원문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해석에 근거해서 교리와 실천적인 적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성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으로부터 찾아 전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상황 가운데서는 매우 중요한 공헌이었으니, 예를 들어서 엘리자베뜨 I세는 온 나라에 설교자가 3-4명이면 족하다고도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에게는 설교자와 설교 사역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것이나 글로 하는 것이나 설교는 청교도들에게 생명이었다”는 뉴(New)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월져는 설교자가 “16세기 청교도의 영웅”이었다고도 표현했다. 이것은 청교도 설교자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는 것도 표현하지만 동시에 일반 성도들이 때로는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먼 곳까지 가서 주일이나 주간 중에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힘썼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일리(Ely)의 주교인 리차드 콕스(Richard Cox)에게 자신의 유일한 관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신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라고 써서 그를 감동시킨 바 있는 청교도 목사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이 캠브리쥐 근처의 드라이 드레이톤(Dry Drayton)에서 목회할 때(1570-1588) 캠브리쥐 학생들과 멀리서 온 방문객들이 늘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고 한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설교할 사람들을 잘 훈련할 수 있는 교육 기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엄격한 훈육 가운데서 개신교 설교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당시 재무 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였던 월터 마일드메이(Walter Mildmay, 1523-1589)경이 1587년에 세운” 캠브리쥐의 엠마뉴엘 컬리쥐(Emmanuel College)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심지어 그들의 교회 건물까지도 설교를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래서 제임스 화이트는 청교도 예배당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깨끗하고 조명이 잘된 예배당은 청교도 예배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였으니,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를 말하고 확정한 것이 예배에 대한 청교도들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예배의 요소들을 찾아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성경에 없는 데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예배의 요소들을 전부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 한정되어 있다”고 믿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교도는 “성경은 하나님의 예배에서 실천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 안에 규정되지 않은 그 어떤 다른 방법이 그 어떤 방식으로 제안되어도 그것은 옳지 않은 예배의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말씀되어진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불법적인 것이다.”
이런 규정적 원리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제시하려고 한 대표적인 예의 하나를 위는 토마스 카트라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배의 구체적인 것들이 그에 따라 규정되어야만 하는 다음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1)첫째는 그 누구도,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전 10:32), (2)둘째는 모든 것이 질서 가운데서 그리고 자연스럽게(comeliness) 행해져야 한다(고전 14:40), (3)셋째는 모든 것이 건덕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전 14:26), 그리고 (4)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져야만 한다.
청교도들은 그런 성경적 원리에 충실하게 자신들이 제안하는 예배 모범(Directory for Public Worship)을 제시하기도 했다. 1644년 작성되어 의회에 제출되어서 1645년 1월에 영국 의회가 기도서를 폐지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예배 모범은 이전의 영국 교회의 기도서(Prayer Book)와는 달리 한편으로는 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충실한 것이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양심의 자유를 충분히 고려한 예배 모범의 제시였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배의 순서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성경의 원리에 근거한 모범을 제시하여 이에 따라 주님을 경배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예배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예배는 (1)성경에 대한 깊은 존중과 (2)경배자들의 상태에 대한 적합성(relevance)에 대한 고려가 작용하고 있었으며, (3)그들이 예배를 즐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그리고 특히 오늘날에는 청교도들이 말하는 규정적 원리에 따른 예배는 지루하고 생기가 없으며 성도들의 상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전혀 즐길 수 없는 고역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청교도들은 같은 말이 반복되고 의식 중심의 당대의 예배에 비해 청교도적 예배가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므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그 예배를 즐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홀톤 데이비스 같은 이는 청교도 예배가 “순수성(purity), 단순성(simplicity), 그리고 경건함(spirituality)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오순절적 열심과 사도적 교회의 기대를 재창조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청교도의 예배나 그들이 존중한 성경적 원리에 따른 예배가 생기 있고, 사람을 살게 하며, 주께 더 헌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계승에 있는 개신교에 중요한 신앙의 유산인 성경 번역과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문서를 남겨 큰 영향을 끼쳤다. 