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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묵상글 ( 연중 제26주일. -“너그러운, 나누는, 죄에 단호한 지도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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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바람직한 지도자상
“너그러운, 나누는, 죄에 단호한 지도자”
“주님의 계명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 주도다.”(시편19,9)
오늘은 참으로 소개할 사항이 많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라 대천사 축일을 못 지냅니다만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미카엘, 미카엘라, 가브리엘, 가브리엘라, 라파엘, 라파엘라 세례명을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저에게도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참 좋은 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 주일 미사때 기도하며 봉헌하려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바람직한 지도자상’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역사상 이런 성인 지도자들을 많이 지녔었으며 지금도 곳곳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우리 신자들은 주님에 이어 이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보고 배우니 참 큰 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26주일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담화문을 통해, “모든 시대에 그러하였듯 우리 시대 이주민, 난민들안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나그네라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발견할 수 있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살아있는 표상을 볼 수 있으며, 이주민과 만남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라 말씀하시며 이들에 대한 환대와 배려를 촉구했습니다.
정순택 대주교 역시, “이주민에 대한 존중과 환대, 그리고 보호는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며, 저출산과 고령화 위기가 예견되는 한국 사회 미래에 이주민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마음과 시야를 한없이 멀리, 넓고, 깊게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지난 9월23일 1974년 출범하여 숱한 위업을 이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 지도자로서의 시의적절한 축하메시지 일부를 나눕니다.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제로서 성교회의 복음 정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정진하시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러 계층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주시기를 빕니다.”
또 한 분 좋은 지도자들 소개합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예레미아스 슈레더(59세) 총재 아빠스가 9.14일,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의 215명 남자 수도원장들과 대표 수녀들 22명이 모인 가운데 선거에서 베네딕도회 총연합 수석 아빠스로 선출되었습니다. 명실공히 전 세계 2만2천여명의 베네딕도회 회원을 대표하게 되었고, 수도공동체에 보낸 서신도 일부 나눕니다.
“젊은 수도자로서 그동안 저는 우리 삶의 선교적 성격이 우리의 위대한 수도원 전통에 그리스도 중심의 긴박함을 더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것이 저에게 영감과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수백명의 형제, 장상, 비서, 선교총무들, 그리고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소박한 수도자들과 함께 일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의 당선은 여러분께서 저에게 주신 이러한 배경과 경험과 관련이 많습니다. 이제 저는 총연합 전체를 포용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넓혀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도 수차례 방문한바 있는 참으로 탁월한, 공과 사가 분명한 바람직한 교회의 사람이자 전 세계 베네디도회 총연합의 지도자가 된 예레미야스 슈레더 아빠스입니다. 39세쯤 오틸리엔 수도원의 아빠스로 시작하여 20년동안 경륜을 쌓으면서 그 능력이 검증된, 수개 국어와 소통에 능통한 세계적 지도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은 나이에 관계 없이 이런 훌륭한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리고 순종과 섬김, 겸손과 지혜, 그리고 맡은바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도 이런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연중 제26주간 미사중 셋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바로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를 통해, 제2독서의 야고보 사도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참으로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배웁니다. 모두의 공통점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비롭고 너그러운 지도자입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서로 닮았습니다. 두분 다 참으로 넉넉하고 너그러운 분들로 마음 넓기가 하늘같고 바다같습니다.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영이 내려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을 말려야 한다는 간청에 모세의 답변이 참 통쾌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편협함을 부끄러워하며 너그러운 모세로부터 크게 보고 배우며, 모세의 후계자로서 지도자 수업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똑같은 역할을 복음의 요한이 그렇게 합니다. 같은 일행이 아닌 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를 막아보려 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요한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세를 닮았습니다.
“막지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든 공동선에 기여한다면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닮은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그런 이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며, 환대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덧셈 관계의, 상생(win-win)의 달인이자 대가인 지도자 예수님이자 모세입니다. 이것 저것 부족한 것, 단점만 생각하는 부정적 뺄셈의 지도자라면 살아 남을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나누고 섬기고 배려하는 지도자입니다.
