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0-1612 |
폴란드 군, 모스크바 점령. 러시아 국민군, 모스크바 해방시킴 |
1613 |
[23] 미하일 로마노프 즉위, 로마노프 왕조 성립 |
1631 |
키예프 신학교 설립 |
1645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즉위 |
1648 |
모스크바 '소금 폭동'.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의 대 폴란드 반란 시작 |
1649 |
〈회의법전〉 편찬(농노제, 법적으로 완성) |
1654 |
총주교 니콘의 종교개혁, 분리파(라스콜니키) 형성 |
1654-1667 |
러시아-폴란드 전쟁 |
강희대제
네르친스크 조약 [Treaty of Nerchinsk, ― 條約]러시아·청 역사
1689년에 러시아와 중국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
헤이룽 강[黑龍江:아무르 강] 유역에서 러시아의 전초기지를 철수시켜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저지했다. 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오호츠크 해와 극동 시장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잃었지만, 트란스바이칼리아(바이칼 호 동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고, 러시아 무역상들은 베이징[北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두 나라의 국경은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따라 설정되었다. 이 조약은 골리친의
외교정책이 거둔 성과로서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을 미리 막았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부터 동등한 지위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러시아가 중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조약을 맺음으로써 암묵리에 중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그후 캬흐타 조약(1727)으로 확인되고 확충되었으며, 1858~60년 러시아와 중국 관계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시기 까지 중국은 초강대국이엇다.
청나라는 헤이룽간 부분을 조금 대갔을뿐이지만
이후 1859년 러시아는 만주 전체를 가져간다
<코사크인들 >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중앙부에서 남방 변경지대로 이주하여 자치적인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농민집단인 코사크는 1936년 코사크의 적군 참가 제한이 폐지되었고, 새로 편성된 코사크 사단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용명을 떨쳤다.
구성 : 몽골계의 코사크인들
무장 : 사스카 , 소련군 지급 병기
코사크 기병대는 포로따윈 없었습니다.
코사크 기병 부대는 긴 장칼인 사스카를 주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오늘은 ‘오블’의 터줏대감이자 제 블로그의 단골손님이신 녹두님이 좋아하시는 코사크 (Cossacks) 기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광활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한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대장 불리바’는 코사크 인들의 생활상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코사크의 어원인 ‘카작’ (Qazap)은 ‘독립적인’ 혹은 ‘자유로운’ 이라는 의미를 가진 투르크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스스로를 ‘자유민’이라는 뜻의 ‘까자키’라고 불렀습니다. 슬라브족의 한 일파인 코사크 인들의 조상은 원래 돈 강과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정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뿔뿔이 흩어져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 평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도망쳐 나온 농노들도 법이 미치기 어려운 변경지대에서 모여 살며 자치적으로 군사조직을 이루어 코사크 인들의 다른 조상을 형성합니다.
15세기부터 이들 코사크 부족들은 독특한 머리 모양과 헐렁헐렁한 바지와 같이, 다른 슬라브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갖게 되었는데, 제각각 조그만 정착지를 중심으로 느슨한 권력구조를 가진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코사크 부족들의 정착지는 ‘시츠’ (Sicz) 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시츠는 마치 독립된 하나의 도시와 같이 자급자족적 경제 공동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병의 모집과 훈련 등 군사적 업무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시츠에서는 자유선거를 통해 ‘헤트만’ (Hetman)이라고 부르는 족장을 선출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시츠의 모든 구성원은 평등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었고, 선출된 족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는 탄핵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시에 헤트만의 권한은 절대적이어서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즉결처분할 권한도 행사했죠.
