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지음 / 글상걸상 / 1만2000원
광화문에서 그는 북악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물이여, 요물." 그 요물이 물러나기는커녕 여전히 발악하고 있으므로 그도 노구를 무릅쓰고 토요일마다 광화문행이다. 겉으론 아직 단단해 뵈지만 그라고 해서 세월의 마모를 피해갈 순 없을 터. 함께 구호 외치면서도 난 솔직히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서정춘, 그는 아랑곳없다. 뜨거운 순정으로 광장을 버틴다. 이런 그를 두고, 그의 시와 어울리지 않는 행보라고 갸웃거릴 사람 적지 않을 듯싶다. 서정춘의 지극한 서정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나도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시 '이슬에 사무치다' 중에서) 그야말로 맑고 투명한 이슬방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지 않은가.
이슬에 비추어 그를 떠올리자 내게도 그의 광화문 행보가 은근 낯설게 다가온다. 한데 그때, '살점'이란 말이 내 생각을 끌어당긴다. 맞아, 웬 살점이지? 그는 이렇게 이어 쓴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버리고 싶다." 저 여린 이슬방울의 온전한 완성을 위하여 그는 자기 살점을 기꺼이 보태주고 싶은 것이다. 지순한 헌신이 아닐 수 없다. 이슬방울과 살점은 언뜻 당황스러운 조합이지만, 그에 이르러 맑고 성스러운 교감으로 거듭난다. 자연과 인간의 스며듦은 이렇게도 경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살점 보태버리고 싶은' 그의 성정(性情)에 숙연해진다. 그의 저 뜨거운 순정의 모심은 이같은 성정의 발로인 것이다. 이런 그가 어찌 이 어지러운 시국을 모른 체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그는 좌절의 극한까지 자신을 몰고 간 시인이다. 민초들이 겪고 있는, 깊은 분노와 좌절들이 자신의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인터뷰에서 서정춘은, 시 '죽편(竹篇)1 -여행' 한 편을 "4년간 80번 고쳐 썼다"고 고백했다. 80번 고쳐 썼다는 건 80번을 좌절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는 80번을 고쳐 쓰며 몸서리쳐지는 패배의 시퍼런 기상을 첨예하게 갈고 닦았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시 '죽편(竹篇)1 -여행' 전문이다. 짧은 시에 담긴 백년 세월의 무게가 참으로 길고도 깊다. 기차 타고 백년을 달린다 한들 이룰 수 있는 서정의 경지가 아니다. 무지막지한 좌절과 패배를 견딘 자만이 겨우 한 칸 다다를 수 있을까.
그러니 서정을 곡해하지 말 일이다. 공감의 서정은 현실을 비켜나지 않는다. 오히려 잘 거른 현실의 울림을 전달하려 더 애쓸 수도 있다. 당대의 서정적 연민은 동시대의 짙은 연대 표현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서정춘의 시를, 오늘 우리 삶의 직접적 연대기로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의 시는 오래된 현재에 가깝다. 지금 여기의 현실보다 더 과거 쪽에서 시가 열린다.
그런 점에서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는 '본원적인 사무침'의 정조를 여기에 되살리려는 시도로 읽힌다. '여울목에서'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나는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이 시집은 너끈하다고 여긴다. "흘러와, 이따금 사기그릇 놓쳐 버린 뒷설거지 소리를 사금파리 귀때기가 솔도록 듣느니 먼 어머니의 손 시린 안부가 궁금하다네." 이 시에 무슨 해석을 더 덧붙일 것인가. "저 먼 어머니의 손 시린 안부"라니. 그저 소리 죽여 신음하며 가만히 먼 어머니의 잔영을 사무쳐 그려볼밖에.
이처럼 서정춘 시의 서정에는 삶의 지난한 곡절들을 품어 안는 숨결이 부어져 있다. 시의 결에 흐르는 애환이 서리서리 구슬프고 단아하다. 'CD'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가 표현한 대로, "참 시리디시린 이니셜" 같은 선천적 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춘은 끊임없이 시를 다듬고 정련한다. 무서운 집념이 아닐 수 없다. 시에도 명장(名匠)이라는 칭호가 있다면 서정춘이 딱 그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시단에서 서정시를 약간 구투(舊套)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당신들에게 나는 서정춘의 시집들을 쥐어주고 싶다. 오래 묵힌 새로움이 얼마나 아름답게 시를 익히는지 제발 좀 보라고. (사족. '이슬에 사무치다'는, 장정의 멋스러움에서도 근래 나온 시집들 중 단연 으뜸이다.)
정우영 시인
첫댓글 오래 묵힌 새로움...... 바로 주문해 보고 싶습니다.
서정춘시인의 시편들은 모두 절절함 인 거 같아요
아님 아픔이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