부자들을 질책하는 야고보 사도는 구약의 정의와 사랑의 예언자들을 닮았습니다. 재물에 노예되어 인간 품위를 상실한 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바로 나눔과 섬김, 배려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도 그대들은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이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하고 있는, 탐욕의 무지에 눈이 먼, 탐욕에 중독된 참 어리석은 부자들입니다.
셋째, 죄에는 단호한 지도자입니다.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예수님이지만 죄에는 단호합니다. 평범한 신자들에게 죄의 유혹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온 산을 불태우듯 죄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죄에 중독되어 죄인줄 모르고 사는 대로 생각하며 돌아올줄 모른다면 돌아올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하시는 말씀이 충격적이니 그렇게 죄의 해악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이대로라면 천국은 불구자들 뿐이겠습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깊이 깨달아 단호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라는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젊고 힘있을 때 죄이지, 늙고 힘없고 병들었을 때는 결코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니 상처가 오래 가고 치유에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약까지 먹으면서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좋은 지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참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은 품위의 사람, 향기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을인생에 접어든 분들은 가을의 품위와 초연함으로 살 일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믿는 이들에게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공부주의 공부가 사람되는 공부, 성인되는 공부, 군자되는 공부입니다.
“군자가 정성을 보존해 생각하고 삼간다면 평안해져서 온몸이 마음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다산>
그러니 지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은 너그러운 삶, 나누는 삶, 죄에 단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면서 죄의 방패역할을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요한17,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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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년 9월 19일 김 신부님 강론글 하단에
아래와 같이 당분간 글을 올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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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10월 6일까지 국내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돌아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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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일 강론글입니다.
http://www.ofmkorea.org/428343
김레오나르도 2021.09.26. 04:48
- 영의 독점, 가장 나쁜 소유욕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제자들의 독점 시도입니다.
민수기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추종하지 않은 원로 둘이
모세와 일흔 원로에게 내렸던 같은 영을 받아 예언을 하자
그들이 예언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복음에서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막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와 주님의 대응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버려두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모세의 경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모든 백성에게도 영이 내리면 좋겠다고 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영이 내리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영이 나의 것이나 또 누구의 것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영은 주님의 것이기에 영이 내리고 안 내리고는
주님께 달린 것인데 주님이 아닌 누가 어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종종 주님의 사랑/은총과 심지어 주님의 영까지
나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유욕이고
시기나 경쟁과도 관련이 있으니 이웃 사랑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니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우선 영에 대한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 가장 나쁜 소유욕입다.
좋은 물건을 나만 가지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이고,
부모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인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려는 것이니 정말 나쁜 소유욕이지요.
다음으로 영의 독점은 시기심이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니 남의 불행에 기댄 나의 행복이며,
사랑이 눈꼽만큼도 없고 미움뿐이기에 결국 자신도 불행합니다.
끝으로 영의 독점은 자기 욕심이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니
결국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영광 드림도 없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주님의 영이나 영의 은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이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간이 침범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은 그 모든 은사를 공짜로 주심에
감사와 영광과 사랑으로 돌려드리는 것뿐이고 그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받은 은사로 하느님께
영광과 사랑을 돌려드릴 때 시기와 경쟁은커녕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때 인간은 같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권고 8번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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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의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정말 반가웠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나 봐. 그래서 네게 전화했어.”라고 합니다.
사실 큰 병에 걸리면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가 죄책감까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뿐입니다.”
병에 걸린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식습관이 잘못되어서, 성당에 안 나가서 등의 이유를 말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 역시 자기 삶을 받아들일 때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곧바로 책임을 지우는 속 좁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 주시는 분이며,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 쫓아낸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진영에서 예언하는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에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면서 말리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은 철저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릴 정도로, 또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더 철저히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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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절대로 돼지랑 씨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둘 다 진흙탕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돼지는 그렇게 되는 걸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찰리 멍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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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26 주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운영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성령의 주도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인 자신이 아니 영을 받은 그룹으로서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지니고 싶어 하지만, 모세는 오히려 온 백성에게 영이 내려지기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물질적 소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청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인의 손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부유한 자들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합니다.
