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인 나병(癩病)으로 고생하시다가 생을 마친 세조의 삶을 조명합니다.
세조(世祖,1417~1468)는 조선의 제 7대 임금(재위기간 1455~1468)으로서 역사적으로 공과(功過)가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왕입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최초의 왕이며, 반정(反正)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한 첫 임금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제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둘째 왕자로 태어났고, 제 6대 임금인 단종의 숙부였으며 즉위 전의 호칭은 수양(首陽)대군이었습니다.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일으켜 자신의 동생이자 세종의 셋째 왕자였던 안평대군, 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여 나이 어린 왕의 뒤에서 섭정(攝政)을 실시합니다.
당시 단종의 나이가 12살이었으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였는데 수양대군은 자신의 권력욕을 뒤로 감추고 왕실의 안정을 꾀한다는 명분으로 왕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입니다.
이에 반발한 신하들을 무차별적으로 살륙함으로써 일단 왕실은 안정된 것처럼 보였으나 1455년(단종 3년), 단종이 스스로 숙부(叔父)인 수양대군에게 양위(讓位)하는 형식으로 왕권을 넘기지만 실제로는 수양대군이 왕권을 무력으로 찬탈한 것이었습니다.
단종의 복위 운동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세조는 사육신으로 일컫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가족들까지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살륙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로 인해 세조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은 이루었지만 자신의 양심까지는 안정시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집권 후에 나라는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았지만 세조 자신은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이 되고나서 궁중의 지나친 육식과 탄수화물 위주의 고칼로리 음식에다 운동 부족은 임금의 육체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했고,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조카인 단종을 비롯, 많은 충신들을 죽인 그 원죄가 마음에 병으로 남음으로써 세조는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됨과 함께 가족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됩니다.
세조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왕위 계승 서열 1위이자 원자(元子)였던 의경세자(덕종)가 갑자기 죽었고, 그 후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는데 세조 7년에는 세자빈이 손주를 낳고 5일 만에 사망합니다.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2년 후인 세조 9년에는 해양대군의 아들인 손자까지 절명합니다.
세조는 잇단 가족들의 죽음으로 심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고 자신의 질병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불교에 귀의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공신인 정도전의 영향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펼쳐왔는데 세조는 자신이 지은 죄과가 자신의 건강과 가족들의 안위까지 좌우한다고 여겨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조는 40대 후반부터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상태가 악화되었고, 명의를 찾거나, 온천, 사찰 등으로 치유를 하러 전국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강원도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상원사에 들러 한동안 머물렀던 이야기가 설화(說話)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세조는 한센병으로 알려진 나병(癩病)으로 고생하시다가 승하하셨다고 전해집니다.
피부병이나 관절질환, 나병 등은 풍습(風濕)이 원인으로 생기는 병입니다.
세조가 상원사에 머물면서 하루는 절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동승(童僧:나이가 어린 승려)을 발견하고 그 동승에게 자신의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합니다.
동승의 도움으로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왕의 옥체를 씻어주고, 왕의 몸에 종기(腫氣)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했더니 동승이 오히려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하지마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석가모니여래의 왼쪽에 있는 보살
*보살(菩薩):부처와 버금가는 성인(聖人)
세조가 놀라서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동승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후에 세조를 괴롭히던 피부병은 말끔히 나았다고 합니다.
문수보살의 은덕으로 불치병을 낫게된 세조는 감동하였고, 이를 전해들은 세조의 딸 의숙공주 부부가 1466년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화공(畫工)을 불러 동승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나무로 조각상을 만들어 상원사에 비치케 하니 그것이 현존하는 국보 제 221호인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입니다.
어느 시대건 왕들은 대다수가 등창이나 피부병 등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데다 과중한 업무 등으로 스트레스도 심했을 터인데 여기에 지나친 육식과 고칼로리 음식 등이 고콜레스테롤증을 유발함으로써 혈액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풍운아였던 세조는 결국 51세에 나병(癩病)으로 운명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서 황금손은 서글픔을 느낍니다.
세조의 지은 죄는 밉지만 그래도 조선 건국초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잡고 나라의 기틀을 굳건하게 세운 임금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건강하게 집무를 더 수행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만약 그 당시 황금손이 개발한 해죽순과 "해죽순나물"을 세조께서 잡수시고, 해죽순밥을 드셨더라면 그 정도의 병은 충분히 고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저녁 무렵에 황금손을 찾아오신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온 몸이 붓고 통증이 심한 증상을 갖고 계셨습니다.
황금손이 뭐 특별한 처방이 있겠습니까?
"해죽순나물"을 드렸었는데 사흘 뒤에 깔끔하게 좋아지셨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셨습니다.
"해죽순나물"을 드시고 끊겼던 생리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여성의 사연도 감동스럽고, 온 몸의 피부병으로 크게 고생하시던 50대 후반의 남성께서도 자신의 전, 후 상태를 사진으로 촬영해서 보내주시면서 고맙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현대인들의 질병은 대개가 고콜레스테롤로 인한 혈액순환 장애가 원인인 경우입니다.
폴리페놀은 콜레스테롤을 매우 빠르게 없애는 물질입니다.
"해죽순나물"은 밥을 짓거나 국, 찌개, 라면 등을 조리할 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맛이 뛰어나고 보관성이 좋아지며, 효능은 감탄사를 자아내게 합니다.
이번에는 "해죽순나물"을 첨가시켜 만든 밥인데 차세대 식품으로 평가받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해죽순밥"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전국적으로 체인망 구축작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해죽순라면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이름하여 시장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버릴 바로 그 라면 입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해죽순밥"은 맛이 뛰어나고 보관성이 일반밥에 비해 5배 정도 좋아지는 반면, 자동화된 기계로 밥을 짓고, 비비고, 밥을 만듦으로써 맛이 균일하며 외식업의 장애요소들이었던 인건비와 점포임대료, 재료비 등을 절반 이하로 절감시킴으로써 감히 외식산업의 혁명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콜레스테롤이 인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특강을 실시하면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해죽순밥" 사업설명회 및 시식회도 겸해서 진행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폴리페놀이 듬뿍 함유된 맛있는 차세대 음식인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해죽순밥"을 곧 선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낮에 황금손을 찾아오신 손님께서 주신 명함에 "건강은 차용, 양도, 상속, 임대가 되지 않습니다" 라는 글귀가 긴 여운을 남기는 새벽입니다.
나라가 외세의 침략이나 내분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망한 나라는 역사에서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귀한 사례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출산의 기피로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듦으로써 나라가 머지않아 문을 닫게될 운명에 처한 대한민국 이야깁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음에도 응당 책임을 져야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는 소인배집단으로 전락했고, 기업들은 앞다투어 대한민국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세계 4대 강국으로 손꼽혔던 아르헨티나가 한 번 추락한 후에 그들은 지금까지도 3류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선진국으로 꼽히던 그리스나 폴란드가 처한 현실, 그리고 역시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