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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외 2편
허 갑 순
여기에서는
교회당이 보이고
하늘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십자가도 보인다
열십자 사이사이로 몸을 부풀린
아파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한 덩어리로 얽히기도 한다
저기에서는
회색 콘크리트의 거대한 몸집과
실타래처럼 풀어진 교회가
희미하게 손사래를 치고 있다
오늘도 안녕하신가
기도는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이 났고
교회 종소리는 더 이상 울릴 필요가 없다
교회의 첨탑도 그저 박물관의 오래된
풍경처럼 스치고 지나친다
하늘을 보지 않는 습관 때문인지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수억 년을 기다리고도
여전히 달리고 싶은 사람들이
십자가와 교회당의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오늘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십자가와 교회당 같은 관계를
기다리고 있다
국민연금
너 어디 있니?
나는 아직도 술래다
너를 잡기 위해 수천 수만 리를 단숨에 달려온 사냥개일지도
냄새 맡는데 이상이 생겼다 뒤틀린 입술,
비비꼬인 혀, 중환자실에 대기 중인 너의 뒤통수가 불안하다
내가 나이 들어 꼬부랑 할머니 때나 너를 만날 수 있을거나
두 다리 뻗고 잠들어도 ㄱ ㅗ ㅐ ㄴ ㅊ ㅏ ㄴㅎ ㅇ ㅡ ㄹ ㅈ ㅣ ㅁ ㅗ ㄹ ㄹ ㅏ
불룩하던 배가 그토록 아름다운 적은 없었지
달거리보다 더 붉은 입술은 거짓말처럼 간지러웠지
달콤한 꿀물이 흐르는 그 땅은 나의 마지막 보루
푸른 피가 흐르는 너의 싱싱한 살점 한입에 털어 넣고
시방, 숨바꼭질하러 사립문 나섰다
내 삶의 종착역, 여기서 너를 따돌릴 차례다
다음 생으로 떠나갈 때까지 나를 올망졸망 따라다닐
노잣돈보다 더 화려한 이름을 찾아서
유 일 한,
옷자락이 보일라 머리카락이 보일라
나라님도 못 찾는 너 위대한 그림자의 아들
족보에도 오르지 못할 개망나니
서편 하늘이 다시 붉어질 때까지
“어디, 어디, 잡아봐라”
모닥불
다리를 벌리고 웅크리고 있는 사내의 사타구니에서 타닥타닥 겨울이 타고 있었다 허름한 낡은 외투자락 끝으로 빠져나온 지폐 한 장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부석부석한 사과와 껍질이 두꺼운 밀감에서는 어젯밤 마셨던 소주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한길가에서 이곳 으슥한 골목 입구로 쫓겨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슬금슬금 사타구니를 기어오르는 모닥불이 그년의 살 속보다 따뜻하다
글쓰기의 괴로움
- 포스트 코로나 19 이후의
허 갑 순
1.