이승구 교수는 이것을 청교도의 가장 큰 기여라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교도들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사랑한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교도주의를 “성경이 모든 것에 중심이라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한 릴란드 라이켄의 말은 매우 정확한 말이다. 또한 “초기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하고 묻고는 “그들을 다른 영국 개신교도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고 말하는 데렉 윌슨도 옳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려는 청교도들의 모든 기여는 성경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1565년 매튜 파커(Matthew Parker) 대감독의 후원 하에 이루어져 1568년에 나온 소위 주교 성경(The Bishop's Bible) 보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비공식 역본이었던 1560년에 완성된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을 애호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생각과 삶을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네바 성경은 윌리암 위팅햄(William Whittingham, 1524-1579)의 지도하에서 일단의 탈출자들이 원문에 근거한 학문적 번역을 하고, 많은 주석을 붙여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I세가 등극(1604)할 때 햄프턴 코트에서 왕을 알현한 청교도들과의 약속에 따라서, 존 레이놀즈(John Rainolds, 1549-1607)와 같은 청교도를 포함한 54명의 번역자들이 6단위로 나뉘어 옥스퍼드, 캠브리쥐,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번역하여 빌손 주교(Bishop Bilson)와 마일즈 스미스(Miles Smith)의 마지막 교정을 통해서, 본래는 ‘주교 성경’(Bishop's Bible)을 가볍게 개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611년에 그 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번역본으로 완성된 킹제임스 영어성경(KJV)이 세상에 등장하여 그것이 다른 영역본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기여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회의(1643. 7. 1-1649. 2. 22)의 산물인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서도 그들의 성경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 처음에는 39개조 신조를 개정하는 정도의 작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새로운 신앙 고백서를 작성할 필요를 느껴 작성하여 1646년 11월 26일에 의회에 제출된 (그리하여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받아들여지고, 1648년 6월에 영국 의회에서 부분적 수정을 거쳐 받아들인 그러나 영국에서는 한 번도 철저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그리고 대소요리 문답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떤 이들이 제기하는 이상스러운 반론과는 달리,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믿는 바의 기초가 성경이며, 앞으로 논의해 나갈 모든 교리에 대한 최종적 판단 근거가 성경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성경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한 청교도들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여기 신학의 인식론적 기초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있다. 모든 신학적 논의는 성경으로부터 시작되고 성경으로 마쳐져야 한다는 그들의 원리가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됨됨이를 삶에서 발휘하고자 하였다. 청교도의 삶을 말해주는 가장 큰 특징적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신앙생활에 있어나가고자 한 것이며, 또 하나는 그 신앙생활에는 회개의 따름이 있은 것이다. 이는 (1)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는 자신들은 주께로부터 나온 피조물이며, (2)자신을 비롯한 소유한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주어진 은사인 ‘주의 거룩한 것’으로, (3)주의 선하신 뜻대로 그리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분명한 인식에 의한 것으로, (4)삶의 목적을 주와 주의 나라에 두고 이를 거스름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이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죄와 마귀와의 싸움에 있으면서 연약한 자신을 주님의 은혜에 두는 기도에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삶을 교회의식과 선행에 두고서 살아가고자 하였던 신앙생활을 동원한 자신의 행위로 구원 얻는 관념인 로마카톨릭교회적인 것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삶에 의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주와 주의 나라에 둔 종말론적인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에서였다. 그러한 청교도들은 예배 설교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면을 따르고자 하였으며 그 실천에 있는 삶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며, 미흡하며 연약한 자신을 주께서 돌아보시고 살펴주시며 굳건히 붙들어 주실 것을 구했다. 그런 그들은 하루하루를 오늘 밤에 주의 부르심을 받는 마지막 때 인양 여겼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거룩하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살고자 하였다.
청교도 신앙이 영향을 끼친 부정적인 단점
청교도 신앙이 영향을 끼친 긍정적인 장점이 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인 부정적인 단점 또한 실로 매우 크다. 이는 오늘날에서는 청교도 신앙을 본 받아 따를 모범적 신앙으로 삼고자 하는 신자들이 있으면서도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계승에 있는 청교도는 사라지고 없으며 전혀 다른 청교도로만 남아 있어 실질상 본 받을 모범적 청교도는 없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청교도가 남긴 발자취의 역사에서 확인 된다.
