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건널 것을 금지하는 붉은 색 신호등 너머 였다. 처음 보는 이와 약속장소의 눈앞에 두고 있으니 나 쪽을 향해 한번 두리번거릴 만도 하건만 그녀의 시선을 한번도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호등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쓸쓸하게 나있는 길 건너 어딘가를 향해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 내가 길을 건너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작은 미소와 함께 그녀는 우리가 데리고 들어가는 카페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95년 7월 단편집 '여수의 사랑'(문학과 지성사)을 발표하고 우리 문단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에는 첫장편 '검은 사슴'(문학동네)을 발표해 칭찬에 인색한 문단에서 상상 이상의 극찬을 받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남진우는 이 작품이 다음 세기 우리 문학의 밝은 내일을 확신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문학평론가 양진오는 한국 소설문학의 갱신을 실현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물론 그 정도의 의미부여가 무리라는 이도 있었지만 첫 장편소설에서 이 정도의 찬사를 받은 예는 우리 문학에서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강을 만나봤다.
-요즘에 어떻게 지내시나요.
"얼마 전에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창작 프로그램(IWP)에 참석하고 돌아온 지 1달도 안됐습니다. 3개월 동안 진행된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한달여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창작프로그램은 김승희, 최승자, 문정희씨등 우리 문단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나녀왔는데, 이제 한강씨도 대내외적으로 그 만큼 평가를 받는다는 증거군요.
"어떻든 저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 스스로 문학에 대학 사고를 가다듬고, 한국문학의 위상을 차분하게 볼 수 있는 기회였지요."
-밖에서 본 한국문학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최승자씨를 보니 그 프로그램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던데, 한강씨는 어떤 분들과 친했습니까.
"우선 한국문학은 번역이 거의 안 되어 있어 외국인들이 한국문학을 인식할 기회가 봉쇄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이오와 프로그램중에 팔레스타인, 터어키, 베트남, 랭구운 등에서 온 작가들이랑 친했습니다. 작가들간의 친분도 국가의 위상과 특징에 따라 결정된 듯한 느낌이 있더군요."
-전 개인적으로 작가의 소설을 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그 침울하면서도 절망적인 색조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이나 요즘 본 영화가 있다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봤지만 특별히 열광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돼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름다운 시절'을 보고 싶은데 아직 하고 있는데가 있는지 모르겠다." (커피를 시키는 우리 앞에서 그녀는 코코아를 시켰다. 인터뷰어와 가끔 눈이 마주치지만 그녀는 자신의 빛깔 같은 코코아를 가끔 들여다보며 마시곤 한다.)
- 문학동네 겨울호에 발표한 시 세편들을 읽어보면 여전히 어둡고 적막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시어는 온통 캄캄한 불빛의 집으로 몰입되고 있더군요. 독자들은 작가의 글을 읽으며 침울함에 빠지게 될텐데. 계속 이런 색조의 작품을 쓰실 생각이신지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시중에 두 시는 3~4년 전에 쓴 시들입니다. 그리고 어둠과 빛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 어두움 너머에 있는 밝음에도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느낌은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여수의 사랑'에서는 정선과 지흔이, '검은 사슴'에서는 어릴적 제주바다에서 언니가 실종된 것을 본 인영, 집을 나가버린 누이를 둔 명윤, 탄광촌을 찍는 것에 몰입하는 것을 보다못해 집을 나간 장 등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상처받아 자신을 쪼그라뜨리는 검은 사슴같습니다.?
"어두운 이야기가 항상 어둡기만 한 것을 아니고, 밝은 이야기라고 항상 밝은 것만은 아니겠지요. 삶의 내면에 들어가면 밝은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껍질을 벗기면 두 측면이 모두 나타나지요. 그 두 측면을 예민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검은 사슴'에서 마지막에 명륜이 열차사고에서 살아나 활기를 찾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어도 되나요.
"검은 사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헤매다가 죽음에 이르는 깊이의 절망들의 경험을 겪고, 욕망이나 회한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볼 수 있는 환한 지점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강씨의 소설은 우리 독서소비를 주동하는 20대 여성독자들에게 읽히기 쉽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검은 사슴'이 그 두께의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이미 3판을 찍었고, '여수의 사랑'도 7판을 넘어갔다. 독자들의 반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기대보다는 많이 팔렸습니다. 독자들의 전화도 있었지요. 사실 작가로서 그 책에 그 많은 시간과 책값을 투자해서 읽어준 것에 감사한다.
