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65
5월22일[연중 제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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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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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qqD6lQseik4
[서울대교구 이한별 도미니코(블광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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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야고보서는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서간입니다.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가르침,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 과부들과 고아들, 병자들을 배려하자는 권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 혹독한 박해 시절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오늘 첫 번째 독서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가슴에 사무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야고보 서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생명, 차원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사라져갈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주님께만 기인합니다.
때로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가끔 거룩한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마다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정 첫날 앞에서 바라보면 수녀님들 얼굴이 엄청납니다.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반드시 성녀가 되고야 말겠다는 표정, 내 기도로 온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탁을 드립니다. “인생을 너무 그렇게 전투적으로도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삶을 만끽하시오. 피정도 기쁘게, 영적 생활도 기쁘게 하십시오.”
찰나 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삶의 우여곡절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기억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깨달음. 고통은 우리네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라는 깨달음. 고통은 잠시지만 고통을 넘어서는 데 따르는 은총과 축복은 영원하다는 깨달음.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나이에 반비례해서 좋은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결코 원치 않았던 것들이 슬슬 친구처럼 찾아옵니다. 병고나 노화나 그로 인한 부작용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측면의 기쁨을 추구해야 할 때로구나. 그것은 영적 생활 안에서의 기쁨, 포기와 물러섬 안에서의 기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기쁨, 그 기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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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크신 주님 바람 앞에 한 줄기 연기인 우리들>
최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LG그룹 구본무 회장님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 듣습니다.
모그룹 총수처럼 조폭이나 수전노 같지 않으셨답니다.
제왕적 갑질이나 비인간적 횡포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답니다.
정도(正道) 경영, 투명 경영을 주창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었답니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직원들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돋보였답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숨은 자선도 많이 하셨답니다.
직원들을 하인 부리듯 줄줄이 일렬로 총집합시켜놓고, 군기잡고 호통쳤던 어떤 재벌 총수와는 달리, 구회장님은 언제나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사셨답니다.
과한 의전과 복잡한 격식을 멀리한 소탈했던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장례식도 아주 소박하게 치러졌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조차 떠들썩하게 과시하는 한국 사회의 장례문화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가 남긴 몇몇 어록들은 다른 재벌 총수들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겨야 할 귀한 말씀들입니다.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 받는 기업이 됩시다.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모든 일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경영 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기존 인력을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협력회사와의 갑을 관계는 없습니다.
협력회사에 단순히 도움을 주겠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협력회사의 성장이 곧 우리의 성장임을 인식하고 실행해주기 바랍니다.”
대기업 오너였지만 검소하고 조용하게 세상과 이별한 모습, ‘이웃집 아저씨’ 처럼 따뜻하고 품격있는 그룹총수로서의 모범을 남기고,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나신 회장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 아침 야고보 사도의 권고 말씀이 비수처럼 제 마음에 꽂힙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스승님의 정체와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쳤던 그였습니다. 때로 주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도 겪었고, 주님 때문에 깊이를 알수 없는 바닥 체험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심오한 스승님의 뜻, 그분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그의 표현이기에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티끌보다 작은 것에 목숨걸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큰 인물들, 나라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거물들도 노화로 인한 쇠락 앞에 정말이지 초라한 모습으로 변화되더군요.
마침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쉰 날, 확인하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덧없고 보잘 것 없더군요.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바람에 우리를 내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한 줄기 작은 연기같은 우리를 당신 크신 사랑과 자비의 바람에 합류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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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AUD0bfTj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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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정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는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보호법의 창시자이며, 동시에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 유태인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이 두 개의 아이러니한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히틀러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악한 사람이었을까요? 악한 사람이 어떻게 동물을 보호하는 법까지 만들었을까요?
그렇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짐승이나 물건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들에 자신의 처지를 투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사람은 커서 물건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구 쌓아놓습니다.
