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928.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사랑이 아니면. 등 )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
*** 202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 토요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509314
김레오나르도 2022.09.24. 03:40
연중 25주 토요일 - 사랑이 아니면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번역이 과연 잘 된 번역일까요?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이 번역은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즐기라’는 것이 퇴폐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의미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번역보다 앞선 공동번역성서를 보면 사실 오해를 살만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아, 청춘을 즐겨라. 네 청춘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겨라.
가고 싶은 데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아라.
그러나 즐기라는 말이 영어로 ‘Rejoice’라고 하고, 개신교 번역에서는
‘즐거워하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환호하라’, ‘크게 기뻐하라’,
‘크게 즐거워하라’라는 뜻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에서 쾌락주의도 나쁜 것이 아닌데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얘기하는 쾌락은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욕망을 오히려 절제하고 어떤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
곧 아타락시아의 경지이며, 고통의 부재 또는 고통의 극복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비관주의적이거나
고통에 함몰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더 쉽게 얘기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때 유행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든 즐겁게 살려는 ‘태도’입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는
저의 행복론과도 통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제가 무조건 행복하려는 것은, 억지가 아니라
행복이 조건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되겠다는 저의 의지이고 태도지요.
가난하면 불행하고 부유하면 행복하다면 그것은
돈에 좌우되는 행복이라는 것이고, 그만큼 불완전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코헬렛서는 근심에 머물지 말고,
고통에만 머물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얘기하지요.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그러니 더 큰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근심과 고통이 마음 안에 머물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수난과 십자가의 길에는 발을 내딛지도 말 것입니다.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루에 책 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습니다. 맞습니다. 다독합니다. 물론 많은 분이 이것저것 많이 읽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정독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정독보다 다독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한 권의 책만 읽는 것보다는 여러 장르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깊이가 부족해도 넓게 지식을 갖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질보다는 양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도 질보다 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라는 ‘양’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도자기 공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기 과제를 내면서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평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50개 이상을 만들면 A, 40개 이상이면 B, 그 이하는 C”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몇 개를 만들든 가장 잘 만든 한 점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만들면서 실패의 과정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양보다 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 높은 ‘나’를 만들려면 양적으로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실패에 질적으로 높은 성공을 가져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역시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힘 있는 임금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들어오는 영광의 임금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다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늙은이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오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이야기하지 마라(조너선 스위프트).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순명’, ‘순종’을 표현할 때, 구약성경은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는데, 이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신명 28,1)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라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말씀하신 이유는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경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만하게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굳건한 믿음을 더하고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2024년 9월 28일입니다. 이 시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부터 2024년이 지나간 날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생활합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현대사회는 이 물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바쁘게 돌아갑니다. 시간은 돈처럼 여겨집니다. 평균 시급은 시간당 15$ 정도 합니다. 주차하는 경우에도 시간당 주차비를 계산합니다. 시간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육상 경기에서 시간은 순위의 기준이 됩니다. 9월 28일이 뜻 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 생일, 축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9월 2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시간에 가족들이 만나고, 연인이 만나고, 이웃이 만납니다. 74년 전 9월 28일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빼앗긴 서울을 되찾은 날입니다. ‘9.28 수복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의미의 시간들이 모여서 문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약속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간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신앙인들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찾으려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우리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의미의 시간에서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부활의 문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영원의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말씀은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자들에게는 말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못 알아들을 양이면 주님은 늘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을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주님 말씀이 뜻이 감추어져 있어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고 동시에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무엇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뜻을 감췄을까요? 왜 제자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했을까요?
주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때는 주로 자기 자신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기 뜻과 의지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주님은 그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자기 소리는 크게 듣고 주님의 소리는 작아지는 상황을 만들어버립니다.
주님의 뜻이 숨겨져 있었다는 복음의 의미는 주님의 말씀과 달리 제자들은 그들 나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자기 죽음에 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주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 제 뜻 때문에 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가졌던 것을 모두 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주님은 전부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께서 자기 죽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투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실 때문에 주님의 죽음에 관해 묻는 것 또한 제자들은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만약 죽음에 관한 말씀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했던 모든 일들과 시간은 허망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어둠 뒤에 빛이 있고, 옛것은 죽고 새것이 온다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들리는 주님의 소리 또한 가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지니고 걸어가십시오. 죽음은 그대로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싸인
요즘은 도장보다 싸인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은행 업무에서도 싸인을 쓰고
카드 사용 후 싸인을 씁니다.
계약이나 결재 서류에도 싸인을 쓰지요.
싸인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 내용을 온전히 이해했습니다.
이 금액을 온전히 지불합니다.
이 서류에 온전히 책임집니다.
즉 싸인은 내 이름 석 자의 무게와 같습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그대 것입니다.
그대가 어떻게 사용하든 무엇을 지불하든 모두 그대 것입니다.
그대가 책임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그대의 싸인이 있는 오늘 하루를
그대는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을 즐겨라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여라”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90;1,14)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다산>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새로운 각오입니다.