청교도의 이미지가 좋게 각인 되어 있는 것은 (1)프로테스탄트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2)칼빈주의자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3)로마카톨릭교회로부터 개혁해 나가는 종교개혁 운동에 있었기 때문이며, (4)성공회를 국교회로 한 영국 국가의 박해를 받은 신앙인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5)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첫 발을 내딛은 미지의 땅을 개척하며 기독교 국가를 건설해 나간 개척자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6)매서운 겨울을 견뎌내고 농사 지은 첫 수확물을 원주민과 함께 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신앙인으로 추수감사절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기 때문이며, (7)미래의 불확실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배할 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에 자녀의 신앙과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운 신앙인이며, (8)강직한 믿음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죄와 싸우며 철저히 하나님 말씀 중심에 서서 예배와 기도 생활을 엄격히 해 나가며 금욕적이며 근면하고 절약하는 정신과 삶이 몸에 배여 있는 신앙인이며, (9)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시작은 망명인으로 미약했지만 미국을 오늘의 세계 제일가며 모든 나라를 이끌어가는 강하고 부요한 나라로 만든 신앙인으로 모든 기독교인의 모델이 된다고 알고 있는 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교도에 대해서 보지 못하며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청교도로 불림에 있게 된 자들은 정체성이 프로테스탄트이며, 또한 칼빈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받은 칼빈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따르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이해이다. 하지만 성경을 해석하여 올바른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야 할 성경 이해에 있어서는 깊이에 있지를 못하였다. 로마카톨릭교회가 있어 오지 못한 구원 얻는 믿음의 원리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가 굳건히 서 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오직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생각에는 있었지만, 그리고 또한 교회 의식과 제도와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시도에 있기도 했지만, 초기 청교도에서 보는 본래의 칼빈주의에서 벗어나 이탈하여 프로테스탄트이며 칼빈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비칼빈주의자에 있어 온 것이 청교도이다. 이는 청교도가 (1)교회정치 체제에서는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로 나갔으며, (2)신학의 노선에서는 성경 이해를 기반으로 한 칼빈 신학을 따르는 것에서가 아닌 새롭게 등장한 지도자에 의해서 도출된 사상을 따랐다. 로버트 브라운, 존 윈스롭, 윌리암 퍼킨스 등에 의해서 동일한 회중주의 추구 안에서도 색깔이 다른 성향을 띠며 구원 얻는 믿음의 의로운 행위를 가져나가는 수단과 방법으로 율법을 다루어간 유대교의 율법주의자와는 모습을 달리하는 구원 얻은 믿음에 의한 의로운 행위에 따른 축복의 수단과 방법으로 변신한 기독교의 율법주의자로 모습을 가져갔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의 온전한 순종을 문자주의에 의한 십계명의 율법 준수에서 가져갔다. (3)성경의 몰이해는 기독교의 정통성(orthodoxy)에서 떠나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 또는 반칼빈주의자'(Anti-Calvinist)로, 그리고 이단으로 흘러갔다. 회중주의를 추구하는 청교도가 침례파 또는 재침례파가 되거나 그들과 결합하고, 알미니안주의 신학3)이 지배적이며, 퀘이커,4) 유니테리언,5) 세대주의6)의 출현이 그러하다. 이들 모두는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들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영국국교회의 반대파에 서 있는 청교도에 의해서 나타났다. (3)청교도 신학의 거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존 오웬’(John Owen, 1616-1683),7)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8)는 칼빈주의 신학자라고 알려져 존경하고 있어 그들의 글과 설교를 통해 교회가 큰 영향을 받고 따르는 신앙의 사조를 이루고 있으나, 그들의 설교와 글 안에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의한 프로테스탄트 청교도가 아닌 것에 있는 것을 보게도 된다. 정성구 교수는 주제 발표인 ‘회중파 청교도의 역사적 고찰’에서 청교도를 16~17세기 영국 및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칼빈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일컫는 말로서 정의하며 그 안에는 다양한 교파 장로교·감리교·성공회·침례회·회중파 계열이 있다고 소개했는데, 이날 강연에 소개 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장로교가 아닌 회중파 청교도로 분류된다. 그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상은 감리교를 세운 웨슬리(John Wesley, 1705-1791)에게 영향을 끼쳤으니, 그 외에 청교도 목회자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영국 교회인(English Churchman)으로 인정되는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예정론에서 유기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청교도 존 밀턴(John Milton) 또한 그 자신이 알미니안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거나 알미니안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여기서는 몇 사람만 들었지만, 회중주의 청교도의 신학과 신앙 사상은 칼빈주의에 견고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에 서 있는 것이었다.