금쪽 상담소에 ‘김창훈’ 씨가 나왔습니다. 저장 강박증이 있고 아이를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5남매를 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김창훈 씨를 바빠서 보호해 줄 수가 없어서 4년을 맞으며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호를 못 해줄 거라면 낳지를 말지!” 결국 물건이나 동물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와 같아서, 자기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동물이 진정으로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사랑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같은 인간 중에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영화 ‘베테랑’에서 보면 재벌 2세가 가난한 사람을 핍박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자신과 경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직 그는 부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부자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재벌 2세 조태오는 밀린 임금 420만 원 때문에 1인 시위를 하는 아버지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올린 다음 아버지가 구타당하는 모습을 자식이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회사 이미지를 위해서는 환자들에게 잘 대해주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수천억 자산가인 김승호 씨는 우리나라 사업가 중 어떤 사람들은 식당에 갔을 때 종업원들을 막 대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 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겐 아직도 식당 종업원이 자신의 지위를 올리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돈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높아지려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면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아기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힘입는다면 자신처럼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아이들을 낳은 부모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을 사랑하려면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시각이 바뀝니다. 애벌레일 때는 나보다 못한 이들을 괄시하고 무시합니다. 자신보다 나은 애벌레가 있다면 그와 결탁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비가 되면 자비의 눈으로 애벌레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애벌레들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눈이 사라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 사이에 여러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욕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욕정이 욕심이 되고 그 욕심이 경쟁하게 하고 다투게 합니다. 따라서 아직 애벌레의 욕정이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나비가 되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적이 됩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이렇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교만한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거지를 만나 자비심을 느끼며 그 삶이 그들을 무시하며 살 때보다 더 행복함을 알고 그들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를 무시한 게 마음에 걸려 그에게 가진 돈을 다 주었는데 참 평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는 이제 작은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작은 사람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수,목,금요일(22~24일)은 사제 연수 관계로 복음 묵상을 쉬겠습니다. 토요일 새벽 5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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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아와 포용력>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인 김지윤 강사가 상대를 이해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을 들었습니다.
김지윤 소장이 결혼하여 6년 정도 지나서였다고 합니다. 소장은 여자임에도 좀 털털하고 직설적입니다. 반면 그의 남편은 매우 꼼꼼한 편이라고 합니다.
설거지와 빨래 모두 남편이 잘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어떤 옷들이나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다 넣지 않고 밖으로 삐져나와 걸쳐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6년이나 보아오다가 남편에게 왜 이런 것들은 바구니에 온전히 다 집어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지저분하게 걸쳐놓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의 자상한 대답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 젖은 옷이나 수건은 밑으로 쌓이게 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걸쳐서 건조시키는 거야.” 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빨래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젖은 러닝에 곰팡이가 생긴 적이 있어서 그 방법을 써서 잘 압니다. 그러나 김지윤 소장이 놀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기 이전에 친구 부부가 사는 집에 몇 달 동안 얹혀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냄비가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의 집 사정이라 그 냄비가 왜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결국 그 집 남편이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며 그 냄비가 왜 일주일 동안이나 화장실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아내는 “네~ 치울게요~”하고 냄비를 치웠습니다. 그냥 가정살림에 무관심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어쩌다 들고 들어왔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곳에 두었던 것을 치우지 않은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지윤 소장은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내 남편이 내 친구와 결혼했다면 내 친구는 남편이 빨래를 통에 완전히 넣지 않는 것에 대해 영원히 묻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그것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나의 문제였지만 내 친구는 관심도 없었을 수 있었겠구나. 내 문제였는데 남편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만들어내고 나만의 문제들임에도 계속 보편화 시키면 상대의 고유한 문제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모세 때 모세의 영을 70원로에게 나누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70원로에 속하지 않은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도 영을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와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즉 예언을 하고 있는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에게 문제가 아니고, 그들을 시기하는 여호수아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포용력이 크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종교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천주교도 모든 종교에 대해 우호적인데 일부 개신교만 모든 종교에 대해 약간은 거부적인 소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자신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천주교에 투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당신을 지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반대한 적이 없고 예수님처럼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함께 지지하는 동료요 형제로 여겨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맞는 자세가 아닐까요? 사실 ‘내’가 커지면 남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은 작아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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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웠던 속담 중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를 다니면서 이 속담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를 기어 다니는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그 애벌레들이 모두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풀잎에, 가지에 붙어서 죽은 것처럼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애벌레들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고치의 과정을 지내고 있는 애벌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거지왕자’라는 동화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궁궐에만 살던 왕자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 거지로 변장하고 궁 밖으로 나왔습니다. 