“부자들이여! ...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야고 5,1-2) 참조)
오늘 <복음>은 두 개의 단락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요한은 <제1독서>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 3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제자그룹에 끼어주고 싶지 않는 ‘제자임에 대한 특권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들이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특정 분파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이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 신앙의 지평이 넓고,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뒤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모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결국, 오늘 <제1독서>에서는 권위의 독점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며, <제2독서>에서는 재물의 독점에서 오는 악행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독점과 독선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과 독선의 악을 성령의 힘으로 정화하고 정련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2)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비록 그들이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이제는 제 손과 발이 그들을 가로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그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려 매여 있게 하소서!
오늘,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 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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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아야 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풍성한 가을의 여유를 지니시길 바랍니다.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행동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포성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스쳐 지나갈 말이 아니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 오히려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9-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소금 맛만 느껴지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에페5,10).
가끔은 지옥 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옥은 엄연한 실재이고, 되돌아올 수 없는 종착점입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과장의 말씀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공동체의 유대가 깨지고 배교자들이 생겨났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 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분노와 증오, 원한, 적개심,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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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본당의 날이 잘 끝났습니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미신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바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나붓의 하나 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 왕은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았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지, 미신의 삶을 사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미성숙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숙한 신앙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서를 읽고, 교리를 잘 아는 지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한 업적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직책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더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기꺼이 양보한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의 제단에 기꺼이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던 형들을 용서하고, 품어 주었던 요셉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용감하게 왕 앞에 나섰던 에스테르 왕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일까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짜증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심에 동생을 죽인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던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유다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미성숙은 직책으로도, 능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발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 한 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손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발에 못이 박힌 것은 발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것은 미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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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복음을 읽고 잠시 성전에 앉아봅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복음을 읽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순간 온몸을 돌아다니는 그날의 주님 말씀이 있습니다.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계속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주님께서 왜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좋은 것, 혹은 선한 것에 등돌리기 때문입니다.
등돌리기만 하면 다행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함께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분명 그것은 선한 것이고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내 단체가 아니어서, 내와 친한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 본당이 아니어서, 그것이 선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선함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막지 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대여! 빛은 언제나 빛이고 선은 언제나 선입니다. 밤도 낮도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어떤 상황이나 마음도 빛을 빛이 아니게 선을 선이 아닌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빛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빛나기를 바랍니다.
선이 우리 안에서 그대로 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뜻이 아닌 주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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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반 고등어
얼마 전에 선배 신부님과 마트에 갔습니다.
선배 신부님께서는 타 교구 신부님이십니다.
마트에 들어가 강화 특산물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인삼주도 사고 순무 김치도 샀습니다. 강화 쌀도 샀습니다.
그리고 이 특산물을 저는 선배 신부님께 선물했습니다.
멋지게 카드를 긁었습니다. 잠시 후 긴 영수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계산을 하던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정 금액이 넘어서 저쪽 가시면 뽑기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선배 신부님은 제게
‘이런 거 나 잘된다. 내가 뽑을게.’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꽝 손이거든요. 그래서 선배에게 맡겼습니다.
선배는 고민도 하지 않고 한 장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흔하지 않다는 2등을 뽑아 올렸습니다. 2등 상품은 ‘자반 고등어’였습니다.
‘선물도 사줬으니 이건 그대가 드시게나’라고 말하며 ‘자반 고등어’를 제게 주었습니다.
하하…. 그날 저녁 식탁에 올라온 ‘자반 고등어’ 다른 때보다도 더 맛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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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키엣 대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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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사람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그분은 살림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살림이 아니라
살림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살리는 사람이 참으로
살리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나눔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나눔이 아니라
나눔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나누는 사람이 참으로
나누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섬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섬김이 아니라
섬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참으로
섬기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품음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품음이 아니라
품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품는 사람이 참으로
품으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착함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착함이 아니라
착함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참으로
착하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의로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의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의로운 사람이 참으로
의로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너그러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너그러움이 아니라
너그러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참으로
너그러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어울림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어울림이 아니라
어울림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참으로
어울리시는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부드러움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부드러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참으로
부드러우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그분은 올곧음입니다
그분을 따른다고 올곧음이 아니라
올곧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곁에 선 사람보다
올곧은 사람이 참으로
올곧으신 그분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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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참된 의미와 죄책감에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죄책감과 죄에 대한 감각은 도덕적 발달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됩니다. 죄책감은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찍이 유년기에 생겨나서 일생동안 생겨납니다. 그것은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불쾌감을 감지할 때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같은 느낌은 불안, 공포, 당황, 노여움, 좌절, 침울, 격노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죄책감은 ‘소심증’과 관련됩니다. 소심증이란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작은 자갈'을 의미합니다. 조그만 돌맹이 하나가 우연히 신발속에 들어가면 걸을 때 뜨끔뜨끔 찔리는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소심한 사람이 인생의 길을 걸을 때 자기 상상의 죄 때문에 간헐적으로 고통을 겪게됩니다. 죄책감의 근원은 대부분 엄격하고 거칠은 부모들로 부터 옵니다.