“행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맹자>
자신이 바르면 하느님은 친히 보호자와 방패가 되어 도와 주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추하게 ‘늙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을 열매들처럼 곱게 ‘익어가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혜가 그렇게 품위있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자요, 겸손의 지혜가 아름답게 빛나는 익어가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오늘로서 코헬렛 제1독서는 끝납니다. 오늘 내용 역시 얼마나 풍부하고 좋은 자극이 되는 지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허무주의의 병(病)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허무의 가시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허무는 바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억하라는 신호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하느님뿐입니다. 시종여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같은 하루 꽃같이, 시같은 하루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며, 아름다운 선물 인생을 살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며 단숨에 읽혀 집니다. 코헬렛 성서가 아니곤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교훈을 들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코헬렛이요 이래서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비단 젊은이뿐 아니라 늙은이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깨우침이 되는 코헬렛입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알고 보니 코헬렛은 순수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젊음의 날은 물론 늙음의 날에도 읽고 배우고 깨달아야할 코헬렛의 지혜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이 닥치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코헬렛은 참으로 지혜로운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입니다. 결코 꿈속에 사는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물론 늙은이도 배워고 익혀야 할 지혜입니다. 이래야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고, 가을 단풍처럼, 저녁 노을처럼, ‘곱게’,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레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늙어가면서 심신이 서서히 무너지기 전, 철이 남으로 창조주를 기억함이 유비무환이겠지만, 무너지는 중에도 당황하지 말고 사랑의 생명줄인 창조주 하느님의 끈을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아주 오래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미리 써보라는 과제에 이 구절을 택한 수도자로 인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허무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코헬렛,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로 살라는 각성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코헬렛 독서에는 없는 마지막 부분 말씀이 코헬렛 현자의 충고 말씀이 참 정답고 고맙습니다.
“내 아들아,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하느님 지혜이신 영원한 최고의 현자,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참 귀한 지혜의 가르침이 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후,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 절정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어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할 때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 들었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평생화두가 되었을 말마디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환상일 뿐이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진짜 영성이자 참지혜이며 우리 삶을 날로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로서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시편90,17). 아멘.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지막까지 사람이기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사람이
사람에게
불신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믿음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희망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기쁨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미움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사랑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살림인
사람이기를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45)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 양
수난의 신비를 예시하는 또 다른 예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숫염소 두 마리를 제물로 마련해야 했는데, 크기와 모양이 서로 비슷해야 했습니다(레위 16,7-8 참조). 한 마리에는 ‘주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다른 한 마리에는 ‘아자젤’(들판을 헤매고 떠돌아다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제비를 뽑아 ‘주님’ 몫으로 결정된 염소는 희생 제물로 바치고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냅니다. 그래서 마자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나타냅니까?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죄인인 우리 모습을 하셨던 ‘말씀’이지요. 숫염소나 암염소가 우리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 희생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광야였지요.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 아래로 떨어진 우리였으니까요. 우리를 죽음과 멸망에서 떠나보내시려고 그 책임을 몸소 지러 나서신 만유의 구원자께서는 우리 몫의 운명을 당신에게 지우시어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뜻하셔서 흘러 나왔습니다. 내가 오로지 하느님의 선만을 바란다면, 나의 이러한 뜻은 더없이 고귀해질 것이고, 그러면 성령께서 곧바로 흘러 나올 것입니다. 선한 모든 것은 흘러 념치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러한 일치 속에서만 내게 단맛이 납니다. 그러한 일치 속에서 하느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의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거기에서만 이러한 선과, 존재와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이 쉼을 얻습니다. 이때의 쉼은 마치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쉼입니다. 그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성령을 사랑할 자리입니다. 성령은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일치 속에 있습니다. 성령은 일치 속에서만 선하신 하느님의 맛을 냅니다. 일치 속에서만 모든 선은 흘러 넘치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옵니다. 그러한 사람은 밖으로 나갔을 때보다 “더 부유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난 자들은 훨씬 참된 의미의 자기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잡한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나 단순하게 되어서 그들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과 모든 것이 지금의 일치 속에 있음을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을 때보다 더 고귀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유와 완전한 빔(空) 속에서 살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간에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가지겠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249)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천부경(天符經)을 인용해 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고 본다. 천부경은 고대 환국(桓國) 시대부터 구두로 전승해 오던 경전인데, 현덕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신지에 전서(篆書)로 쓰여 있는 옛 비석을 보고 최치원이 81자의 한문으로 옮겼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민족 사상의 뿌리로서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그 전문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하나(一)로 비롯하되 하나로 시작한 데는 없고, 삼극(三極)을 분석해도 근본은 다힘이 없도다. 하늘은 하나로되 첫 번째요, 땅은 하나로되 두 번째요, 사람도 하나로되 세 번째라. 하나가 쌓여 열도 오가니 삼극의 조화는 어그러짐이 없도다. 하늘에도 둘(陰陽)이 있고 셋(三極)이 있으며, 땅에도 둘(剛柔)이 있고 셋(三極)이 있으며 , 사람에도 둘(仁義)이 있고 셋이 있나니, 큰 셋을 합하면 육이 되어 칠 팔 구를 낳고, 삼(三)과 사(四)로 운행하며 오(五)와 칠(七)로 고리 이루느니라. 하나(一)가 오묘히 커져 만(萬)이 되어 가고 만(萬)이 되어 오나니, 쓰임(用)은 변이.되 본체(本)는 움직이지 않도다. 사람의 본심이 태양의 밝은 데 근본하니, 사람이 하늘 땅과 같이 그 가운데 있도다. 하나로 마치되 하나로 맺어진 데가 없도다.”