왕자는 화려하고, 멋진 것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지지 못해서, 신분이 낮아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왕자의 옷을 벗고, 거지 옷을 입었지만 왕자는 비로소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1982년도에 신학생은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그만 두는 동창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독신의 의무를 지킬 수 없어서 그만 두는 친구,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했지만 신학교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현실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며 그만 두는 친구, 부제품을 받았지만 서품을 앞두고 그만 두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2023년 한국천주교교회의 통계자료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597만 675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비율은 13.5%입니다. 86.5%의 교우는 주일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팬데믹 이후 주일미사 참례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상황까지 회복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신앙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 구원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나비가 되듯이, 신앙인은 복음을 실천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시 "방랑자의 비밀" (The Riddle of Strider)”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네. 타버린 재에서 불길이 깨어날 것이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구치리라, 부러진 칼날은 새로이 제련될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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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관대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이고 한 편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마 이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여야 할 선교이다.
우리는 가끔 죄인에게는 벌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이방민족으로 여기고, 걸림돌이 되는 지체를 교회로부터 떼어 내라고 한다. 이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가라지를 솎아냄으로써 교회의 평화를 해친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오류에 눈먼 그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하여간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우리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기에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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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일이 제자들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금지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하는 일은 사실 빈번히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당함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자 제안된 것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야말로 하루빨리 배제하고 소외하여야 할 절대 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 또한 고착된 이념이나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허세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고자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교회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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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40)
1) 여기서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한 적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 단순히 “사도들이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사도들이 모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빌려준 사람(마르 11,3), 또 최후의 만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집을 빌려 준 사람(마르 14,14)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신자)였는데, 사도들은 그 사람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상황이었는데,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 또는, 신자가 아닌데도 신자 행세를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어떻게 식별해야 하는가? 신분증이나 증명서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텐데, 신분증이나 증명서를 위조하는 일이 아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 아니라 ‘삶’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구원의 보편성’과 ‘교회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면서 신앙인들보다 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결코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9,41)
2) 요한 사도가 막은 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문제는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라는 계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십계명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의 차별과 소외 문제도 아니고,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신성 모독에 관한 문제이고,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1-16) <여기서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안 믿지만 바오로가 믿는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믿음 없이 사용하는 예수님의 이름에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말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39절의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3)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두 말씀을 합하면, 예수님과 악의 싸움에는, 또는 선과 악의 싸움에는 ‘중립’이란 없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닌 중립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분명히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미지근함을’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자기가 지은 죄를 알고 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데,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는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죄인이 아니니까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하지도 않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뜨겁게 믿는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안 믿는 것’, 즉 ‘알곡’이 아닌 것은 모두 ‘쭉정이’입니다. 쭉정이 같은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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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나궁렬 요셉 신부님]
<하느님이 일하시는 영역은 온 세상>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병에 걸린 것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지어서 어둠의 세력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병을 고쳐주실 때 당시의 언어를 사용하여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가득 모아놓고 병을 고쳐주신 적은 없다. 그분은 지나시다가 만나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 상처받아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다시 말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 병을 고쳐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본래 목적은 병자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었다. 치유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요한이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는 보고를 받고 나무라셨다.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몰아내는 사람은 당신처럼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던 영역을 하느님 세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당신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은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 영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어느 면에서 제자들의 신앙보다 더 깊은 신앙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를 그는 쫓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영역은 제자들의 범위를 넘어 온 세상을 무대로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교회에 한정시킬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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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부산교구 김옥수 도미니코 신부님]