코사크인들의 자유 선거로 선출한 '헤트만'은 전시에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코사크 인들은 농사와 유목을 병행하였는데, 걸음마를 떼자마자 말타기 부터 배운 코사크 인들은 기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코사크인 들이 타고난 전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이들의 험난한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를 받아들인 코사크 인들은 투르크족과 타타르족을 비롯한 주변의 이슬람 세력들과 치열한 생존투쟁을 벌여야 했으며, 16·17세기에는 로마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장 불리바’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죠. 코사크 인들은 변경 지역의 땅을 경작하고 자치를 누리는 대신 이민족들의 침입에서 러시아를 지켜주는 국경 지대의 파수꾼 역할을 하였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말 안 듣고 골치 아픈 이 변경의 싸움꾼들을 억지로 중앙정부에 복속시키는 것보다 슬슬 구슬려 가며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는 판단이 섰을 법 합니다. 코사크인 들은 러시아의 묵인 하에서 점차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고, 시베리아 개척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예르마크’의 원정과 ‘하바로프’의 시베리아 탐험이후 코사크 족은 바이칼, 우수리강, 아무르강, 야쿠츠크 일대에 요새를 세웠으며, 이 요새들이 오늘날 ‘이르크츠크’와 ‘하바로프스크’, ‘야쿠츠크’ 등의 도시로 발전한 것이죠.
하지만 러시아의 ‘짜르’ 체제가 점점 중앙집권적 형태를 갖추어 가면서, 코사크인 들에 대한 정책도 변화하게 됩니다.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코사크 족에 대한 개입을 늘려갔던 것이죠. 코사크인 들은 자신들의 자치권이 위협 받을 때마다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는데, 17·18 세기 ‘스텐카라친’, ‘콘드라틴 블라빈’, ‘예멜리안 푸가초프’ 등이 그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코사크 인들의 봉기는 번번이 실패했고, 러시아 정부는 교묘한 방식으로 코사크인 들을 다루었습니다. 코사크 인들의 자치 의회 활동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인정을 했지만 사실 이것은 유명무실했죠. 러시아 정부가 코사크 사회의 최고 권력자인 ‘헤트만’에 대해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코사크인 관리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코사크 사회의 전통을 무너뜨렸습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임대할 수 있는 권리, 즉 지주권을 가진 관리들이 출현함으로써 코사크 인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평등사상과 토지공유제도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코사크 족 일가(一家), 코사크인들은 독특한 군사 공동체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짜르’ 체제 아래서 코사크 인들은 러시아 황실의 근위대 노릇을 하게 되었죠. 러시아 정부는 코사크 인들을 강제징집하는 대신 다양한 코사크 집단에 대해서 마치 ‘자유 상비군’ 집단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러시아 군내에 분산되어 편입된 다른 변경민족들과는 달리 코사크 인들은 독자적인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죠. 일정한 자유를 부여받은 코사크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각 집단별로 동원된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러시아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잘 훈련되어 있는 코사크 부대를 언제나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최선두에서 막아낸 것도 코사크 기병대였죠. 이들의 용맹성과 잔학성은 과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과 몽골족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코사크 군대는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군을 끝까지 쫓아가며 괴롭혔죠. 눈속에 깊숙이 빠져 탈진한 프랑스 군인들이 항복의사를 밝혔을 때도 코사크 인들은 인정사정없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크림 전쟁과 제 1차 대전까지 코사크 부대는 러시아군의 최정예 부대로 그 명성을 떨쳤죠.
코사크 부대는 잔인한 학살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 코사크 부대는 주로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러시아 민중들에게는 ‘짜르’ 압제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이 감독한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에서 잔인한 학살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코사크 부대였죠.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내전 과정에서 코사크 사회도 격심한 분열에 휩싸였고, 구체제를 수호하려는 ‘백군’과 혁명파인 ‘적군’으로 나뉘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승리는 코사크 집단의 영원한 해체를 가져 옵니다. 2차대전 당시 코사크 기병대가 부활해서 소련과 독일 양진영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과거처럼 군사 자치권을 가진 전통적인 코사크 기병대와는 전혀 다른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점점 불리해지자 독일에 투항했습니다.
독일이 패망하자 이들은 소련으로 귀화하였으나 거의 모든
파파샤 든 코사크
코사크 기병부대는 주로 비포장 도로나 전차가 이동할수 없는 곳에서
정찰 , 습격등을 도맡았습니다.
1750년대
대 프로이센 만세! 슐레지엔은 내꺼다 오스트리아out!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다!"
(마리아테레지아.루이 13세 엘리자베타)
하지만 이시기
13식민주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시풋 더러운 영국놈들 차가 머이리 비싸냐! 우리그냥 커피먹을련다!
"아니 이 양키들이 쳐돌았나?"
"억 핼프!"
