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긴 왜 울어 -2-
피자를 먹을 땐 예외 없이 매운 고추 절임을 같이 먹었고, 멕시코 식당에 가면 잘게 다진 할라페뇨를 달라고 해서 메인 요리와 함께 먹었다. 무슨 음식이건 소스는 번번이 따로 담아달라고 했다. 엄마는 고수와 아보카도와 피망을 좋아하지 않았고, 셀러리는 극도로 싫어했다. 단 음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말 어쩌다 하겐다즈 딸기 아이스크림이나 탄제린 젤리 한 봉지를 먹을 때가 있었고, 크리스마스에 시즈 트뤼프 초코릿 한두 개를 먹거나 생일날 블루베리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정도였다. 간식이나 아침은 잘 먹지 않았다. 그리고 짜게 먹는 걸 좋아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것이 엄마가 타인을 사랑하는 방식이니까.이를 테면 듣기 좋은 말이나 끊임없이 지지하는 말을 해주는 식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걸 평소에 잘 봐두었다가 그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편안하게 배려받는 느낌을 받게 해주는 식이었다.
엄마는 누군가 찌개를 먹을 때 국물이 많은 걸 좋아하는지,매운 걸 잘 못 먹는지, 토마토를 싫어하는지,해산물을 안 먹는지, 먹는 양이 많은 편인지 어떤지를 시시콜콜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제일 먼저 무슨 반찬 접시를 싹 비우는지를 기억해뒀다가 다음번엔 그 반찬을 접시가 넘치도록 담뿍 담아서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갖가지 다른 음식과 함께 내어놓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1983년에 한국을로 갔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실린 '해외 취업 기회'라는 광고 하나만 믿고 간 거였다. 알고 보니 그 기회란 것은 미군에게 중고 자동차를 파는 서울의 세일즈맨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회사에서는 아빠에게 당시 용산 지역의 랜드마크였던 나이자호텔에서 지내게 해주었는데, 마침 이 호텔 안내 데스크에서 엄마가 일하고 있었다. 아마도 엄마는 아빠가 만난 첫 한국 여자였을 것이다.
두 분은 세 달 동안 데이트를 했고, 세일즈맨 양성 프로그램이끝나자 아빠는 엄마에게 청혼을 했다. 두 분은 80년대 중반에 세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처음에는 일본의 미사와로 가서 살다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살았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1년 뒤에 아버지는 형인 론 삼촌을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트럭 중개 회사에서 일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일은 안정적인 수입원이 되어주었고, 덕분에 2년에 한 번씩 이 대륙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은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겨우 한 살이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이다.
우리는 오리건주의 유진이라는, 북대서양에 인접한 작은 대학 도시에서 살게 됐다. 유진은 윌래밋강의 발원지 언저리에 있는데, 윌래밋강은 도시 아래쪽 칼라푸야산맥에서 저 북쪽 컬럼비아강과 만나는 곳까지 약 240 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다. 강물은 동쪽으로 캐스케이드산맥을, 서쪽으로는 오리건 코스트 산맥을 두고 이 산 저 산을 끼고 굽이굽이 흘러 비욱한 골짝의 윤곽을 또렸하게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