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카펫 위의 여자
가을이 여자를 위해 노란 카펫을 깔아 놓았다. 누가 초대한 것도 아닌데 여자는 그 길에 들어섰다. 발밑에서 은행잎이 사각거렸다. 한때는 나뭇가지 끝에서 햇살을 흔들던 잎들이 이제는 땅에 내려앉아 누군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쓸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생애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마지막 옷을 벗어 놓은 듯했다.
여자는 긴 드레스 자락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연한 황금빛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젊은 날에는 이런 옷을 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려한 옷은 특별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 여겼다. 생활은 언제나 멋보다 앞섰고, 거울 앞에 서는 시간보다 누군가를 위해 서둘러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름다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은 틀렸다. 꽃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듯 사람에게도 저마다 빛나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봄에 피지 못한 꽃이 가을에 핀다고 누가 탓할 것인가.
은행나무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가을을 맞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똑같은 가을을 보여 주지 않는다. 햇살의 기울기에 따라 노란빛이 달라지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낙엽이 눕는 자리도 달라진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같은 길을 걸어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여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드레스 자락에 은행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손으로 털어 내지 않았다. 가을이 건네는 작은 훈장 같았다.
살아오면서 가슴에 달아 보고 싶었던 훈장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는 얼마나 다정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남의 기쁨을 위해 꽃을 준비하면서도 자신에게 꽃 한 송이 건네는 일에는 인색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고 싶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웃어 보려 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래 미루어 두었던 나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노란 길 위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여자는 그 풍경 속에서 조금 천천히 걸었다. 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젊은 날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길 위에 머무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문득 은행잎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르던 시절을 지나 노랗게 물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견뎠을까. 잎맥마다 지나온 계절이 스며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 새겨지는 주름도 다르지 않다. 웃음이 지나간 자리, 눈물이 머물다 간 자리, 오래 참아 낸 세월의 흔적이다. 그것을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여자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직 따뜻했다. 아직 설레고, 아직 사랑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것 앞에서 마음이 뛴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청춘은 나이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향해 설레는 마음속에도 산다. 바람이 불었다. 은행잎 몇 장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떨어지는 줄 알았던 잎들이 잠시 하늘을 향해 날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겼던 순간에도 저렇게 한 번쯤 날아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누구나 가을을 아름답게 맞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고 어떤 이는 다가올 겨울을 걱정한다. 그러나 여자는 지금 이 계절이 좋다. 젊음이 지나간 자리에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노란 카펫은 끝없이 이어졌다. 여자는 다시 걸었다. 드레스 자락이 낙엽을 스치고 햇살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걸음도, 박수를 받기 위한 무대도 아니었다. 그저 오늘의 자신이 좋아서 걷는 길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무대는 멀리 있지 않았다. 수많은 날을 견디고도 다시 웃을 수 있는 지금, 바로 이 자리가 무대였다. 여자는 알았다. 은행잎이 가장 눈부신 순간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만이 아니라는 것을. 땅에 내려와 누군가의 길을 환하게 밝혀 주는 순간에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도 이제 그런 계절에 들어선 것인지 모른다. 노란 카펫 위의 여자. 그녀는 지나간 청춘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의 자신을 꼭 안아 주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여자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가을에도, 아니 가을이어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