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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 (약1:2-4)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지혜를 구하며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로마의 위대한 웅변가요 정치가이며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시험이 남달리 크고 가혹할수록 그만큼 더 큰 지혜를 터득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영광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작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도 내일 되어질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네카는 말하기를 “우리의 슬픔은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의견과 이해에 달려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시련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시련에 대한 중요한 인식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최선의 것 이외는 주시지 않는다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내가 당하는 시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시련을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은 세 번 나옵니다. 그 중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고 두 번째는 벧전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라고 했으며 세 번째는 욥기 23: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에게 다가오는 시련은 연단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련이 장차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을 미리 안다면 비록 시험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로마의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이것을 바로 깨닫기만 한다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야고보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서양의 격언에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생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시련에 대한 생각 곧 인식이 새롭게 정리되면 시련을 맞이하는 삶의 태도 즉 행동이 바뀌게 되고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나갈 때 우리는 영광 가운데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영광의 내용을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도”라 하였습니다. 인생의 굴곡은 세상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을 아는 것과 실제로 우리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대처해 나가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입니다. 우리가 삶의 질곡을 통과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산 소망이 있으면 우리의 당면한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릴 때는 어떤 새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광풍과 고난의 먹구름이 몰려올 때는 모든 새들은 숲 속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만사가 순조롭고 하나님의 은혜가 피부로 느껴질 때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생을 노래합니다. 반대로 인생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강렬한 믿음의 빛을 발하며 그 고난 속에 잉태된 선물을 바라보고 기뻐합니다. 이것이 참믿음입니다. 믿음의 질을 가름하는 것은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아무리 큰 축복과 은혜를 이미 받았을지라도 믿음의 본질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수용하고 앞으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장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약속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놀라운 구원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확신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현실에 집착하기 보다는 “바라는 것들” 과 “보지 못하는 것들” 에 기대를 갖게 하는데 이 기대는 부득불 험난한 인생살이를 통해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삶의 현실이 하나님의 긍정적인 축복들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어려운 현실을 기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말씀처럼 가학적(加虐的)인 조언도 없을 것입니다. 변장된 축복들인 재난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이 올 때에 이를 악물고 참으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하여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trial) 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시험(temptation) 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음의 고난과 시련입니다. 이것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이’ 로 주기도문에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이 기도는 주께서 우리의 어려운 신앙의 체험과 시험들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시험은 어떤 죄의 유혹에 빠지게 말라는 뜻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고난에 들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도 인용하였는데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이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도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2절에 말하기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바르고 진실된 믿음을 지킬 때 승리의 월계관 즉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헬라어로 ‘페이라조메노스’ 인데 이것은 유혹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시험은 죄의 유혹, 혹은 육신의 유혹으로 마귀가 주는 것인데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의 내면속에, 자기의 욕심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죄를 짓게 된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전가할 수는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그가 범죄 하게 된 원인을 말할 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네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라고 하면서 범죄의 원인을 아내에게, 나아가 아내를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전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13-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으로 일어나는 모든 정욕은 우리를 미혹하는 마귀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경계하며 근신하며 절제하여 우리 스스로가 이길 수 있도록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이 말을 원어로 직역하면 “너희가 갑자기 예기하지 않는 곤경에 휩싸이거든” 혹은 “시험의 한 가운데 떨어지거든‘ 입니다. 역경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할 때에 찾아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황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어야 하며 조용히 자신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고난의 풀무 속에서 온전한 기쁨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역경이 주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구나. 그것은 두꺼비를 닮아 보기 흉하고 독을 품고 있지만 그 머리 속엔 아름다운 보석을 지니고 있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역경을 당하였을 때 무조건 기도하고 믿고 찬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역경을 잊어버리고 무시해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고통을 웃음으로 얼버무려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난과 시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고난은 도리어 더 크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구원으로 바꾸시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승천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주신 고난의 잔을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 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끝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련들은 내가 다 받아야 합니다. 피하거나 도망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에서 정면으로 부딪쳐야 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 때문에 얻어질 수많은 영적 보화들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이겨나갈 때 아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이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온전한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존스턴은 말하기를 ’시련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환히 밝혀주는 횃불이다. 시련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측면들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시련은 사람에게 두 가지 측면을 보게 합니다. 한 가지는 인간이 그렇게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즉 인생은 별것도 아니며 별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 무능력한 존재이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대단한 용기와 많은 장점과 능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결백은 불의의 시험으로 가장 정확하게 증명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금속을 얻으려면 광석을 녹여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믿음이 마음속에 있으면 시험(Testing)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바울도 역시 말하기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고 하였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약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큰 힘을 얻습니다. 궁핍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역경이 온다고 해서 우리들의 주께 향한 신심이 약해지거나 신앙의 헌신이 위축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난관은 성도의 투신을 더욱 자극하며 더욱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육상 선수가 달리기를 할 때 근육이 당겨오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지경에 이르러도 계속하여 달리는 것처럼 인내의 삶은 극한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 믿음을 단념치 않습니다. 인내는 육신의 연약성을 극복하는 승리의 정신입니다. 이 불굴의 정신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체입니다.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을 겪기 전에는 곧잘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인내가 여정이요 과정이라면 온전은 목표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온전히 이루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이 두 말은 성화의 목표와 완성을 뜻합니다. 성화는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성도의 거룩한 품성입니다. 신자들의 최종 목표는 성숙과 온전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우리들의 영적 품성이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데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사막의 교부들이 오랜 단식과 기도를 마치고 한 자리에 둘러앉았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나눔의 시간을 가졌는데 주제는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성인가” 였습니다. 한 사람이 사랑이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고 검소한 생활, 겸손한 태도 등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안토니우스는 그 토론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성은 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소유하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성화의 마지막 단계인 온전의 의미를 갈파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영적 성장의 단계는 시험--순전한 기쁨--인내--성숙--온전함입니다. 시험이 올 때에 인내의 원동력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들의 첫째 소명은 기쁨입니다. 시련 앞에서 기뻐하고 환난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이 기쁨이 없어질 때 우리는 지치고 힘들어하고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기쁨의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시험의 한 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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