<이웃에 대하여>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삶에 필요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무언가를 바로 잘 하게 하는 힘이 곧 은총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총을 받지 못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서 사람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음을 강조합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더불어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더불어 살도록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는 성서의 말씀을 상기합시다. 또 사도 바오로께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장 7절에서 "성령께서 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도록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잘 사용하는 일이 곧 선행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잘 한다면 그것이 곧 선행입니다. 선행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총을 많이 받았다 한들 그것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맙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받은 은총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행은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선행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자기 자신을 피조물로 증언하는 일입니다. 누군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으로 한 것이기에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뽑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뽑힌 이들은 남을 더 잘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뽑혔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도와 줄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만큼 은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뽑히지 못한 사람을 더 잘 도와주라는 이유입니다. 더 잘 도와주는 것만 빼면, 다시 말하면 더 받은 은총만 없다면 서로가 다를 바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기는커녕 남이 잘 하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남이 잘 하는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과시하기 위하여 남의 선행을 빼앗아 버린다든지 없애버리려 한다면 힘없는 도구는 없애 버릴 수 있겠지만 그 힘을 주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서로의 삶을 돕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거들 짝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은총을 주셨습니다. 서로가 더 잘 되도록 돕는 일에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사용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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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웠던 속담 중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를 다니면서 이 속담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를 기어 다니는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그 애벌레들이 모두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풀잎에, 가지에 붙어서 죽은 것처럼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애벌레들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고치의 과정을 지내고 있는 애벌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거지왕자’라는 동화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궁궐에만 살던 왕자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 거지로 변장하고 궁 밖으로 나왔습니다. 왕자는 화려하고, 멋진 것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지지 못해서, 신분이 낮아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왕자의 옷을 벗고, 거지 옷을 입었지만 왕자는 비로소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1982년도에 신학생은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그만 두는 동창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독신의 의무를 지킬 수 없어서 그만 두는 친구,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했지만 신학교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현실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며 그만 두는 친구, 부제품을 받았지만 서품을 앞두고 그만 두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2023년 한국천주교교회의 통계자료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597만 675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비율은 13.5%입니다. 86.5%의 교우는 주일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팬데믹 이후 주일미사 참례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상황까지 회복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신앙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 구원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나비가 되듯이, 신앙인은 복음을 실천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시 "방랑자의 비밀" (The Riddle of Strider)”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네. 타버린 재에서 불길이 깨어날 것이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구치리라, 부러진 칼날은 새로이 제련될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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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인터넷 방송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18세 이하의 청소년 절반이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성형수술을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청소년이 자기 신체 대한 불만족 그리고 여기서 오는 불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설문조사였습니다.
사실 성형수술로 얼굴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웃지 않는 얼굴을 웃는 얼굴로 바꾸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물론 얼굴 뼈 수술을 하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웃고는 있는 것 같은데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따라서 웃는 얼굴은 인공적인 성형이 아닌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은 대체로 너그럽지 못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 분위기가 전달되어서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그 상대방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기입니다. 고스란히 나에게 다시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내가 먼저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상대방의 얼굴을 통해 웃음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진리인데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자기는 원래 그렇다면서 스스로 철벽을 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에는 많이 웃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계속 웃었습니다. 아주 썰렁한 농담에도 폭소를 터뜨립니다. 사랑하면 세상의 밝은 모습만 보게 되어서 웃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두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으로 치면 어떤 사람일까요? 성당에 다니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이 성당 다니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인상 쓰고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이 전혀 없다는 생각으로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나의 뜻과 다르다고,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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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 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제자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남에게 헌신할 줄 아는 선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사랑하길 꺼리는 것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합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의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 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는 것은 나’여야 합니다.