조지 워싱턴은 깊어가는 패전을 역전시키고자
피뢰침 창시자 벤자민 프렝클린에게 프랑스에 원병을 요청하게된다
(프리드리히대왕 상황과 동일하다)
"루이 님아 저 영국놈들 짜증나죠? 화나죠? 식민지 뜯기는거 어떰?
콩팟이 쫄깃해지죠?"
"어...근대 우린 전쟁중인대..."
.
"독립만 시켜주시면 동맹.영국 발라드림"
(미국 독립전쟁이 프랑스의 재정을 악화시키는대 한목한다 결국 프리드리히에게도 긍정적인 상황이되는셈!)
그가 목표로 삼은 곳은 작센 공국이었다.
새로운 전쟁, 7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년 전쟁 때의 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는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선전포고를 했겠지만,
이 전쟁 중에 프리드리히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프리드리히의 공격을 받은 작센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프로이센의 상대국에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작센 이외에도 스웨덴과 독일의 다른 제후들도 가담하지만,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은 전투 때마다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1757년 6월의 쾰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 군에 대패하고 만다.
상대의 군이 대규모인데다 작전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패인이었다.게다가 영국이 프랑스의 침략을 받자 협정을 맺어,
프로이센군과 함께 싸우던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군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차례로 격퇴한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프로이센군의 규모도 점점 줄어들었던 데다, 병력을 보충할 필요에 쫓기다 보니
병사의 훈련기간도 점차 감소해
병사의 질이 점점 떨어져 갔다.
1760년 10월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기에 이르고, 영국은 프로이센으로의 원조를
중단할 것을 결정한다.이에 좌절한 프리드리히는,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1762년 1월, 프리드리히에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급사하고, 표트르 3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이었다.
표트르 3세는,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프리드리히는 즉시 표트르와 강화를 맺었고, 표트르는 프리드리히에게
병력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엘리자베타는죽었어 이제없어 하지만 프로이센 공격도 이제없어!
!!!!!
"연합군을 공격한다 프로이센을 돕는다!"
러시아군은 프로이센을도와 연합군을 공격한다
게다가 북쪽의 스웨덴 역시, 프리드리히의 누이인 스웨덴 왕비의 중재로 강화를 체결했다.
엘리자베타는 대외 적극책을 추진, 핀란드 남부를 병합하는 등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신을 드높였다.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를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아넣었지만, 갑작스럽게 서거한다.
결혼을 하지 않아 표트르 3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친프로이센적인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에 표트르 3세의 아내가 쿠데타를 일으켜 여제가 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다.
덧붙여, 10월에 다루었던 안나 이바노브나의 유언을 거스르고 쿠데타를 일으켜 이반 6세를 몰아낸 인물과
프리드리히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은 인물은 동일인이다.
이를 계기로, 전쟁의 양상은 180도 바뀌게 된다.
프로이센의 적대국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뿐이었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뒀다.
1763년 2월, 평화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전쟁이 있은 후,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큰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해 서프로이센을 차지해 영토를 한층 더 넓혔으며, 1778년부터 1779년까지 계속된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다시 맞붙었다.
또, 외교 면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발전을 매우 경계하며 작센 등과 동맹을 결성해 대항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했으며, 7년 전쟁 때의 고립에 다시 빠지기 않기 위해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프로이센의 성장.
녹색은 프리드리히 이전인 1600년의 프로이센, 주황색은 프리드리히 중기인 1772년까지 확장된 부분이다.
황색은 프리드리히 말기인 1772년부터 승하 후인 1795년까지 확장한 부분이다.
오스트리아와 영유권을 놓고 다루었던 쉴레지엔은 영어로 Silesia이고,
프리드리히가 마지막으로 확장했던 서프로이센은 South Prussi
"또라이시키...잊지않겠다.'
아무리 독일 출신이라도 러시아의 황제가 된 이상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할 터이고
적어도 러시아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노력했어야 할 터인데,
표트르는 러시아의 황제이면서도 스스로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표트르 3세의 치세는 반년에 불과했고, 폐위 1주일 뒤에 목숨까지 잃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자신들의 황제가 저지른 일에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어.
표트르 3세와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인 황후가 그였는데...