자신의 모습을 지금 당장 그리라고 한다면어떤 모습으로 화폭에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에 우선 내 시선은 고정될 것이며 신체의 일부나 전부를 탐색하기 위해 나는 자신을 모델로 세우기를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얼굴 아니면 손을 그릴 것인가 결정한 다음 4HB 연필을 들고 스케치할 것이다. 빛의 강약을 표현하고 연필화, 수채화 아니면 유화인가를 결정한 다음 거기에 따른 제반 준비를 하게 되면 비로소 한 점의 인물화 또는 정물화 등이 탄생할 것이다. 여기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그린 사람의 심상이 즉 작가가 모델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주제의식이나 삶에 대한
자기를 그린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쉬운 일일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우선은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거울이란 사물을 통해 드러난 모습도 겨우 앞모습이다. 옆모습이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울을 옆이나 뒤쪽에 설치해야 한다. 그러면서 고개를 좌우로 이동하거나 몸의 방향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고도의 제스츄어가 필요하다. 또 전신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커다란 대형거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러한 준비 작업이 끝나면 거울 앞에서 모델이 되기 위해 작가가 요구하는 표정과 동작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취지에 맞추어 어떨 때는 과감하게 옷을 벗어야 할 때도 있고 동물원 원숭이처럼 거꾸로 줄에 매달려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나를 그리고자 하는 작가를 위해 장시간 또는 일생을 통해 기꺼이 침묵하며 인내를 감행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거쳐 나는 거울 앞에서 모델이 되기도 하고 그 모델을 화폭에 담기 위해 작가가 되어야 하는 이중고에 직면하게 된다. 모델이 하나의 동작을 취할 때 작가는 재빨리 그러나 예리하게 그 표정과 동작을 잡아내 화폭에 옮겨야 하고 모델에게 이렇게 저렇게 동작이나 표정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어떤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지 계획이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요구한 대로 모델은 완벽하게 연출할 수도 없지만 작가 또한 아무리 훌륭한 모델을 앞에 두고도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담아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모델 겸 작가가 되어 자신을 그려야만 하는 사람들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처절한 이름 앞에서 희열을 느끼고 고뇌하며 절망한다.
자신이 그려야만 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과 시간이란 명징한 그러면서도 빈틈없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 인간은 그 시간에 종속되어있는 유한한 사물일 따름이다. 그 무한대의 시간은 존재의 비밀을 움켜잡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시간만이 유일하게 이 지상 아니면 천상에 유령처럼 살아남아 홀로 존재할 것이다. 실존의 확인은 바로 이 시간과의 힘겨루기에 다름 아니다. 실존의 반대말은 바로 무실존, 다시 말하면 죽음을 의미한다. 생과 사를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지혜가 만들어 낸 생물학적인 의미이며 죽음조차도 하나의 존재로 파악했을 때 시간은 존재의 상위개념으로서 계속 존재해 갈 것이다. 이 시간이란 작가 앞에 나는 모델이 되어 지금 물구나무서고 있다.
2.
일생을 통해 그리고자 하는 나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그러지고 변해가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눈가에 잔주름이 잡혀가고 키가 줄어드는 것 같고 어깨가 결리며 위장약을 먹고 건강식품을 챙기며 길에서 넘어져 골절을 입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보다도 더 나를 안달하게 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어떤 소명의식 같은 것이다. 아주 서서히 내가 글쟁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내가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희구하며 쓰고자 했던가? 라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단 경력 25년을 넘기면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자체가 바로 프로 정신의 결핍이며 처절한 시정신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작가의 신념이나 자세가 게으르며 무책임하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글 쓰는 일보다는 다른 쪽에다 나를 밀어 넣었다.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내밀리고 그 욕망은 나를 다시 휘감고 지배한다. 어떤 때는 통제가 어려운 사랑의 갈증으로 표출되는가 하면 무기력하게 나 자신을 방치하기도 한다. 내게는 어떤 보편적 논리나 진리 같은 것이 확고하게 서 있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신념도 가질 수가 없었다. 시적 재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뿐이었다. 자신을 문학이라는 거대한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시라는 복잡하고 구분도 없고 함축적인 칼로 내리칠 수밖에 없었다. 애매모호하고 엉뚱한 은유의 틀 속에서 시라는 해부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삶과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아직 꿈을 꾸고 있거나 절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언어가 춤을 추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어가 거칠고 무모한 것은 내가 살아서 움직이고 충돌하고 있으며 그것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의 역정이며 실존의 한 방법이다. 나는 시를 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살고 있기 때문에 시를 쓰고 있다. 맹목적 의지로 삶을 지탱하듯이 맹목적 의지가 내게 주어져 시를 쓸 수 있었으면 한다. 