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놀이 외 1편
여세실
권태가 나를 긴 고무줄처럼 늘어뜨릴 때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새총 쏘듯이 한쪽 눈을 감고 한곳을 응시한 채로 내 심장을 발사할 때 내 눈알이 새의 날개에 부딪혔을 때 권태의 주머니에는 아직도 구슬이 백 개 천개 사방에서 오는 노래를, 눈알을 굴릴 때마다 달라지는 빛을
이건 개똥 밟는 소리 박살난 것들 위에 드러누워 구르는 소리 권태에게 말한다 나 너 없이도 잘 산다 비틀리고 구겨지고 끊어졌다 찢어질 듯 찢어질 듯 이어지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앉아 있다 아, 하고 어, 하며 날개를 한 번 접었다 펼 때 그게 권태를 부채질 하고 있다고, 그게 발악하는 입모양이라고 되뇌인다 혼자 뿔뿔거리며 개가 간다
내 얼굴 내가 쓸고 걸레질하고 내 얼굴 깊고 내 마음 내가 접고 내가 펴고 구르고 팽글팽글 야 나 진짜 끝장났다 취해서 박살난 사랑 위에서 춤을 춘다 권태가 나를 꼬집는다 권태가 나를 쥐어짜서 유리병에 에센스를 담고 있다 가을엔 무화과를 저미고 밤을 조리고 에센스… 에센스를 한 방울 넣고 내 몸통 속에서 세탁기를 돌린다 밤에도 낮에도 쿵쿵거리며 돌아가서 내 이웃의 잠을 깨운다 누가 이 시간에 노래를 해 누가 잠도 안 자고 밤낮 방망이질을 해 돌팔매질을 해
나 잠 좀 잔다고 그만 짖어라 나 좀 잔다고 더 지저귀라고 뜬 눈이 붉게 충혈 될 때 썩지도 않는 골목을 해매이고 있다 나 개도 새도 아니고 너 구라치지 마라 권태가 온 집안에 알을 까고 있다 장판을 드러내봐라 몸통을 까뒤집고 얼마나 많은 발과 더듬이가 꾸물거리고 있는지를 벌레에게도 성대가 있다 나에게 날개가 있듯이 종이에도 주머니가 있다 그 주머니에서 나 진득하게 녹은 사탕 하나 집어 먹는다
새가 하늘을 구심점으로 돌고 있는 검은 추라는 걸 안다 새가 묶여 있던 공중을 내 몸에 칭칭 감고 거뜬하게 종이 위로 나를 던진다
환대
여세릴
빙판길에서 달걀 한 판을 들고 가다 미끄러졌다
무릎에 피가 철철 흐르고
비둘기들이 깨진 달걀 주위로 날아온다
달걀 노른자들은 검은 눈들과 뒤섞인다
맨손으로 깨진 달걀을 비닐봉지에 담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다가와 발을 구르며
달걀을 밟아 터뜨린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제지해도
아이는 달걀 노른자를 터뜨리기를 멈추지 않고
산책하던 개가 뛰어 와
터진 달걀을 핥는다 개의 주인이 목줄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개는 침을 흘리며 나를 보고 짖는다
영혼 한 판이 뒤집어져 깨지는 동안
연인들은 모퉁이에서 자그마한 소리로 이별을 하고
이별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이 거리가 관광지가 된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편두통에 시달리던 거주민 한 명은
오늘도 어김없이 관자놀이를 집다가 문득
빨래를 걷지 않은 것을 생각해낸다
어제는 밤새 눈이 왔는데
어제는 밤새 어둠의 긴 목이 사람들의 악몽을 빨아들였는데
나의 영혼이 미끄러지든 튀겨지든 아무도 관심이 없고
그저
노른자 위로 눈이 오는데
비린내가 골목을 휘감고 또다시 눈이 오는데
골목 한 가운데에서 깨진 날달걀을 손으로 주워담고 있다
차들이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클락션을 울려대고 있다
이 악몽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 누구야
거침없이 휘돌아가는 이 비릿한 맨손을 부여잡고
날달걀더러 영혼이라며
뒤집어 씌우고 있는 사람 누구야
그 사람을 지목해보세요
누가 정말 범인인 것 같으세요
누가 나에게 몽타주를 그려보라고 애원하고 겁박을 해도
시 한복판에서 날달갈을 주워담고 있는 나는
이 시를 쓰는 이의 몽타주를 알 수 없으니
비둘기가 푸드덕댄다
거주민은 빨래를 거두어들이다가
난간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난간 모양대로 얼어버린 빨래를 걷어
다시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그동안
그동안에도
폭설처럼 내리는 이 타자 소리 멈추질 않고
나는 이제 그만 날달걀을 주워담고 싶은데
이 미끄럽고 비린 것을,
주워담는 연기를 할 때 기분이 어땠는지
이 시가 끝나면 말하리
관객 없는 무대 위에 올라 말하리
내 손이 얼마나 끈적끈적했는지
내 앞에서 전조등을 깜박거리던 차가 울리던
클락션 소리가 얼마나 생생했는지
아무도 내 발을 걸지 않았으므로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는데
제발 저를 도와주지 마세요
가던 길을 가세요
저는 여기 남아서 끝까지 날달걀을 맨손으로
주워 담는 화자로 점찍어졌을 쁀이에요
어서 마저 개를 산책시키고
빨리 아이를 들어올려 안전한 곳으로 가세요
이 수치가 두 팔 벌려 나를 환대할 때
나는 그 한 복판에서 기꺼이
검은 눈에 뒤섞인 날달걀을 주워담으리
날달걀을 쓸어모으던 손을
입으로
입으로 가져가
맛보리
이 얼마나 짭짤하고
이 얼마나 고소한 수치심인지
나는 맛보고 싶었으니까
그리하여 날달걀을 쪼아 먹고 날아가는 새가 될 수도 있고
급기가 난간의 형태를 훔쳐내기에 성공한
극세사 차렵 이불이 될 수도 있으리
날 내버려두세요
혹은
도우세요
당신
내 무릎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을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여세실
202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