본당에는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 하는데, 이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태입니다. 각 단체들이 끼리끼리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면, 남의 이목을 끄는 명예나 특권만을 내 세울 것이 아니라,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는 숨은 사랑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명예나 특권은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된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의 소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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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
우리이지만
우리라는
울타리 허물어
우리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또 다른 우리
기꺼이 품어야
참으로 우리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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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관용과 겸손-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사제서품이후 35년 동안 거의 날마다 강론 쓰는 일이 습관이 되니 요즘은 많이 자유롭고 싶어 일기 쓰듯 강론을 씁니다. 어제 받은 메시지도 충격입니다. 연이어 부음을 듣습니다.
“김길수 사도요한 교수님 알고 계세요? 어제 새벽 주무시는 듯 본향으로 떠나셨어요. 교회의 한 어른, 한 별이 지구를 떠나신 듯...허전함을 남기고 떠나셨어요. 내일 10시 무태성당서 장례미사, 기도해주세요.”
38년 전 대구가대 대학원에 편입할 때 대구가대의 교무과장으로 재직하던 교수님은 참 반듯하고 친절하고 설명도 명쾌했던 신사다운 분으로, 또 교회의 큰 일꾼으로 기억합니다.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많이 너그럽고 겸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합니다.
“친구는 또 하나의 나와 같다. 서로 기댈 수 있는 이와 함께라면 더 멀리 갈수 있다.”<다산>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런 이들이 이런 좋은 친구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도반 역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장인은 일에 나서기 전에 그 연장을 잘 손질한다. 어떤 나라에 살든지 현명한 사람을 섬기고 어진 사람과 벗해야 한다.”<논어>
현명하고 어진 사람 역시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이겠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이 관용과 겸손의 사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때 날로 너그러워지고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전 짧은 자작시 불암산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때로 크고 깊게 와닿는 침묵중의 불암산입니다. 큰 산은 관대함을, 깊은 산은 겸손함을 상징합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역시 좋은 사람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깊은 겸손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크고 깊은 좋은 산처럼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예수님입니다.
또 하나 제가 좋아하는 한자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정수유성, 심수무성靜水流深, 深水無聲) 이 또한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의 인품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요 무지한 사람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관대한 마음이,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빛납니다. 불어로 ‘나와는 다른 타자의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는 너그럽고 겸손한 관용의 정신’을 ‘똘레랑스(tolerance)’라 부르며 가톨릭교회의 영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요한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둘의 극명한 차이를 발견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요한을 대표한 제자들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폐쇄적인 완전히 닫혀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즘 양극화의 시대, 정서적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빈부의 양극화등 분열의 시대가 흡사 심리적 내전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 현상입니다. 과연 역사는 진보하는지 묻게 됩니다. 참으로 대화와 통합의 정신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줍니다. 바로 이게 스승의 역할입니다. 편협한 자기 시야에 갇혀있던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께 크게 배웠을 것입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넉넉하고 너그러운 관용의 정신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도 관용의 정신이며,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는’ 것 역시 공존의 평화 공동체를 위한 관용의 자세입니다. 기도와 침묵, 인내를 요하는 관용의 정신입니다.