표트르의 황후는 엘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했을 때 열흘 동안이나 시신 앞에서 슬픔을 표현하거나 루터파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한편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등, 지식인과 군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어.
게다가 '페터' 라는 독일식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읽은 '표트르' 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황제와는 달리 황후는 '조피' 라는 독일식 이름을 버리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을 때 받은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으니, 러시아인이 자신들의 황제보다 황후를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
표트르 3세의 황후.
독일식 본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인데,
이내 이 이름을 버리고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 개명하는 등 러시아인이 되려고 애쓴 인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표트르는 자신의 황후가 러시아인의 지지를 얻으면 얻을수록
오히려 독일인이 되려고 애썼다고 하니,
이런 황제보다 황후에게 친밀감을 갖게 되는 것은 비단 러시아인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낸 황후는, 마침내 황실 근위대를 동원해서 남편을 몰아내고 스스로 여제 자리에 오르기에 이르렀어.
이 때가 1762년,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인 예카테리나 2세가 등장한 거지.
예카테리나 2세.
남편과 마찬가지로 독일 출신이지만, 남편과는 달리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와 함께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한편 예카테리나의 즉위 이후에도 1년간 계속된 7년 전쟁은,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인정되는 형태로 끝이 난다.
지난번에는 러시아에 맞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오스만 투르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라고 선언했던 오스트리아가, 지금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니까.
예카테리나의 외교에 대한 영국의 풍자화.
오른쪽의 여성이 예카테리나이고,
그 뒤에서 예카테리나를 지지하고 있는 인물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라고 한다.
영국과 프로이센 등이 탄 말의 꼬리를 잡고 있는 인물이 오스만 투르크일까.
러시아, 오스트리아와 1대 2로 싸우는 상황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거뒀어.
하지만 러시아와의 싸움에서는 크게 패배해서, 몰다비아의 수도 야시를 잃고 군단기지 호틴을 내주었지.
게다가 1788년에 러시아에게 함락된 오챠코프라는 도시의 주민들은 대대적으로 학살당했고, 압뒬하미드는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
오챠코프 공방전과 오챠코프의 위치.
오챠코프는 러시아의 입장에서 흑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존재로,
1787년에 함락시켰지만 2년 뒤에 다시 오스만 투르크령이 되었다가
1792년의 야시 조약으로 다시 러시아령이 된다.
이 충격 때문인지, 압뒬하미드는 그로부터 넉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무스타파의 아들 셀림이 셀림 3세로 즉위했어.
무스타파 이야기 때 언급했던 대로, 무스타파는 아들 셀림에게 기대를 걸고 셀림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지.
그리고 그 교육의 성과라고 할까, 셀림은 오스만 고전 음악의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인 동시에 아버지나 삼촌과 마찬가지로 개혁을 지지하는 인물이 됐다.
게다가 셀림은 황자 시절부터 행동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아 외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적지 않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개혁에 대한 열망을 더욱 불태웠다고 하니, 즉위하자마자 오스만 투르크의 사회, 경제, 행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건 당연한 일이었지.
하지만, 지금 셀림의 사정은 삼촌 압뒬하미드가 막 즉위했을 때와 같은 형편이었어.
개혁은 해야겠는데,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건 러시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라는 상황.
1791년,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는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했어.
이 조약은 근래에 오스만 투르크가 체결한 조약 가운데서는 가장 볼만 한. 즉, 공평한 조약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동맹이었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고 있었던데다 2년 전인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로서는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
. 그녀는 원로원으로부터 “대제”, “위대하고 가장 현명한 국모”란 칭호를 선사받았다.
“질투 많고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은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남편에게 매달리는 대신 평생 동안 공식적인 정부(情夫)만 23명에 환갑의 나이에도 20대 애인(플라톤 주보프였는데, 그의 아내는 예카테리나의 장남 파벨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을 두었던 ‘자유연애’ 신봉자이기도 했고, “사람은 바쁠 때만 행복한 법이다.”란 말을 증명하듯 번역을 하고, 수많은 수기, 극 대본, 우화시, 동화, 희극, 에세이 등을 저작했으며 주간지 <<프샤카야 프샤치나(모든 일들, 잡동사니)>>의 발행에 참여했던 문학가였다.