-'검은 사슴'은 첫 장편이었는데, 단편을 쓰다가 장편을 쓰니까 나타나는 장점과 단점은. 또한 문체가 느슨해 졌다는 평도 있습니다. 작가의 생각은.
"3년 정도가 이 소설을 쓰는데 쓰여졌습니다. 중심 집필은 2년 정도 걸렸습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보완하며 진행했습니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틀이 크니 운신의 폭이 넓어서 좋습니다. 문체는 특히 신경을 쓴다. 항상 조심해서 쓰려고 노력한다."
-한강씨를 만나면 가족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한승원선생과 오빠 한동림씨도 작가인데, 가족의 영향관계나 특징을 소개해주세요.
"어려서부터 책도 많고 아버지가 글을 써서 문학적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가난한 소설가 집안의 딸로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요."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사람이 서서히 나무로 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마르께스나 보르헤스류의 환상적 리얼리즘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 페미니즘적 느낌을 읽어내는 평자들도 있습니다.
"소설 작법을 한정하지 않습니다. 95년부터 식물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소설을 썼습니다. 다시 '속편'을 써 볼까도 생각하죠. 그 소설에서 페미니즘을 읽어내는 이들도 있는데 난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구로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의 페미니즘은 당연히 피해가지 않습니다.
-만나서 근황을 물었을 때 결혼을 함께 사는 것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썼다. 이미 결혼하신지도 오래됐는데 결혼에 대한 한강씨의 생각은.
"한국사회는 어차피 남성중심의 사횝니다. 그 속에서 결혼이란 그 틀을 벗어나기는 어렵죠. 여성도 그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남성 역시 마찬가지죠. 문제는 자신들이 이런 문제에 부딪혀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의 문젭니다. 작가는 그것을 삶의 일부로 수용해야지 너무 작위적으로 해석하면 안되죠. 자기 취향이 이래서 이렇게 쓴다가 아니라 여러 면을 보여지도록 써야하는 거죠."
-학번으로는 89학번이죠. 대학시절 시대와의 사이는 어땠는지.
"어두운 시절이었죠. 처음에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낍니다. 1학년때는 시위에 참여해 보기도 많이 했지만 전반적으로 학생운동 후기에 있었습니다. 난 그 속에서 어느쪽도 맞지 않았죠."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기 직전입니다. 그런 의미를 떠나 문학의 지평들도 많이 바뀌어야하고 문단 일부에서는 그런 흐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거창하지만 한강씨의 앞으로 사상적 행보를 말씀해 주신다면.
"아버지가 불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난 불교와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제선원에서 외국스님들을 만나고 절에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불교가 좋게 느껴졌습니다. 마음의 정처가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이 있으면 소개해주시고, 앞으로의 집필계획도 말씀해 주십시오.
"최근에 황순원선생의 단편집을 읽고 있습니다. '소나기'나 '독 짓는 늙은이'도 익숙한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새로운 맛이 나죠, 그 영향인지 당분간은 장편보다는 단편에 머물고 싶습니다. 단편도 예전에 길게 쓰려했는데, 이제는 짧고 단단한 맛이 느껴지는 단편을 쓰고 싶습니다."
-에필로그
그녀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아니 흔히 통상적으로 말하는 '말발'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씨줄과 날줄들로 만들어지는 소설의 거미집은 촘촘한 조형의 빼어난 집이다. 만져보기만 해도 부담감이 느껴지는 첫 장편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이 유지할 수 있는 균형을 잡고 있다. 조금만 비켜가면 나락으로 추락시키려는 독자앞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그 외줄을 타고 그녀 인생에서 첫 강을 건넜다. 첫번째 강을 잘 건넜다고 해서 다음 강을 잘 건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의 난관에서 어정쩡하게 건넌 사람에게는 쉬운 도전이 주어지만 민첩하고 명징하게 건넌 이들에게는 좀 더 어려운 관문이 주어진다. 한강에게는 크고 어려운 관문들이 주어질 것이다. 작가 한강이 아버지의 강을 넘고, 더 넓은 대양을 건너 위대한 작가로 태어나기를.
작가 한강 연보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할동을 시작했다.
1995년 7월 소설집 '여수의 사랑'(문학과 지성사)
1998년 8월 장편소설 '검은 사슴'
- 참고: 중간에 위치한 사진 둘은 철민이가 찍은 사진이지만 앞 뒤의 두 사진은 철민이 사진이 아닙니다. 자료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어 철민이가 찍은 사진들의 대부분은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