서철원 교수9)는 주제 발표인 ‘회중파 청교도의 역사적 고찰’에서의 논평에서 종교개혁 당시 로마카톨릭교회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 외에 행함을 더해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했고,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니 거기에 선행, 구제와 고행 등을 더했다며, “개혁신학은 이런 ‘믿음+선행=구원’이라는 중세시대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고 ‘범죄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하시고 그것을 믿는 자는, 죄 값을 지불한 것으로 보고 의롭다고 선언해주심으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쳤다”며 회중파 청교도들이 말하는 회심준비론은 이에 반하는 것으로 개혁신학적 가르침이 아니라고 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 신앙은 사도 신앙의 계승에 있는 것으로, 성경의 바른 이해에 의해서 있게 됨
그러한데, 청교도로 불리는 이들이 왜 이처럼 칼빈주의에 의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서 벗어난 것일까? 무엇으로 그렇다고 말하게 되는가?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장로주의자 청교도들이 말하는 것도 회중주의자 청교도들이 말하는 것도 성경의 이해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용어를 사용함에서도 그러하며, 내용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때의 성경 이해는 하나님의 구원 원리와 본문의 문맥이 충실하게 파악되는 것에서여야 한다. 하지만 청교도 당대의 시대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신앙의 정신을 고취시켜 나간 글과 설교는 오늘의 시대에 이르러서 평가될 때 보이지 않고 알지 못했던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요인은 칼빈주의 신학을 몰라서도 아니며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지 못해서도 아닌, 성경 이해의 부족에서 이다. 이는 그만큼 성경 이해에 있을 수 있는 신학의 발전이 있어 왔고 신앙의 원리에 눈을 뜰 수 있게 된 시대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요인에 의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에서 갖는 비평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를 16, 17세기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대로 오늘의 청교도 신앙이어야 하는 것 인양 알아서는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성경의 바른 이해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오늘의 이 시대에 와서도 갖는다. 해서, 성경을 바르게 알고자 노력하자.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주해 계시며 그 내용과 그 내용이 지닌 하나님의 본의를 파악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이 되어 조명해 주시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성경을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불러 교회를 이루게 해 주시고 목사와 교사를 세워주시지 않았는가?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에 두고 깨달을 수 있도록 진리에 깨어 있는 영적 귀와 눈과 마음을 주시지 않았는가? 이 모두를 갖추어 주시고서 읽는 것을 깨달으며 듣는 것을 깨닫느냐며 말씀을 상기시키시지 않으신가?
우리가 신앙하는 본의 모델은 청교도 신앙이 아니며, 우리가 신앙하는 목표는 청교도 신앙을 가져나가는 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청교도의 신앙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있는 것이어야 하며,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주님의 제자인 사도의 신앙에 있어 가는 것에서이다. 사도 신앙은 우리가 매주일 공예배에서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사도신경에 잘 표현되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구속주이시오 부활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거룩하신 성령님과의 교통으로 죄 사함과 부활에 있을 것이기에 주와 함께 주의 나라에서 영생할 것을 믿음을 세상 끝날까지 가져나간다는 신앙이다. 이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진리와 함께 하시며 진리를 통해 우리에게 일하신다. 그렇게 우리에게 함께 하는 진리를 사랑하자. 이는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명 있는 운동에 있어 나가는 것이다. 이 운동에 있음이 참으로 청교도 신앙이요,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요, 사도 신앙이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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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장로교적 교회 체제를 제안하면서 각 교구 내 치리를 위한 장로의 선출, 회중에 의한 목사의 선택, 그리고 대주교좌나 부주교좌 등의 폐지와 성직의 동등성을 주장하였다.