사랑, 욕망, 자유, 절망, 죽음, 아픔, 상처, 허무 이러한 것 들은 계속 내 삶에 또아리를 틀고 나를 조정할 것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이무기가 인간이란 보편성에 더듬이를 밀어 넣고 허갑순이라는 특수성에 계속해서 그 독기를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르메는 우수한 문학자란 위대한 사람의 이미지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위대한 사람이 행한 것을 다른 원료로 각색하고 창조해 내야 한다고 하였는데 새삼 그 말의 깊이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문학, 즉 세태를 따라가는 좌충우돌하는 인생의 삶 그것 자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시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삶이고 인생이며 나이며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3.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역습은 인류의 삶에 치명적인 감염병을 던져 주었다. 오늘도 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 있다는 어두운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다. 이제는 코로나 19 이전의 세계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제 다소 익숙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착용하기와 비대면 사회 등의 대전환점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생물도 아닌 단백질 변형 덩어리인 바이러스 공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절망감이 뉴스를 볼 때마다 밀려온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사회 인간존재의 문제에 대한 그의 사상을 총결산한 책이다. 그는 인간의 생존 양식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하나는 재산·지식·사회적 지위·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다른 하나는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존재양식」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할 때 삶의 희열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미래의 학자들은 프롬을 제3의 힘의 대변자의 계열에 넣어 해석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종교전쟁 말기의 저 위대한 휴머니스트처럼’ 용기 있는 이념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한층 관용을 알고 도움을 주어야 하며 욕구를 잠재울 줄 알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 19의 대유행은 인류의 환경파괴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한 자연의 경고임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다. 팬데믹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고 앞으로 우리 생활에 깊이 침투해서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에 기반한 비접촉 경제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19 이후에 맞게 될 인류는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하지만 지적 창조력이나 이성, 사랑 같은 존재적 가치는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증대될 것이다. 존재의 치열한 의식을 매시간 붙잡고 사투를 벌이는 작가들이 존재하는 한, 소유란 경제적 가치가 추구하는 여러 파장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4.
재난은 그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감염병은 작가들이 설 자리마저 요동치게 만들었다. 도대체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문학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명제 앞에서 당혹할 수밖에 없다. 당면하는 과제에 제대로 맞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속수무책 손을 놓고 있거나 습관대로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죽음의 확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블앙쇼이다. 죽음의 연기라고 표현한 사람은 프루스트다. 사르트르는 행동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였으며 스탕달은 자기 노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글을 쓰는 행위는 고독하고도 개성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한때 죽음에 대한 예찬론자였다.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죽음의 욕구 때문에 심하게 좌절하고 절망하였다. 절망은 다시 죽음의 살갗에 닿게 되고 죽음은 다시 절망에 이르게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청년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나 희망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언니의 죽음은 나의 모든 것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니이체나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등에 심취해 있었고 거의 바닥을 길 정도의 힘밖에 남지 않았었다.
당신은 글을 왜 쓰는가? 왜 글을 읽는가? 지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어떤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도 저도 아니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어떤 콤플렉스가 포진하고 있는가?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챙겨야 할 각자의 몫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꼭 써야 할 것은 내가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에 입각하게 된다. 문학이 한 사회와의 긴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이룩해 나가야 할과제를 던져 주었을
좌절이나 절망은 절대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현실이나 상황 속에 갇혀있다는 의식의 다름 아닌 반응이다. 나의 시가 좌절이나 절망을 향해 가고 있다면 그것의 이면에는 자유나 해방을 향한 몸부림이 묻어있으며 죽음이나 허무의 그림자를 수반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학이 무엇인가? 시가 무엇인가? 배부른 빵도 아니고 힘 있는 권력도 아닐진대 문학을 틀어잡고 놓지 않는 것은 왜일까? 가난과 좌절과 패배의 동의어라고 할 정도로 배고픈 작업을 왜 껴안고 몸부림치는가? 그것은 나를 달팽이 속에 가두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숨을 쉴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문학에는 길도 없고 의무도 없고 다만 자유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