죄책감은 인생의 초기에 생기지만 죄에 대한 감각은 흔히 아동기에 완전히 들어가거나 사춘기에 들어가 상당한 정신적 사회적 발달을 이룬 후에야 발달합니다. 죄책감은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며 우리 내부에 있는 부정적인 힘을 작동시킵니다. 죄책감은 어른의 수준에서 억제되지 않고 내버려 두면 통회와 회개와 화해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과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죄책감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도덕적 발달의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반면에 죄에 대한 감각이 점점 커지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심한 죄책감과 더불어 정서적, 사회적, 지적 발달의 결핍은 성숙한 도덕적 판단을 올바로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런 죄책감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울처럼 늘 마음에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거울을 지니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에 맛을 들이고 기도와 침묵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 결과로 허상의 죄책감으로 해방되어 우리 영혼에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 사랑이 발현되기 시작합니다.
남이 나를 모욕하더라도, 자기가 받은 모욕을 생각지 않고, 모욕한 사람의 불행을 아파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그 과실을 용서하여 주며, 남에게 용서 청할 것이 있으면 지체지 않고 청하며, 분노를 발하기 보다 자비를 발하게 됩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 의미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죄에 대해서는 경계하며 깨어 있으면서도 하느님 사랑을 가로막는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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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요일 성체의 날✝️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 형제의 노래(피조물의 노래)
1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좋으신 주님,
2찬미와 영광과 영예와 모든 찬양이 당신의 것이옵고(참조: 묵시 4,9.11),
3홀로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만 이것들이 속함이 마땅하오니,
4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나이다.
5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찬미받으시옵고
6그 가운데 각별히 주인이신 해님 형제와 더불어 찬미받으소서.
7해님은 낮이옵고, 그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비추시나이다.
8아름답고 장엄한 광채로 빛나는 해님은,
9지극히 높으신 당신의 모습을 지니나이다.
10내 주님, 달 자매와 별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3).
11당신께서는 빛 맑고 귀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나이다.
12내 주님, 바람 형제를 통하여 그리고 공기와 흐린 날씨와 갠 날씨와
13모든 날씨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4-65).
14저들로써 당신 피조물들을 기르시나이다(참조: 시편 103,13-14).
15내 주님, 쓰임새 많고 겸손하고 귀하고 순결한
16물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시편 148,4-5).
17내 주님, 불 형제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66).
18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참조: 시편 77,14).
19그는 아름답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힘차나이다.
20내 주님, 우리 어머니인 땅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참조: 다니 3,74).
21그는 우리를 기르고 보살피며
22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온갖 열매를 낳아 주나이다(참조: 시편 103, 13-14).
23내 주님, 당신 사랑 까닭에 용서하며(참조: 마태 6,12),
24병약함과 시련을 견디어 내는 이들을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5평화 안에서 이를 견디는 이들은 복되오니(참조: 마태 5,10),
26지극히 높으신 이여, 당신께 왕관을 받으리로소이다.
27내 주님, 우리 육신의 죽음 자매를 통하여 찬미받으시옵소서.
28살아 있는 어느 사람도 이를 벗어날 수 없나이다.
29불행하옵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는 이들이여!
30복되옵니다, 당신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실천하며 죽음을 맞이할 이들이여,
31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이다(참조: 묵시 2,11; 20,6).
32내 주님을 찬미하고 찬양들 하여라(참조: 다니 3,85).