2)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3) 알미니안 5대강령(교리) : (1)자유 의지 -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본성이 부패하였을지라도 영적인무능력의 상태에 빠질 정도로 완전히 부패한 것은 아니다. 모든 죄인들은 가각 자유의지를 가지는데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여부에 의해서 악을 택하기도 하고 선을 택하기도 하여 복음을 대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유의지는 인간의 죄를 가지고 있는 본성에 종속(從屬)되어 있지 않다. 죄인은 하나님의 성령과 협동(協同)하여 중생(重生)이 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하든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遺棄)된 죄인은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믿을 수 있기도 전에 성령에 의하여 반드시 중생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며 중생에 선행(先行)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이며 그것은 구원을 위한 인간의 공헌이다. (2)조건적 선택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하여 특정한 개인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명에 응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믿을 자들이라고 아시는 자들만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제약된다. 하나님이 예지하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은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인간의 의지의 결과일 분이다. 누가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으며, 그러므로 누가 인간에게 구원을 위하여 선택될 것인가도 인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믿는 자들을 택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3)보편적 속죄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각 개인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선택할 때만 유효하게 된다. (4) 거부할 수 있는 은혜 - 성령은 복음을 통해 외적 소명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 또한 내적소명에 있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에로 죄인들을 데려올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하는 그만큼 성령의 부르심에 성공적으로 응하기도 하는가 하면 또한 거스릴 수도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는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성령의 사역에 인간이 반응하여 순종하는 믿음의 기여가 선행(先行)함으로 비로소 중생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그의 길을 취하게 하는 자들만 그리스도에게 이끄실 수 있다. 죄인이 응하기 전에는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스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하여 거스려지고 방해받을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기도 하였다. (5)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그들의 믿음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협력을 통하여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에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을 예비하셨지만 하나님의 예비는 인간 자유의지에 의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협동할 것을 택하여 하나님의 은총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해서만 효과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세상에서 누가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 실행의 결과에 있으며, 믿음을 지키고 은총의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관건은 신자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이 믿음에 실패하는 자들은 유기 된다. 이 다섯 가지는 웨슬레에 의해서 더욱 견고히 되어 (1) 인간의 부분 타락 혹은 부분적 자유의지 (2)신인협동에 의한 구원 (3)만인구원론 혹은 보편적 속죄 (4)부될 수 있는 선재적 은총 혹은 내재적 은총 (5)확신할 수 없는 구원 혹은 구원의 상실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인간의 부패, 원죄를 부인하며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자유의지를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잇고 있는 것에 따른 것으로, 칼빈주의 5대강령(교리)인 (1)전적 타락 또는 전적 부패 (2) 무조거적 선택 (3)제한적 속죄 (4)불가항력적 은혜 (5)성도의 견인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강령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구원 얻는 믿음은 인간에 내주해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주권적 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행위에 의한 일로 간주된다.
