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연합군, 유엔군을 격파하다!
[리뷰] 화제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김규종(satira) 기자
몇 달 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밀려난 한국영화들이 요즘 힘차게 돌아오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 열이틀 만에 300만 관객을 동원했고, 신예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은 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여기에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가 가세하여 세 영화의 예매율이 70퍼센트 전후에 이르고 있다.
영화들의 소재도 다양하다. ‘복수 삼부작’의 완결편으로 불리는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의 종착점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묻는다. 한국전쟁 55주년과 연결되는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과 인간의 본원적인 의미를 성찰하도록 인도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언어유희에 기초한 웃음이 미스터리 수사극과 결합하여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는 영화다.
이 가운데 영화 <웰 컴 투 동막골>은 특히 주목을 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동족상잔으로 기억되는 6·25 한국전쟁이 여전히 내면화-객관화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돌이킬 때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논문보다 다수의 관객에게 큰 영향력과 반성지점을 제공할 수 있는 탓이다.
실패한 군인들: 리수화 상좌와 표현철 소위
군대가 유지되려면 상명하복이 필수적인 요소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절대복종은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그런데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등장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에 적절한 인물들이 아닌 것이다. 위기순간에 주어진 상황이나 상부명령을 따르지 않는 지휘관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인민군의 남침으로 극도로 불안해진 이승만은 사흘 만에 대전으로 도주하고, 한강인도교 폭파를 명령한다. 수많은 민중이 다리를 건너 남으로 피난길을 재촉하던 그 시각. 이승만은 국군이 승리하여 북진하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한강다리를 잘라버리라고 한다. 표현철은 그 천인공노할 명령을 수행하고 괴로워한 나머지 탈영한 소위였다.
이른바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수세에 몰린 인민군은 퇴각을 거듭한다. 신속한 후퇴를 위하여 부상병을 즉결처분하자는 정치군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애걸하는 부하장병들. 리수화 상좌는 부상병들과 끝까지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어떤 경우라도 인명을 소중히 하는 선임장교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사지 멀쩡한 다른 병사들 생각은 어떠했을까.
리수화와 표현철은 전쟁 와중에서 끝까지 인간적인 덕성인 인도주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과 죽음을 불러온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려운 결단을 실행에 옮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실패한 남북한 군인들이 어떻게 갈등하고 화해하며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지 보여주며, 미 공군 스미스 대위까지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동막골의 의미: 남과 북, 외세까지 공존하는 가상공간
동막골은 실재한 공간일까. B-52 전폭기가 한반도를 융단 폭격하였던 6·25 전란에서 전쟁과 무관하게 존재한 공간은 없었다. 반면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소련 작가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시베리아 오지에서 10월 사회주의 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레닌과 스탈린을 알지 못하는 사냥꾼과 대면한다. 소련영토는 지구 육지의 6분의 1을 차지하였으므로.
전쟁을 모르고, 총과 수류탄을 알지 못하는 동막골 사람들. 그들은 남과 북, 외세까지도 별 차이 없이 수용한다. 어디서 왔든지 그들은 모두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롭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고 그것에 기초하여 마을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일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이제는 우리에게 완전히 망각된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다.
극한의 전쟁을 겪는 남북한 군인들과 추락한 미군 비행사까지 전쟁과 담쌓게 만드는 선량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인정은 치열한 이념투쟁과 피 비린내 나는 살육과는 너무도 먼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마을 농사를 축내고 인명을 해치려는 멧돼지 사냥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군인들 전부는 하나로 뭉쳐 멧돼지를 처치하는 것이다.
매우 무리하지만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멧돼지 구이장면. 인민군과 국방군, 그리고 미군이 한데 모여 살점을 뜯는 장면은 동막골의 큰 선물이자 축복이다. 재미난 점은 스미스 대위도 본대귀환을 미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상에서 완쾌한 그는 동막골에 눌러앉아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비규환 전장과 동떨어진 낙원 동막골에서.
남북연합군, 유엔군과 맞장뜨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는 6·25를 바라보는 건강한 시각이 여럿 존재한다. 영화는 민간인 학살부문에 대한 내용을 이미 서두에 자막으로 처리한다. 초보적인 이념투쟁인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는 문제가 인민군과 국방군 사이에 진행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화는 전쟁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스미스를 구하려 공중 투하된 국방군 병사가 마을에서 행사하는 잔인한 폭력에 다시 남북한 군인들과 스미스가 합세하여 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동막골과 마을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하며, 이제 너무도 미약한 힘을 가지고 가공할 미 공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맞서려고 한다. 자명한 패배를 감수하며 전장으로 나아가는 남북한 군인들.
실패한 역사의 나라 대한민국에 깊이 새겨져있는 외세에 항거하여 평화와 화목의 공동체 동막골을 수호하려는 남북한 연합군.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는 우리 내부에 오래 전부터 자리하였던 민족자주의 대의를 불 싸지르는 강력한 무엇이 있다. 왜 남과 북은 그토록 질기고도 잔인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는가. 왜 남과 북은 둘 다 외세를 업어야 했는가.
동막골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우리는 말 못할 마음으로 그런 공간을 꿈꾸어오지는 않았는가, 영화는 묻고 있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서로 손잡고 솔직하게 마음 터놓고 외세와 당당하게 맞장뜨는 모습을 꿈꾸지는 않았는지, 시나리오 작가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일회적인 승리와 추억을 위함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작고 미약한 시작으로 창대한 새로운 물꼬를 트려는 거대한 계획의 첫걸음이 아닐 수 없다.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하여
해방 60주년과 미국이 그은 38선으로 인한 분단 60주년에 다시 한번 우리의 통절한 현대사 한 장면을 강렬하게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웰컴 투 동막골>이다. 영화는 외세로 인한 식민지 전락과 외세로 인한 해방과 외세로 인한 분단과 또 다시 외세가 개입한 전쟁 6·25가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렇게 살아온 우리는 누구였으며, 또 누구인가.
영화는 주제를 결코 무겁게 다루지 않으며, 비장미나 숭고함 없이 가볍고 경쾌하게 앞으로 달려 나간다. 어쩌면 그것이 관객몰이에 성공하는 이유 같기도 하다. 너무 진지하고 장렬하게 전쟁을 그려내고, 너무도 비참하고 우울하게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영화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내가 본 어떤 영화에서도 한국전쟁의 실체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형제애와 인도주의, 남녀간의 있을 법한 사랑과 피부색을 뛰어넘는 육친의 정리까지 담고 있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영화는 호들갑스럽지 않으면서, 스타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거대한 전쟁장면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신나게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묻는다. 외세는 무엇이며, 우리는 언제까지 갈라져 살면서 서로 외면할 것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