33감사를 드리고, 한껏 겸손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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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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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평소 거리낌 없는 것도 죄짓는 거라면 /
박윤식 [big-llight] 240928 20:04 ㅣNo.176366
주님 계명은 자비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 그 근본 골격이다. 베풀고 나누는 행위이다. 실천하면 그 자비 강함을 쉽게 깨달아진다. ‘베푸는 사랑’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금방 체험할 게다. 그런데도 잘 하지 못한다. 의식을 바꾸고 싶지 않기에. 고정 관념 깨는 게 그리 싫기에.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직설적이고 타협이 없는 단호한 말씀을 남기셨다. 사랑이 없으면 삶은 삭막해지니까. 지식과 재물이 넘치더라도 삭막함을 피할 수 없으리라. 사랑을 담아야 인생은 따뜻해지기 시작할 터이니. 그렇게 살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게 믿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이르셨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중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아예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게 낫다. 또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도 잘라 버려라. 두 발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가는 편이 훨씬 더 낫다. 또 네 눈도 죄짓게 하거든 빼 던져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아예 잘라 버려라.” 예수님 말씀은 더 큰 죄악 저지르기 전에 그 원인을 먼저 없애라는 거다. 두 손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지금 모르긴 몰라도 훨씬 더 낫다는 거다. 사실 별 의식 없이 작은 죄를 무심코 계속 저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죄 짓는 게 반복되곤 한다. 그렇지만 설사 죄 지은 후 그 육신 잘라 버린다한들 과연 그 많은 죄 짓지 않고 과연 배기 낼까? 결코 아니다. 이러한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죄악을 피하고자 의식을 바꾸는 게 상책이다.
이처럼 생각을 원천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반복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아니 더 익숙해져 더 큰 죄 범할 수도. 사실 우리는 나약함 때문에 죄의 유혹을 그리 쉽게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결국은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 이 길만이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그나마 우리에게 자비의 강함을 주시는 그분 도움으로 죄지을 기회를 확 줄이리라.
그분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늘 무엇을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지만,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물 한 잔 주었나?” 우리는 심한 시련이나 억울한 일 겪을 때 눈물로 필요한 것 얻으려 기도는 한다. 그렇지만 정작 그분께 받은 은총에 깊이 감사드린 적은 있는지, 내가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그분 곁에서 바친 적은 있는지를 성찰해야 하겠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음 다잡으시고 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게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너무 직설적이고, 타협이 조금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의도는 분명하다. 손발처럼 중요해도 그 행위가 죄 된다면 감히 피하라는 거다. 무엇을 보고자 내 몸의 눈처럼 요긴해도 죄의 원인을 제공하면, 단념하라는 것일 게다. 그것이 평소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버릇된 습관이나 취미일 수 있기에. 이처럼 계명에 위배되면, ‘끊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쉽지 않을 게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깨달음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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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11장에서는 그러한 겸손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천막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모세의 영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영이 내리고 그들이 예언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영은 모세에게만 주어지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만 예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 자신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세에게는 예언자를 통해서, 되도록 많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요한과 예수님은, 민수기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태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자기 무리에 속한 이들만 그 일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지금 복음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하여도, 또는 수고는 내가 하였는데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여도 아무런 미련이 없어야 모세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고 참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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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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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는
불구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이
조금은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죄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불구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말씀은
불구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죄를 짓지 않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죄짓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위협이 아닌
안타까움으로 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꺼지지 않는 불로 보낼 것이라는
위협이 아니라
죄를 지어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을 잘 대해 준 사람도
상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통해 그것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위협으로 알아듣는 것과
안타까움으로 알아듣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은 두 상황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이
다릅니다.
