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호혜가 2세 황제가 되다.
불법으로 황제가 된 호혜는 그것을 덮을 목적으로 천하를 순방하고,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일하는 황제임을 보여주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고를 탕진하고 배성을 더욱 힘들게 하여 민심이 떠나도록 했다.
궁실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할 목적으로 조고와 짜고 선황(진시황)의 신하들을 처냈다. 뿐만 아니고 진시황의 자녀들에게, 단지 진시황의 피를 받았다는 이유로 목을 잘랐다. 보다 못한 이사가 간언하다가, 그는 허리가 짤리는 형벌을 받고, 일족이 몰살당한다. 유능한 자들을 쳐 낸 자리에 머리에 돌만 든 자들을 등용하여 ‘예, 예’만 하도록 했다. 이사는 진을 망하게 하는 대표적인 간신으로 평하지만 진시황을 도와서 천하를 통일한 그의 공적을 재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호혜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황제를 불신하는 분위기는 더욱 더 팽배하였다.
8) 반란이 일어나다
제일 먼저 반란을 일으킨 자는 안휘성의 진승과 오광이었다.(BC209) 반란 세력은 폭압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의 지원을 받고, 불길처럼 번졌다. 제국의 영내에서는 6국의 세력이 저마다 창칼을 들었다. 역사학자는 반란이라 하고, 진나라에서는 역적이라면서 낮추어 보았다. 호해는 주색에 더욱 빠져들고 --- 죄책감과 허망함과 --- 될데로 되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사와 조고는 권력 투쟁에서 그나마 정신줄이 조금이나마 옳게 박힌 이사는 조고에게 삼족을 멸하는 죽음을 당한다. 호햬가 망신창이가 된 나라 꼴을 보고, 조고를 나무라자 조고는 기분 나쁘다면서 호해마저 죽여버린다. 그리고 호해의 동생이라는 자영을 왕으로 세웠다(논란이 있어서). 황제라는 칭호를 주지 않고 ‘진왕’이라고 했다. 각지에서 6국 세력이 들고 불같이 타올랐으므로 진도 여러 제후국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때 조고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指鹿爲馬 고사이다. 조고가 호해 앞에 사슴을 끌고 와서 말이라고 했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두고 말이라고 하느냐 하니, 말이라고 우기면서 시립한 신하들에게 이것이 말이냐, 사슴이나고 묻는다.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이 말이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권력의 눈치 보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이다.
9) 조고 일족도 몰살 — 나라는 망하다
호해를 시해하고 자영을 왕으로 세운 조고는 나라를 초나라 항우에게 받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영이 조고 일족을 몰살시킨다. 자신은 항우에게 붙잡혀서 죽으므로 진시황이 세운 나라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진 제국을 세운 것도 진시황이지만, 망하게 한 자도 진시황이라고 말한다더라.
10) 진시황의 묘 — 여산의 능묘
여산의 능묘 내부는 어떤 모습일까.
화려하리라는 수많은 추측만 있지, 사실은 모른다.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이 즉위했을 때 여산을 팠다. 통일을 이룩한 후에는 전국에서 70여 만 명의 죄소를 징발하여 노역을 시켰다.”
병마용 등, 놀랄만한 자료들도 많다.
진시황은 BC247년에 즉위하여 BC210년에 죽었다.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진시황이 죽었을 때는 능묘가 완벽하게 완성된 것은 아니었으나, 거의 마무리되었다.
능묘의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는 전설만 있다.(생략함), 그 외에도 도굴 이야기 등 숱한 전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 漢代 유학자들의 평가
(1) 잃어버린 민심이 나라를 무너뜨렸다.
(*법치 통치는 민심보다는 법의 공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상앙)
(2) 간언제도가 황제를 지킨다.
대신들의 침묵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한의 가의)
(3) 법가 사상 — 황제를 독재자로 만들었다. (유가들의 주장)
(4) 진승(농민 반란군)이 쉽게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민심을 버리지 않았다.
----> 한나라의 유학자들은 ‘민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진시황의 평가는 후대로 올수록 긍정적인 평가가 많아진다.
(근본적으로는 나쁜 황제이지만 ------그래도 업적은)
12) 진시황 때의 미술 자료는 사진으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