이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두개의 문의 비유입니다. 믿는 이들은 물론 교회나 수도원은 활짝 열린 두문을, 즉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의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두문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수도원의 자랑은 1987년 설립이후 37년 동안 수도원 정문도, 성전문도 늘 열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세상에 이런 늘 열려있는 수도원이나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관용의 정신을 가리킨다면 제1독서 야고보서는 겸손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Man proposes but God dispses).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기치 못한 사고나 죽음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깨달음이 저절로 침묵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요, 참으로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무지와 교만에 대한 답은 겸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겸손은 그대로 지혜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도 널려 있습니다. 가장 쉬운 일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일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이런 겸손과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겸손과 지혜, 사랑과 평화, 기쁨과 행복을 삽니다. 말그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되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이상적 현실주의자로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그러니 과거의 어둠이나 상처에 아파하며 사는 것은, 내일을 앞당겨 걱정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오늘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살아야 할 날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선물에 감사하면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천국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날마다 관대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은 참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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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선행 독점?>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왜 그런지 어제 독서 야고보서와 자꾸 연결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이것을 막으려고 했던 요한의 속 좁은 생각을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어제 야고보 사도의 말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청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기 때문이고, 청해도 주시지 않음은 당신 뜻을 거스르는 나쁜 것을 청하기 때문이며, 당신이 주고자 하시는 좋은 것을 우리가 청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이 다를 때 일어나는 것인데 이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당신 뜻을 절대로 꺾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많은 경우 욕심 채우기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이 원하는 것은 하느님 뜻과 상관없습니다. 요한이 원하는 것은 특권을 자기들만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건 같이 기뻐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한이 원한 것은 결국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날리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다른 이의 선행도 시기합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만 칭찬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만 선행을 하고 다른 이의 선행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선행과 선행의 권한도 독점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자기 선행 구역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내 구역에서는 나만 선행해야지 다른 사람은 안 된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또 다른 요한이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을 특별히 받았기에 그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그런 요한과 같은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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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일도>
오래 전의 얘기인데 사상체질이라는 책을 누군가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까지 저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재미삼아 저의 체질이 무엇인지 시험을 해보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정확히 제가 좋아하는 음식, 저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생활습관까지도 저와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저는 태양인 체질인데 앉을 때 기대서 앉는 것을 좋아하는 것까지 거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 모든 것이 참으로 天賦的(천부적)이라는 것,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우리의 생명이 바로 天賦的(천부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그래서 생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 성가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고 노래하는데 엄밀하게 얘기하면 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나의 것이라면 내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생명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하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일도 天賦的(천부적)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선택하고 나의 힘으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나의 일로 그것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은 되는가 싶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게 됩니다.
이렇듯 생명도, 일도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자기가 하는 일에 허세를 부리며 자랑해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좋은 일은 성실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힘으로 하는 것도 악이지만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야고보서는 얘기합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님은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나무라시며 벌주십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의 태도에 대해서 진지한 반성을 하게 합니다.
평양에 북한 주민을 위한 식당과 병원을 세우면서 이 평화 봉사소 사업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아무리 어려워도 이루어질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아무리 내가 하려고 해도 안 될 것이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이것이 저의 믿음이긴 하지만 어떤 때 저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고 저는 놀라게 됩니다.
어떤 때는 이 사업이 마치 제가 잘 해서 된 것처럼 뻐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정말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의 호응이 별로 없을 때, 그래도 도와달라고 아쉬운 소리 해야 할 때, 요즘처럼 국제 식량 사정이 나빠져 이 사업을 하기에 제가 역부족이라고 생각될 때, 남과 북의 관계자들, 특히 북측이 비협조적일 때, 이것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데 뭐 나 좋으라고 하는 줄 아나 하면서 때려 치고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이 일을 맡기신 하느님께 대한 죄스런 마음에 다시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제가 당쇠라는 필명을 가진 주님의 종 마당쇠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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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9,40)
<구원의 보편성!>
오늘 복음(마르9,38-40)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단락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말씀으로 묵상되었습니다. 곧 '배타적 구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보편 구원'에 대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보편된' 또는 '공번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천주교에만 구원이 있다.' 또는 '우리 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배타적 구원'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가장 최근에 개최되었던 '일치와 화해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4개헌장.9개교령.3개선언)'를 통해, 특히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선언했습니다. 곧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잘 실천하면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는 타 종교를 배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다 더 충실하게 그리고 기쁘게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위에는 삶으로 예수님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는 이들보다 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구원이 열려 있다는 것이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땀 흘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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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Y1CXIlZB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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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을 사는 것이
공통된 우리의
자세입니다.
언제나 근본적인
줄기와 맥락이
중요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줄기와 맥락은
모든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멈출 수 없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믿음과 함께하는
우리의 존중입니다.
존중은 각각의
다양성을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합과 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찾아야합니다.
서로의 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열린 참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린 소통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와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격려와 응원으로
나갑시다.
신앙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길은
예수님의 일을
우리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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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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