4) (1)‘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등장한 이단의 한 종파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떤다”는 뜻에서 불리게 된 것으로, 영국의 종교 재판 당시 일반 대중들이 조롱하기 위해 "덜덜 떨다"라는 의미인 ‘퀘이커’(Quaker)라고 부른데서 시작되었으며, 퀘이커로 불리게 사람들은 이 명칭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형제들의 단체를 뜻하는 ‘Friends Society’(친우회)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종교친우회’라고 칭한다. 이렇게 멸시와 비방조의 ‘퀘이커’를 자신들을 뜻하는 종교단체(교도)로 삼은 이는 조지 폭스(George Fox)이다. 그는 19세에 집을 나와 4년간의 구도여행을 통해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산에서 환상을 보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1650년대에 명상 운동을 제창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로 모여진 자신들을 퀘이커라고 불렀다. 퀘이커교를 이룬 조지 폭스와 그의 교도는 영국 정부에게서 탄압을 받았으나, 퀘이커 신도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지금의 미국 펜실베이니아 도시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2)퀘이커의 종교적 특징은 교회의 예식을 거부하며, 침묵의 예배에 있어나간다는 명상을 통해서 내면의 빛을 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체험하는 경험을 한다고 여긴다. 이런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예배 중 진행하는 예배자가 없이 예배당에 앉아 묵상하며 떠오른 영적인 생각이나 감명 깊게 다가온 노래, 시편, 성경, 말씀, 연주 등을 나눈다. 그리고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중시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진실히 살고자 한다. 스스로와 타인에게 진실 된 삶을 살려 노력한다. (3)이러한 퀘이커는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청교도와는 전혀 다르게 예정설과 원죄 개념을 부인하며,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신성(神性)이 있어 이를 기르는 법을 배움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퀘이커는 개인의 믿음에 자유와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내면의 빛을 통해 신성을 따른다면 그 종교가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봄으로 기독교적 퀘이커, 유대인적 퀘이커, 불교적 퀘이커, 무신론적 퀘이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함으로 종교의 다원화에 있음으로써 이단이 되었다. 따라서 퀘이커는 프로테스탄트도 아니며, 청교도도 아니다.
5) (1)유니테리언((unitarian)은 19세기에 등장한 이단이다. 유니테리언의 발생은 윌리엄 채닝(William Ellery Channing, 1780-1842)에 의한 반칼빈주의적인 교리에서 기인했다. 그는 칼빈주의의 예정론인 이중예정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가혹한 형벌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 구원받지 못한 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칼빈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신 삼위일체의 성자하나님을 부정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 즉, 단일신론(Unitheolism)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가 온 인류의 범죄로 유전된 것을 부인하며 펠라기우스적인 사상을 수용하였다. 이것은 이단으로 정죄 받은 아리우스의 사상과 같은 것이다. (2)유니테리언은 뉴잉글랜드의 보스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니버설리즘과 합쳐져 유니버설리스트 유니테리언으로 불리게 되었다.
6)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는 영국의 19세기 국교회 반대파인 플리머스 형제단(형제교회)을 이끈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되었다.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있으며, 그 다양성은 미래 예수 재림까지 시대별로 규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극단적인 알레고리적 성경해석과 축자영감설을 수용하여서, 종교개혁 전통을 따르는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 신학과는 다른 입장에 있다. 영어권의 영국과 미국의 칼뱅주의 교회에 널리 알려졌으나 20세기 초반이 지나며 그 영향력은 급속히 사라졌고 그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크게 영향을 받아 세대주의에 의한 구원관의 천년왕국설을 따르는 교회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7) 존 오웬(John Owen)은 영국 옥스퍼드주 스타드햄의 교구목사이며 청교도인 웨일즈 출신의 헨리 오웬의 아들로, 영국의 비국교도 지도자이며 신학자이며 옥스포드 대학교의 학장이었다.
8)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미국 식민지 시대의 청교도 중에서 회중 교회 목사로,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표준적 칼빈주의자"라고 평가(벤자민 워필드)받으며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는 실제는 칼빈주의 신학자가 아닌 회중주의 청교도 신학자로 그의 설교에는 그 사상이 깔려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그의 행위언약론-능동순종론-회심준비론은 하나로 엮어져 있는 것으로 칼빈주의인 개혁신학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9) 전 총신학교 신학대원 조직신학 교수.
이천우 목사
첫댓글 어제도 전체 메일 쪽지를 보내도 한사람도 후원이 없습니다
가정의 달 오월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참아보려 하지만 사는게 한계에 부칩니다
병원치료도 하질 못하게 된 형편입니다
후원에 참여해 주세요 후원자가 없습니다
카페를 계속해서 운영하려면 회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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