‘에르미타쥬’ 박물관이 된 ‘겨울궁전’에 있는 대부분의 소장품들을 수집한 러시아 문화의 수호자였고, 두 차례의 터키와의 전쟁과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와의 영토 분할로 러시아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대하였던 정복자였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푸가초프 농민 반란을 가장 잔혹하게 진압한 절대군주이도 했다. 이렇듯 예카테리나 II세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여제는 스스로를 ‘제위의 철학자’로 불렀다.
예카테리나에게는 첫 번째 정부였던 S.I.살트이코프의 아들이라고 의심을 받았던 파벨(1754년 생, 후에 황위를 계승하지만 어머니와의 사이가 안 좋았기에 ‘장자상속법’을 제정하여 더 이상 여자가 황위에 오를 수 없게 만들었다)과, 오를로프 백작의 아들이었던 알렉세이 보브린스키(1762년), 폴란드의 왕자 스타니슬라프 폴랴토프스키의 딸일 가능성 있는 안나 페트로브나(1757-1759)와 포촘킨의 딸이었던 엘리자베타 포촘키나(1775년)가 있었다.
예카테리나 II세는 1762년에 오를로프 백작과 결혼하려고 했으나 측근들의 권유로 이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고, 포촘킨과는 비밀리에 결혼했다(1775년)는 설도 있었다. 혹자는 여제의 정부가 백 명을 넘었다고도 하고,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두고 말과 수간(獸姦)을 하다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18세기의 문란했던 전반적 사회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녀를 스캔들 메이커로만 볼 수는 없으며,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던 포촘킨을 제외하고는 정부들을 정치에 전혀 개입시키지도 않았다.
사가들이 아무리 여제를 폄하한다 해도 어쨌든 예카테리나 II세는 러시아 제국사에서 표트르 대제와 함께 단 두 명뿐이었던 ‘대제’이고, 그녀의 치세 기간(1762-1796)은 러시아 제국의 ‘황금기’로 불리고 있다.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파리 시민들.
바스티유 공격은,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도 참 많이 보셨죠? 교과서에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프랑스 혁명을 잘 표현한 그림을 꼽으라면 이 그림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나 루이 16세의 처형 모습을 담은 그림을 기억에 올리실 겁니다.
혁명군은 왕의 목을 따기까지한다
카를 대공 (오스트리아)
저 프랑크놈을 혼내주자!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혁명군에게 털리고
이시기 가장 유명하면서 프랑스를 세계사
1위 반열에 올리게한 인물이등장한다
나폴레옹!
"병력이 없으면 SCV앞에 짱박고 뒤에는 벙커 뒤에는 시즈!마린보단 시즈를 업글하는것이다!"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이산도 못오르면 남자가아니지!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
스핑크스의 코는 누가 뜯어먹었는가? (나폴레옹 스핑크스에묻다 프랑스항공)
피라미드 전투
"그래봤자 해군은 껌"
-넬슨-
나폴레옹의 대관식
혁명? 나를 위한 혁명인것이지!
저놈 한번 혼좀내줘야겠어
트라팔가르 해전 프랑스해군 피똥쌈
"대륙 봉쇄령을 발동한다!"
아니 성님! 나는 어떻게살라고!
안돼!
-알렉산데르 1세-
돼!
바그라티온
"폐하 두려울게뭐가있습니까? 까짓거 전쟁합시다! 우리혼자도 가능합니다!"
1782년 러시아군에 들어가 중사로써 캅카스 머스켓연대에 배속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788년 투르크와의 전쟁에 종군하여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1792년부터 키에프 기마추격병연대에서 근무했다. 1794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장군에게 제 2차 폴란드 분할 시기에 폴란드에 주둔하면서 얻은 무훈을 인정받아 소피아기병연대장이 되었다. 1799년 이탈리아와 스위스 전선에서 브레시아 공략에 성공하여 러시아 귀국후 근위기병대대(후에 연대)장이 되었다.
1805년 홀라브룬 전투에서는 5배가 넘는 적군과 전투를 벌여 휘하 장병 절반을 잃는 가운데에서 쿠투조프 장군의 본진 퇴각을 엄호해 적군을 퇴각시키는데 성공했다.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바그라티온은 뮈라와 장 란이 이끄는 프랑스군 좌익과 대치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패배후에도 1807년 2월 아일라우 전투, 같은해 6월 프리틀란트 전투등에 전전하여 용맹과감한 전투를 지휘했다.