위협하시는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안타까움을 느끼시는 하느님은
사랑의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
우리의 삶도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으로 생각할 때
매 순간 죄를 지을까
나의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을 아닐까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할 때
오히려 죄를 지을 기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더 기쁘고 더 행복한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죄를 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사랑에 집중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오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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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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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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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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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38-41)”
1) 여기서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는
“막았습니다.”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어떤 사람’의 구마 행위를 막은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3-16).”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죄입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사도들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시긴 했는데(마르 6,7), 열두 사도에게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가 아니었지만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또 코린토 1서의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사도들을 ‘첫째’ 자리에 두었고,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네 번째’ 자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이 사도들만의 권한은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고, 직무에 따른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하고, 아무나 마음대로 설치는 ‘월권행위’를 막아야 하는데, 지금 ‘어떤 사람’이 마귀를 쫓아낸 것을 월권행위로 보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옹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일을 승인하신 것과 같습니다.>
2)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 사도 입장에서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신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 그 당시에, 예수님은 알고 계시는데 사도들은 모르고 있었던 제자들(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예수님께 어린 나귀를 빌려 드린 사람과 최후의 만찬 장소를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 등이 그런 제자들입니다(마르 11,1-6; 마르 14,12-16).
신자 수가 적었던 당시에도 사도들이 모든 신자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오늘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반대로,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신자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세례 증명서’만 있으면 되나?
사실 그런 서류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으니,
그것이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 또 신앙인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가 신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2) 공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떤 사람’의 일을 인정하신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을 생각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이단’은 경계해야 하고, 물리쳐야 하지만, 다른 종교 사람들과 다른 종파 사람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두,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3)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구원 사업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할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라도,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기를 스스로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개방성’과 ‘보편성’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톨릭교회’ 라는 이름은 ‘보편적인 교회’ 라는 뜻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신자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배타적인 집단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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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천년여동안 이어져 온 가톨릭 교회의 역사 안에서 주님의 뜻을 더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게네스가 사제로서의 삶을 충실히 사는데에 성욕이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실행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주님과 더 철저하게 일치되기 위해 그런 열의를 보였으니 잘했다고 칭찬받았을까요?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마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욕망을 절제하고 덕을 실천하여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만드신 신체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일이었기에 교회 내부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가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가 참으로 난감해지실 겁니다. 오늘은 그 말씀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나왔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민수기와 복음에서는 흐름이 비슷한 두 가지 사건이 서로 비교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민수기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백성을 이끄는 모세의 부담과 짐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시고자 그에게 주셨던 성령을 조금 덜어 백성의 원로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자 원로들은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예언’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모세의 지시에 따라 천막으로 나오지 않은 두 명의 원로에게도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수아의 생각으로는,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들을 따르는 일부 백성들이 모세의 권위에 순명하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히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원로가 사람들 앞에서 예언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모세에게 간언하지요. 그러나 모세는 그런 여호수아를 제지합니다.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모세의 입장을 생각하여 그런 주장을 한 것이지만, 모세의 눈에는 그것이 자기 ‘편’에 속하지 않은 이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시기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 권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 말씀을 알아들음으로써 그분께 속한 참된 백성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도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즉 그분의 권능에 힘 입어 마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요한이 목격하고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려고 한 겁니다. 그러다 자기 뜻대로 안되자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며 은근히 그를 막아야 한다는 뜻을 드러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막지 마라고 하십니다. ‘우리 편’에 속하지 않은 그가, 자기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섬기지도 않는 그가 자기들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시기했던 요한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세력을 넓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 뜻을 따름으로써, 온 세상을 당신 품에 받아들이시어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니 편 내 편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다니는 이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 입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비해, 예수님은 공공연하게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큰 견해 차가 생기는 것은 “우리”라는 울타리가 아우르는 범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우리’는 아주 작은 범위입니다. 