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은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주말마다 어린 첫딸을 품에 안고
대공원의 우거진 숲을 자주 찾았다. 어린이집에 들어갈 무렵에는 보라매공원 근처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도 주말만 되면 공원은 물론 관악산까지 데려가 함께 등산을 했다. 아빠는 산을 잘 못 타는 딸
을 위해 허리에 줄넘기 줄을 묶어 끌어주곤 했다. 어릴 때부터 식물세밀화가로서 맞춤교육을 시켜준
셈이다. 저자는 아직도 보라매공원의 튤립정원과 관악산의 아카시아 향기에 얽힌 추억을 잊지 못한
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부터 식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평생 식물을 연구하겠
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 아이들도 나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있을까?
여기서부터 장장 30페이지는 왜국의 수목원과 식물원 얘기가 이어진다. 왜국은 과학 분야에만 해도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에 달하는 과학 선진국이다. 조선에서 안동김씨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서구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생물학에서도 큰 진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의도는 불순했지만 창경궁을 헐어서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든 것도 그러한 학문적‧기술적 진
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왜국의 발전된 수목원 얘기를 소개할 생각은 1도 없다.

무궁화 얘기는 저자가 왜국의 한 공원에서 잘 가꿔진 무궁화동산을 보며 느낀 소회에서부터 시작된
다. 안내판에는 무궁화의 자생지와 역사, 세계 각국의 무궁화 이용과 관련된 정보가 자세하게 소개되
어 있다. 저자는 왜정시대 때 그들이 우리나라에 있는 무궁화를 철저하게 베어낸 얘기도 곁들여놓았
다.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경복궁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를 지은 족속들이니 어련했을까. 우리나라
의 제1세대 농학자인 유달영 박사는 해방이 되자마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무궁화를 발굴하
여 오랫동안 공을 들여 품종을 개량한 뒤 전국에 보급했다. 무궁화가 민족의 꽃으로 명맥을 되찾은
데는 유달영 박사의 공이 컸다.
무궁화는 7월부터 10월 사이에 약 100일 동안 지속적으로 피어난다. 한 무리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
에 지고 나면, 다음날 아침에는 여지없이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눈썰미 있는 조
선 선비가 무궁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꽃은 꽃잎이 5장으로 된 홑꽃과, 꽃잎이 홑꽃보다 약간 작은 여
러 형태의 겹꽃이 있다. 꽃 안쪽에는 보라색이나 적색의 둥근 원형 무늬가 있는데, 이를 단심(丹心)이
라고 한다. 꽃의 빛깔은 흰색‧분홍색‧연분홍색‧보라색‧자주색‧청색 등 다양한 편이다. 열매는 다섯 개
의 씨방으로 구성된 타원형인데, 다 익으면 저절로 터지면서 안에 들어 있는 씨가 멀리까지 퍼져나간
다. 예로부터 꽃은 차와 식재료로, 껍질과 뿌리는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제로 쓰여 왔으며, 최근에는
껍질이 고급제지 원료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무궁화의 원산지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상굿도
자생하는 군락지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다. 중국에는 언젠가 우리 카페에도
소개했던 『산해경』이라는 책이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 편찬된 동양의 신화‧역사‧지리 관련 백과사
전이다. 『산해경』 제9권 「해외동경」 편에는 무궁화 얘기도 나오는데, ‘북방에 있는 군자의 나라
에 훈화초(무궁화)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펴서 저녁에 시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방에 있
는 군자의 나라’는 고조선을 가리키는 말로, 시리아가 원산지인 무궁화가 비단길을 통해 고조선을 거
쳐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보면 신라가 스스로를 근화지향(槿花之鄕)이라고 쓴 기록이 있
다. 근화지향은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 사서인 『구당서』 「신라전」에도 신라를 근화향
(槿花鄕)이라고 지칭한 기록이 있다. 897년 당나라 광종이 신라 효공왕에게 보낸 국서를 그대로 옮겨
수록해놓은 것이다. 최치원이 지은 본인의 문집에는 신라 최초의 화랑인 국자랑이 머리에 무궁화를
꽂고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예종도 고려를 근화향이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장원급제자의 화
관에 무궁화를 꽂아주었다. 혼례 때 입는 활옷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뜻에서 무궁화 수를 놓기도
했다. 훈화초, 근화, 목근, 순(舜) 등으로 불리다가 무궁화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 준공식 때였다.
이후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 이 구절을 삽입하여 국화로서 무궁화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우리나라
에서는 가장 좋은 것에도 무궁화훈장‧무궁화호열차‧무궁화위성 등 무궁화라는 명칭을 붙였다. 정부
와 국회의 문장(紋章), 정부공문서 문양, 화폐, 각종 공공 장식물 등에도 무궁화가 사용되고 있다. 그
러나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꽃으로 불려왔고 지금도 국민적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무
궁화가 상굿도 법령에 의해 공식 국화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매년 8월 8일은 ‘무궁화의 날’이다. 무궁화의 날 지정은 2006년 <나라사랑 어린이 기자단>이 ‘왜 무궁
화의 날은 없나요?’ 하는 화두를 던지면서 비로소 논의가 시작되었다. 여러 사회단체에서 정부에 무
궁화의 날 지정을 건의했지만, 무능하고 안일한 관료들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할 수는 없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국회에서 20년 넘게 <국화에 관한 법률> 제정을 밍기적거리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여러 사회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수학기호인 무한대(∞)가 무궁화의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다 하여 ∞와 비슷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정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나라사랑 어린이 기자단>도 흔쾌히 동의하여 2007년부터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기념하게 되었
다. 어린이만도 못한 정치인과 공직자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식물 산책」 소개 끝
첫댓글 명절연휴가 날씨까지 화창하여 좋은 휴식기간이 되고 있습니다. 귀성객이 귀경하는 행렬도 있었지만 대체로 여유스런 교통량이 서울도심의 여유스런 풍경 이었습니다. 이태리여행에서 돌아온 손녀도 밀린 숙제를 하며 곧바로 학원으로 직행하는 일과가 시작되었습니다. 추석음식을 많이도 먹는 탓으로 걷기역시 부지런히 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는 주변산책이 즐겁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