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 트레킹
►트레킹 일자 : 2024. 04. 13.(토)
►탐방지
▻신재효 고택
▻판소리 박물관
▻고창읍성
▻보리나라 학원농장(청보리 밭)
►날씨 : 맑음 (낮 최고기온 26도)
►참가자 : 최폴리 형제들
▶트레킹 스케치 :
▻기름진 황금(황토)들판이다
▻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어딜가든 도시 전체가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다
▻소나무 가로수가 아름답다
전라북도 고창군에 들어서는 순간
느낀 인상이다
►해마다 4월이면
내 고향 정읍 태인을 방문한다
형제 모두가 부모님 산소에서
예초 및 정비 등 山일을 하고
제를 지내기 위해서다
금년에는 4월12~14일,
2박 3일 일정을 잡아,
12일 17:00 서울에서 출발
13일 새벽부터 山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고창 트레킹을 했다
해마다 전북지방 구석구석
샅샅이 탐방 했지만
또 다시 방문 할 때 마다
변화하는 농촌
발전하는 농.어촌 모습
세월이 흐를수록
가히 유토피아 세상
대한민국 눈부신 발전에
감탄한다.
대한민국 눈부신 발전에
금자탑을 세운
기성세대들의 노고. 자부심.
긍지에 박수를 보내면서
좋은 세상 맘껏 즐길 수 있는
건강을 늘 기원합니다~~~
2024. 04. 14. (일) 아침
정읍에서 최폴리.........
►신재효(申在孝, 1812~1884)
고창에서 태어난 판소리의 대가
전라북도 고창군 모양성 앞에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이
세워져 있다.
이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하고 사재를 털어가며
많은 소리꾼을 교육한 신재효
(申在孝, 1812~1884)를 기리기
위함이다.
고창에는
신재효의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모양성 안에는
그의 추모비가 서 있고
성문 입구에 있는 신재효의 생가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며, 그 집 안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돌비가 서 있다.
또 그의 묘소는 고창읍 내
성두리에 있다.
이처럼 고창에는 신재효의 유적이
널려 있어 ‘신재효 판소리’의
고장이다
그의 생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천대받던 아전 출신인 데다가
‘상놈’들이나 부르는 판소리에
평생 매달려 있었으니
시문집이나 연보 같은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단편적인 글과
전설을 종합해 그의 생애를
알아보자.
그의 신상을 알려주는 호적
단자(單子)가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광흡(光洽)이요, 평산 신씨였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양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했다고 하니 중인이었던 셈이다.
경주인은 중앙과 지방의
연락사무를 맡기기 위해 수령이
서울에 보낸 아전 또는 향리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주인 노릇을 하면서
고창과 인연이 닿아 고창으로
내려와서 관에서 하는 약방을 맡아
보았다.
지금 그의 생가로 알려져 있는
고창읍성인 모양성 입구에 있는
집의 규모는 여염 농가보다
조금 크긴 하지만 부호의 거처
였다고는 볼 수 없다.
그의 나이 일흔한 살 때의
호적 단자에도 주소가 고창
천남면 서문리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서 이 집에서 생애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창에서 자라면서
글을 배웠고, 자라서는
고창현감인 이익상 밑에서
구실아치인 이방 노릇을 하다가
호장이 되었다.
그가 몇 년 동안
이 자리를 맡아 일을 했는지도
확실히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 인정 많고 남 돕기를
잘했다는 그의 성품으로 보아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호장(戶長, 구실아치의 우두머리)의
위세는 별로 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출처 :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고창읍성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고창읍성(모양성)과 선운사,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인 고창은
삼한시대인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열리기 시작,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다.
고창은
방장산을 긴 노령산맥을 등허리에
안고, 서해에 연해지면서 자리한
고을터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 여맥이 이어져 일으켜 세운
곳이다.
방장산이 좌우로 펼쳐져
고창군 일대를 광활한 대지로
만든다.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되어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기도 하다.
고창의 산야는
전북특별자치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비산비야 지역이다.
▷연혁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축성 목적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 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창읍성은 이런 이유로
축성되었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축성방식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어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고창읍성의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
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 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우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카페 게시글
국내여행(등산)사진
전북고창 트레킹(2024.04.13)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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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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