나와 가까운, 나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소수만을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그 밖에 있는 이들은 배척하는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습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우리’는 그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범위만 넓은 게 아니라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경계’조차 희미하기에 누구라도 ‘우리’의 범주 안에 포함시킬 수 있고 또 포함시키길 원하는 열린 모습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포괄하는 범위의 차이는 ‘죄’와도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하여 모두를 그 안에 품으시기에, 온 세상 모든 이를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기에, 그들을 참된 사랑으로 대하시고 당연히 그들에게 죄를 지으실 일도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범위를 나와 가까운 가족, 나와 뜻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로 한정하는 인간은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 상처와 피해를 입히면서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 안에 속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속하지 않은 이는 곧 ‘적’이기에 나와 같은 편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짓들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비난하는 불의한 부자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당신을 믿는 작고 약한 이들, 하느님께서 당신 손에 맡겨주신 보잘 것 없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구원받을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시지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말씀에는 그런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탐욕에 눈이 멀어 자기 몫보다 훨씬 더 많이 챙기려고 들면, 그로 인해 빈곤해진 형제들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대가로 엄한 벌을 내리시겠다는 경고의 메시지만 담겨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이 스스로의 부족함 때문에 죄를 지어 ‘하느님 백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과 복을 받아 풍족함을 누리는 이들이 기꺼이 자기 것을 베풀고 나눔으로써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켜주라는 권고의 메시지도 담겨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 너를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인들은 그분 나라에 필요 없으니 죄를 지을 거 같으면 차라리 신체 일부를 잘라 버리라는 식의 냉혹한 경고 메시지만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나눔과 자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작고 약한 이웃이 하느님 백성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처럼, 나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 역시 주님께서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래서 꼭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짜로 손이나 발을 잘라 버리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악한 세력들이 하느님 뜻을 거슬러서라도 욕망을 채우라고 유혹할 때, 그 유혹에 나도 모르게 넘어가는 나약하고 안일한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는 생각보다 안일한 마음으로 죄악과 타협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한 번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 그런 마음이 우리를 죄의 상태에 쉽게 빠지게 만들고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상태에 익숙해져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 버릴 정도로 단호한 각오와 결심으로 죄악을 멀리하는 한편,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의 실천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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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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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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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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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연중 제26주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을 갖는 삶
<2024.9.29>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15:1~22절)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을 갖는 삶❞
❚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1~7절).
유다의 왕 아사랴는 십육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렸습니다(1~2절). 십육 세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그가 어린 나이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아버지 아마샤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한 왕들과 마찬가지로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아쉬운 평가도 받습니다(3~4절). 아사랴는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했습니다. 아사랴가 병을 얻게 된 이유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나라가 강성해짐에 따라 교만해져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서 분향하는 일을 본인이 직접 하다가 하나님이 치셔서 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대하 26:16~21). 그리하여 그의 아들인 요담이 대신하여 왕궁을 다스렸습니다. 아사랴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 되어,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성공의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 그 성공에 도취 되어 있으면 그 성공을 이루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교만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하는 선을 넘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에 빠져 들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만의 죄가 마음에 쌓일 때 위기가 찾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위기란 하나님이 금하신 절대적인 영역을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형통할 때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도록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형통과 성공을 좇기보다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8~16절).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예후 왕조의 네 번째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선조들처럼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야베스의 아들 살룸의 반역으로 인하여 육 개월 만에 죽임을 당하고, 살룸이 왕이 됩니다. 이로써 예후 왕조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그의 자손 4대가 왕위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8~12절). 이스라엘 왕 스가랴를 살해한 살룸은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므나헴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왕가에 반역이 계속 일어나면서 국가적 안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13~15절). 무엇보다 살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어떤 평가도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삶이 탐욕스럽고 잔인해서 어떠한 평가도 내릴 가치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므나헴 또한 이스라엘의 옛 수도였던 ‘디르사’에서부터 진격하여 와서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딥사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주지 않자 그는 그 곳을 치고 임신한 여자들의 배를 갈라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16절).
하나님은 권력욕에 빠져 불의한 방법을 일삼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의 악한 행동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반드시 벌하십니다. 반대로 우리가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위해 성실하게 일할 때,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며 그것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작은 일을 하면서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쓸 때,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우리의 수고에 대하여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를 하고 있지 않나 우리 스스로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헛된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죄악을 제거해야 합니다(17~22절).
므나헴은 살룸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십 년간 다스렸습니다. 그에 평가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한 악한 왕이었습니다(17~18절). 앗수르 왕 불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왔을 때,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그는 그 조공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자들에게서 은을 강탈하였는데,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부과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종신국가가 됨으로써 므나헴은 얼마간 이스라엘의 자치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정책은 결국 이스라엘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므나헴이 죽고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가 계속 유지될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삶에 쌓이면서 죄의 양상도 다양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초기에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삶에 고착되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이 우리 삶에 습관화되지는 않았는지, 또한 영적 감각이 둔화되거나 소멸 직전에 우리 자신이 빠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인생이 비참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복해 주셔서 깊은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모든 죄악을 제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꺠달아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세상의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왕하 15:1~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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