1808년 핀란드 전쟁에서는 제21 보병사단을 이끌고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행군으로 인해 바그라티온은 올란드 제도를 탈취했다. 그리고 1809년 바그라티온은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몰다비아군을 이끌고 투르크와 싸웠다. 1809년 바그라티온은 보병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세월에 걸친 활약으로 인해 그는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조연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12년 바그라티온은 서부 제2군을 지휘했으나, 모길료프(1812년 7월 23일)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바클라이 드 톨리 지휘하의 주력부대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보로디노 전투(1812년 9월 7일)에서 러시아군 좌익을 지휘했으나 여기서 그는 조아생 뮈라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9월 12일 상처로 인해 숙모의 영지였던 시마에서 죽었다.
시풋! 로시아의 기상이다!
너의 기상은 인정한다 이제넌 계정삭제다!
쿠투조프 -러시아
베니히센-러시아
이작전은 IC 30을날리는거였지만 나폴레옹군은 보급이 원활하지않았고 동장군까지 견뎌야했다
알렉산드르 이시키는 ㅄ이 틀림없어 수도를 태우다니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돌아가자 할짓없다"
나폴레옹은 돌아가는길에 동장군을 만나게된다.
70만에이르
나폴레옹 계정삭제는 너가해라!
코사크.각지 장군들.농민병 모두가 나폴레옹의
퇴각을 방해했다. 러시아는 혼자의힘으로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다
1814년 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엘바섬이라는 곳에 유배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해 2월에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귀환하는 도중...
왓노라 보았노라!
"와아!"
헉?
웰링턴공작 (영국)
저놈은 제가 맞지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 완전히 계정삭제당함
이대로 끝이란말인가?...
이후 빈회의가 열리고 러시아는 명실상부 최강국이된다.
(4) 혁명&전쟁편
을 둘로 나누겟습니다 다룰게너무 많더군요
(4)로마노프의 몰락과혁명
(5)스탈린의 시대 그리고냉전
(6)소련붕괴와 경제위기 그리고 푸틴
첫댓글 코사크가 아니라 카자크라 해야 더 바람직합니다. 두개 다 복수로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코사크는 일단 영어고 카자크는 러시아어이기 때문이죠.
카자크는 그런데 몽골계가 아닙니다. 몽골계 일파가 카자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는 했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그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주를 피해서 탈출해 온 슬라브인이었고 이들이 믿고 있는 종교도 실제 정교회였습니다.
에.. 그리고 사스카가 아니라 Shashka입니다. 샤슈카, 혹은 샤시카라고 해야 옳겠죠?
또, 대장 불리바가 아니라 '타라스 불바'입니다. 불바의 Л에 ь 이거 붙으면 '불리바'라고 발음 난다고 착각한 번역자들의 만행은 아직도 치가 떨릴 정도.. 자매품 고골리도 있죠. 타라스 불바는, 사람 이름으로 고골의 소설 주인공 이름이죠.
나중에 기회 되면 엔하위키(rigvedawiki.net)의 '카자크' 항목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썼지요(..)
ㄱㅅㄱㅅ 첝님은 러시아사에 해박하시군요?
카자크 쪽으로는 공부를 좀 한 게 있어서..
이거 저작권 관련해서 뭐라 안하던가요? 죄다 어디 블로그 복붙이구만-_-
아; 그것이 자료가 사진자료와 시간이너무부족하여. 근처 이웃불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절반은 제가쓴것도있우니 양해좀 ㅠㅠ 날짜지키려고 혁명편은 책 마스터후 제기량대로쓸생각 입니다
ㄷㄷ
알렉산데르 1세 자신이 초기에 추구했던 자유주의 개혁 죄다 실패하고 거의 모든정책이 효과를 못봤지만
프랑스 한번 이겨 인기와 명예가 부왘!-하지만 그뒤 세계정세를 이끌어가야한다.라는 사명감에 의해 러시아는 점점...
마르크스가 나온후부터 마조테크