(96)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다가오는 구절은 바로 ‘귀담아들어라.’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요즘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을 근래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공감적 경청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에서 듣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참된 리더쉽이 무엇인지 보여 준 이순신 장군도 경청을 소홀히 하지 않았잖아요. 요즘 와서 경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경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잠시 공감적 경청에 대하여 ‘이정훈’의 「소통의 기술」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경청의 수준과 단계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5등급: 상대방을 무시한다. 전달 내용이 하나도 없다. 둘째, 4등급: 듣는 척한다.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지고 집중하지 않음으로 계속 불편해진다. 셋째, 3등급: 선택적으로 듣는다. 즉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내용이 나중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넷째, 2등급: 귀 기울여 듣는다. 내용에 집중해서 듣는다. 다섯째, 1등급: 공감해서 경청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경청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공감적 경청입니다. 공감적 경청은 한 마디로 상대방에게 집중하
여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 즉 감정까지 깊이 공감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라 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바로 귀는 둘이지만, 말하는 입은 하나로, 이는 곧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년 정도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도 더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기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능력(?),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편리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의 수난이 일어나고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 말씀하시지 않고 특별히 자기들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음에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러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다.”(9,45)라는 표현은 성서에 무려 17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저희와 달리(?) 이해력이 부족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라는 말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거의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듣고도 듣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공감적 경청 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려는 마음이 부족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의 영혼 상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어둠과 절망을 느낄 만큼 혼란 그 자체였다고 보입니다.
들음을 잃어버린 세상,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연의 소리마저 잃어버린 것이 현대인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보다는 하루 내내 지나치게 오랫동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다 보니 청각에 관계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러니 침묵이 사라졌고, 침묵을 잃어버렸기에 생각함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하고 말씀하신 까닭은 단지 청각적으로 들어라!, 는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침묵 가운데서 잘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침묵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것이며, 이 공감적 경청이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가실 수난의 여정을 동행하고 동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당신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
박윤식 [big-llight] 240927 20:35 ㅣNo.176326
‘그때에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 이렇게 그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관해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예수님도 좋은 때가 계셨다.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모두 놀라워하고 있기에. 그만큼 선포하신 게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 할게다. 이처럼 모든 이가 예수님을 칭찬하고 놀라워한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셨기에. 그런 와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의 시간에 죽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라며 몹시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무슨 뜻인지를 여쭈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찬물 뿌리듯이 수난의 때를 예고하시며 미리 염두에 두시란다. 그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웠단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실감나지도 않았으리라. 이렇게 그분께서는 좋은 때라고 마냥 좋아하지 않으시고, 나쁜 때라고 거부하지 않으셨다. 어떤 때이든 아버지 뜻대로 살려 하셨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예 작정하시고 정작 수난을 예고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수난이 부활을 향한 하나의 커다란 여정의 길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 그 뜻이 너무 깊디깊게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들 눈에는 받아들이는 것도, 묻는 것조차도 신비일 따름이었다.
“귀담아들어라.”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제자들은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아마도 자기중심적으로만 그것을 듣기에 그럴게다. 그분 마음 깊은 곳을 듣지 못하니 아무리 중요한 진리의 말씀일지라도 어디 들릴 리가. 상대의 처지에서 들어주고 깊이 헤아려 주면, 다 기쁨으로 다가오리라. 주님과 이웃과의 만남에서도 깊이 듣는 것이, 오히려 말하는 것 보다 더 필요할 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께서 받아들인 그 엄청난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거두어 인류를 구원하려는 아버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일 게다. 그분은 분노에는 온유함을 보이셨고, 증오에는 사랑을, 죽음에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분이 보여 주신 그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이만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게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할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누구신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늘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그렇지만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셨다.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어, 당신 생명에 영원히 우리를 참여시키셨다. 우리는 귀담아들을 건 듣고 포기할 것은 과감히 하면서 남과 더불어 오순도순 살아야만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당신 영광을 드러내려면, 들어야만 할게다.
----------------------------------------------------
240928.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코헬렛이 그다음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하더니, 이제는 젊음을 즐기고 근심을 떨쳐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코헬렛은 오늘 독서에 해당하는 부분 외에도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그의 태도와 모순되게 보여서 어떤 이들은 이 책이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절감하였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신다고 믿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삶을 어둡게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것은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코헬렛은 아직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의 기쁨 같은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믿으며 맡깁니다.
젊은 시절에는 젊은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즐기고, 꽃이 피면 그 꽃이 시들기 전에 꽃을 즐깁니다.
젊거나 꽃이 핀 그 순간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심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순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탁으로 채웠기에, 코헬렛은 허무한 삶 속에서도 오늘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